리스본행 야간열차 (윈터 리미티드 에디션)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리스본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야간열차를 타 본 적이 있다. 침대칸 열차는 좁고 불편해서 좋은 기억이 남지 않았다. 그래도 오밤중에 달려간 기차역은 아름다웠다. 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네 식구가 사진을 찍으며 아름다운 리스본과 안녕을 고했다. 디젤 냄새 풍기는 기차역에 밤이 깊어도 아늑했던 것은 기차가 그날 밤은 우리의 집이었기 때문이었을까.

 

3일밖에 머물지 못한 리스본은 참 맑고 아름다워서 언젠가 꼭 다시 오고 싶었다.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던 기억들, 트램을 따라 광장을 뛰어다니던 일, 광장, 열차 타고 다녀온 페냐 성... 좋은 기억만 남은 몇 안 되는 여행지이다.

리스본에 대한 순전히 좋은 기억만으로도 이 책은 매력적이었다. 어쩌다 보니 영화를 먼저 보았는데 영화도 나쁘진 않았지만 책이 주는 특별한 깊이가 있다. 혁명의 향기, 문자향, 리스본의 향기, 바다 냄새, 비 냄새, 오래된 건물의 먼지 냄새 같은 것이 섞여 있는 아름다운 문학작품, 그러니까 일 년에 한두 편 볼까말까한, 그런 책이었다, 내게는.

 

주인공인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는 같은 자아를 가진 사람인 듯 보인다.

얼핏 보면 둘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내성적이고 학자적 성향이 강한, 고등학교 고문법 교사이다. 매우 고리타분한 삶을 살아왔다. 그에 비해 그가 좇는 아마데우는 아름다운 태양같은 사람이다. 숭고하고 화려한, 주목과 숭앙을 받는 사람. 그러나 아마데우는 그레고리우스의 페르소나이다. 그 둘은 탐구심, 도덕심, 본질 추구...등에서 공통적이다. 어쩌면 그레고리우스가 살고 싶었던 또 다른 삶을 산 사람이 아마데우가 아닐까.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변덕이나 뒤틀린 허영심도 아니었다. 나중에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런 태도는 잘난 척하는 세상을 향한 조용한 분노.. 라고 생각했다.

 

아마데우는 천박한 허영심을 대하면 잔인해졌소..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아마데우는 허영심을 돌림병처럼 증오하던 사람이었다. 뛰어난 사람이 자기 안의 허영심을 경계하기란 쉽지 않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말 중 하나인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란 표현도 결국 아마데우가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벼리는 말이기도 했다. 타인은 나의 거울일 수 있다. 하지만 법정이라니! 이 엄혹함 앞에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은 게 사실이지,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들은 부끄러움도 부끄럽다. 나보다 더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특히나 아마데우처럼 뛰어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사회적 영향을 생각해서라도 좀 더 스스로에게 엄격해지기를... 여기서 엄격함은 사회적 성공에 대해 기능과 스펙을 키우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성, 겸손에 대한 엄격함이기를....     

 

그렇게 극과 극의 삶처럼 보이던 두 사람의 삶은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도 아마데우과 같은 종류의 병인) 뇌의 이상을 느끼면서 만나게 된다.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의 뇌종양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병원 벽에 있는, 뇌지도가 걸려 있던 사각형 모양의 빈자리를 생각했다.

삶의 양상은 전혀 달랐으되 어쩌면 죽음으로 가는 길이 비슷해지고 있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비극을 뇌종양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레고리우스는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세상을 만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그 안에 열린 마음을 보는 게 중요하다. 존엄에 대하여 아마데우가 스스로에게 엄격히 요구했던 항목처럼 곧 스스로 군더더기 없이 허영 없이 살 때만이 스스로 인정하는 존엄성을 지닐 수 있다. 의사, 혹은 혁명가 혹은 열정적 사랑에 빠진 이는 모두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 아마데우는 그렇게 파란 불꽃으로 순정하게 살았던 사람이고, 그레고리우스는 그를 알아보는 영혼이었다.

 

(새 안경을 맞춘 그레고리우스)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타호 강은 더 이상 흐릿한 갈색 평면이 아니라 그야말로 강이었고, 상 조르지 성은 하늘을 향해 세 방향으로 솟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세상은 피곤했다. ... 새상은 더 가까워지고 강제적이 되었으며, 뭔가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보이지 않는 이 요구가 너무 커지면 모든 것과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단어와 글 저편에 과연 외부세계가 있기나 할까라는 의심 이 의심은 즐겁고 소중했다. 이런 의심이 없는 삶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 을 가능하게 했던...

 

본질적으로 둘 모두 지나치게 고귀한 성향 때문에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면모도 보인다. 아마데우는 끝끝내 자신의 고결함에 자신을 베이고 말지만 오히려 그레고리우스는 건강하게 현실을 벗어나 자아찾기에 성공한다. 아마데우를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또 다른 면을 궁금해 하지만 궁금해 한다고 해서 다 자아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거울을 만난 그레고리우스는 행운아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