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당한 천사에게
김선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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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는 책의 서두에서 단호하게 잡문은 없다.” 라고 선언하고 이 글들을 시작한다. 어떤 소설가는 평생 신문 등에 잡문을 쓰지 않은 것을 자랑했다고 하지만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당당히 자기 어깨를 내미는 문인들은 그런 순결주의를 오히려 경계한다. 문학은 세상을 바꾸려 노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필요하다면 잡문도 써야 하고 희망버스도 타야 한다. 시를 쓰던 가슴으로 높은 곳에 올라간 노동자들의 손도 잡아야 한다. 그걸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잡문이라고? 잡문이라 하면 오히려 세상의 아픔에 눈 돌리고 등 돌린 자들이 쓰는 글, 아니 곡학아세하고 폭군에 아부하여 글로 감투를 벌어보려 애쓰는 자들이 쓰는 글이 잡문이겠지. 김선우가 인용하는 조지 오웰의 말은 참 당당하지 않은가.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인 태도이다.

 

무슨 작품을 읽으면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앞으로 김선우가 쓰는 책은 모두 사서 읽겠다고 결심했던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시가 아름다워서 좋아했을 터이고 아마도 그토록 아름다운 시와 소설을 쓰는 이가 용감한 글들을 망설이지 않고 쓰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고 여겨져서 그랬을 터이다. <부상당한 천사에게>에 실린 글들은 아마도 신문 등에 올린 글들은 모은 듯, 나로서는 익숙한 견해들이이었다. 그는 여전하고 건재하고, 더 당당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앞으로 나올 그의 시나 소설들도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문학의 순수성 운운하며 마치 그 길이 아닌 길로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으름장을 놓는 이들에게 김선우는 하나의 살아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문학의 진정한 순수성이 무엇인지를 입증하는.

 

김선우는 내게 대신 독서의 기쁨을 맛보게 한다. 문인들은 아마도 글을 읽다가 필요한 문구를 만나면 따로 메모를 해두는 듯하다(나 역시 그런 메모를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숨겨놓았는지 잘 찾지 못하고, 남의 말을 인용해 글을 쓰거나 말하는 것을 즐겨하지는 않는다). 김선우의 글을 읽으면서 독서의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 복습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은 내 머리 속의 정리되지 않은 책장을 잘 찾아가게 도와주기도 하고 때로는 새 책으로 책장을 채우게도 하는 좋은 책 친구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단다.“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 부르지만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사회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얼마 전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일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연민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연민이 동정에 그쳐 버리면 자선을 베푸는 이상인 아니라는 것. 힘들게 사는 이들을 돕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그와 내가 같은 인간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동전을 던져주는 구휼과 자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연대가 필요한 것이다.

만약 뛰어난 의지와 이상을 구조화할 지적인 능력이 있는 이라면 무슨 주의자가 되어서라도 사람들의 맨 앞에 서서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목소리가 크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감성을 지닌 이라면 함께 하자고 호소하고 격동할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나처럼 어떤 능력을 지니지 못한 이들도 연대의 이름으로 자기가 힘을 보태 세상을 바꿀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동전을 모아 나누어 먹는 일도 꼭 병행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엽말단만 바꾸는 일로 자기 위안을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층간 소음 꽃으로 해결하기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심해 꽃 한 다발을 사들고 올라가 보니 노부부가 살고 있더란다. 그리고 그 후 소음은 줄어들었고, 김선우는 그것이 꽃의 힘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평범하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다름의 인정’, 그리고 서로에게 다가가기라고.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나는 사립 남자중학교만 30년 가까운 세월 근무해오고 있다. 드세고 단순한 남중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 작은 아이도 많고 표현이 부족한 아이도 많다. 거친 언사와 드센 눈빛, 말하자면 싸가지 없고 무례한 아이들도 많이 만난다. 여교사를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성적(性的)으로 모멸하려 드는 어린 아이들도 꽤 있다. 물론 어려운 가정에서 힘들게 자라 자기 안의 좋은 성품과 잠재력을 자기 스스로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불쌍한 아이들도 많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만날 때 종종 책을 선물한다.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는 사진집을 건네기도 하고 지력이 높지만 세상을 거칠게 바라보는 아이들에게는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책들도 건넨다. <어린왕자><연어>, 김용택이나 신현림이 선별한 시집도,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도 늘 내 책상에 꽂혀 있다.

 

조금 얇게 말하면,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잘해주려 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내가 저렇게 진지하게 만났던 학생 중에서 계속 함부로 행동했던 아이는 없었던 것 같다. , 물론 책 선물은 꼭 말썽꾸러기들에게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감성이 남달랐던 아이들, 고민의 깊이가 성숙했던 많은 제자들과도 함께 했다. 혹여 이 글을 읽는 나의 제자 중에 오해하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변명처럼 덧붙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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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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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프랑스에 빚지고 있다.’고 어떤 진보 인사가 말했던 적 있다. 그 말에 공감하면서, 내가 프랑스에 가지고 있던 호감의 기원은 저것이겠구나, 싶었다. 정작 프랑스에 가 보면 이방인 관광객에게 무뚝뚝한 그들이나 생각보다 너저분한 길거리에서 무슨 짝사랑의 염으로 여길 오고 싶어 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열광했던 프랑스는 와인이나 샹송, 패션과 같은 피상적인 것들은 어차피 아니지 않았나. 혁명의 역사, 관용의 문화, 늘 대화하고 토론하는 모습 같은 것들이 부러웠던 것이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연인들이 처음 만날 때 사르트르가 어쩌니 저쩌니 철학 논쟁을 벌이는 걸 보고 웃은 적이 있다. 그 모습이 프랑스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왠지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비정상 회담>에서 새로운 프랑스 패널 오헬리엉은 자기 나라의 단점으로 사람들이 매사에 불평불만이 많다고 말했다. 그게 좋은 점이기만 하지는 않겠지만 가진 자들의 불의에 눈감는 대한민국보다는 나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선진국에서 이미 18, 19세기 즈음에 극복하고 확보했던 시민의 권리나 인권에 대한 성문(成文)적 명시를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인위적으로 얻지 않았는가 하는 것 말이다. 식민지와 전쟁과 군부독재를 거치며 민주주의의 역사를 제대로 겪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나마 근대적 헌법을 받아들여서 다행이다라는 생각과, 우리 손으로 쟁취하지 못해서 이리도 취약한가 하는 생각이 교차한다. 탄탄한 민주 헌법과 인권의식을 전세계에 제공하는 역할을 한 프랑스의 역사를 부러워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요약하면 <제르미날>19세기 프랑스 광부들의 파업 이야기다. 시커먼 탄광촌의 비참하고 더러운 광경에 싹트는 달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소설은 소설적 재미와 더불어 대서사적인 구성을 갖춘 대작이다. ‘문학이 무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무언가를 한 많은 사례를 들 수 있겠지만 특히 프랑스 민주주의에 에밀 졸라와 <제르미날>이 한 역할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감히 문학이 뭘 할 수 있냐?’ 는 질문을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1980년대의 문학작품들은 그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마치 프랑스의 19세기처럼, 문학이 곧 투쟁이었던, 아니 삶의 모든 영역이 투쟁 아닐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빛이 바랬지만 김지하가 젊은 대학생들의 피를 끓게 했고 조정래가 소설로 한국근현대사 공부의 불을 지폈다. 대학에서 역사와 사상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는 데 <태백산맥>보다 좋은 실마리가 없었다. 그 소설에 대한 열광과 근현대사에 대한 궁금증이 <민중과 지식인><해방전후사의 인식> 독서와 맞물려졌다. 그리고 그런 동력은(물론 광주에 뿌리를 대고 있긴 했지만) 87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문학은 분명 힘이 세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에밀 졸라와 빅토르 위고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 역시 그들의 혁명사와 맞물려 있으리라. 민중은 우왕좌왕하는데 지식인이나 문필가들은 간이나 보고 있는 형국이 아니었다는 것. 문학과 예술이 곧 혁명의 전선에 함께 했다는 것이 고스란히 그들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에 남아 있다는 것, 지금도 그리하여 어떤 어리석은 정치적 결정에 국민들의 불평불만과 토론 습관은 끊임없이 간여한다는 것. 민주주의는 어리석음을 안고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과정과 역사가 중요한 것이다. 제대로 된 혁명의 역사를 갖지 못한 우리가 프랑스를 부러워하는 것은 그들이 선진국이어서가 아니다. 다 자기들 손으로 (심지어는 시행착오조차) 일궈냈다는 점, 그래서 쉽게 뒤로 물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존중은 없고 동정만 있는 브루주아의 자선

<제르미날> 속의 브루주아들은 그저 사악하기만 하지 않다. 드뉠랭은 합리적인 사장이다. 그레그아르 가족은 온유하고 인격적으로까지 보인다. 가난한 자들에 대해 옹색하나마 연민과 선의도 갖고 있다. 물론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고, 때로는 극단적인 순간에 동정이라도 좋으니 구휼적 자선이 필요하리라. 그러나 그들이 베푼 선의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그것은 사실 본질을 파고들어가 보면 가진 자의 오만이고 자기만족일 뿐이다.

그레그아르 가족이 라 마외드 가족에게 베푼 것은 동정에 불과했다.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은 어린아이들에게 옷가지를 주는, 현실인식에서 멀리 떨어진 자선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선량함이 어떻게 폭력적일 수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결국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고혈로 풍요를 누리지만 겉으로는 폭력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중산층들도 자기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치 도축의 피를 손에 묻히지 않고 요리된 고기를 먹는 자들이 고상을 떨고 있는 형상이다.

 

반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광부 가족들의 미덕은 극단적인 경우에도 자존을 잃지 않는다는 것. 아이들을 끌고 구걸을 하러 가야 했던 라 마외드도 끝내 인간의 품격을 잃지는 않았다. 파업 과정에서 브루주아들이 제시한 타협점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존감 때문이다. 그래서 당당해 보인다.

 

광부들의 지도자격인 에티엔 등 혁명의 선두에 선 사람들의 양면성을 다룬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의도의 시작이 순수했더라도 과정의 변질은 언제나 혁명을 망쳐왔다. 자기들끼리의 불필요한 논쟁, 혁명의 순수성을 말하지만 사실은 명예욕에 휩싸인 인간들, 민중의 함성을 인기의 척도로 생각하고 연연해 하는 모습, 먼먼 중앙의 인정에 목매 언젠가는 노동이 아닌 언변으로 또 하나의 브루주아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 자기 안의 그런 욕망들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단지 혁명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인간성을 고찰하는 소설이 될 수 있었다. 인간은 나약하다. 문제는 언제나 고민하고 성찰하는가 아닌가이다. 성찰하지 않는 인간은 서서히 이기적으로 변하거나 심지어 악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에티엔은 나약함과 이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끊임없이 고민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그나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민중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도 흥미롭다. 민중은 절대선도 절대악도 아니다. 그래도 무너진 갱도의 동생을 구하려 사투를 벌이다 폭사한 쟈사리, 남편과 아이들을 잃고 다시 일터로 나아가는 강인한 라 미외드, 갱도에서 죽음 직전에 마지막 사랑을 나누는 카트린과 에티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평범하고 나약하지만 숭고하다. 오히려 삶에 기반한 욕망이기에 인간적이었고 평범했기 때문에 더 감동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카트린은 어리석었고 에티엔은 위선적이었지만 죽음 앞에서 함께 했던 두 사람은 처절할 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에티엔은 카트린이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깨울까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은 줄 알면서 그가 그녀를 처음으로 가져서 그녀에게 아이를 배게 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울컥 슬픔이 복받쳐올랐다.’

 

 

'지금까지 그 어떤 소설도 아직 모호하기만 했던 노동자들의 열망을 이처럼 심오하고 진실하게 표현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졸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존경과 사랑이 부럽다. 1902105일 몽마르트 묘지에서 거행된 졸라의 장례식에서 프랑스 북부 드냉에서 달려온 광부 대표단이 세 시간 넘게 졸라의 묘혈 앞을 돌면서 제르미날, 제르미날을 연호했다는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졸라가 1866~1867 전후 프랑스 탄광들의 크고 작은 파업들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그 진정성이 더했던 것이리라. 그는 실제로 675미터 아래 땅속 갱도까지 내려가 보았고 탄광촌을 직접 방문해 눈으로 직접 보고 기록하여 <앙쟁에 관한 노트>를 작성했으며 이걸 바탕으로 제르미날을 집필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현실의 힘이 되어준 위대한 문학과 문학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토록 문학적으로도 강력하고 현실에서도 투쟁적이었던 문필가가 누가 있었던가 돌아보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문학이 정치나 혁명과 손을 잡고도 당당할 수 있는 그런 나라에서 한 번쯤은 살아보고 싶다. 이 생에는 이미 불가한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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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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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정여울 , 풀꽃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문학 선생이라는 점이다. 중학교에서 열다섯 살짜리 남자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문학적일 수 있을까. 대학에서 문학의 본질을 가르치는 이들과 나를 같은 반열에 놓는 일이 우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나의 정체성을 문학선생에 놓는다. 물론 문학의 사회적 의미’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가 윤동주에게 물었던 질문,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니?’)를 나 자신에게 되돌리는 그런 선생이라는 점에서 스토너와는 다를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여울이 이 책을 극찬했을 때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을 때도 그렇고 아무래도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 대한 공감은 당연하리라.

 

농업을 전공한 대학생이었으나 어느 교양 문학 수업에서 만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로 영혼을 한 대 얻어맞은 학생 스토너는 이후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 학자 교수의 길을 걷는다. 문학과의 만남을 이토록 순정하게, 본질적으로 표현한 글이 많지 않으리라. 어떻게든 문학의 맨 얼굴을 잠시라도 접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충격과 감동을 잘 이해할 것이다. 나에게 그 순간이 어떤 한 지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그 기분은 안다. 중학교 때 조지훈의 시를 읽을 때도 그러했고 하다못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의 감동도, 시리게 느꼈던 기억(그리고 더불어, 분석적으로 시를 가르쳐야 하는 아픔을 스스로 몸부림쳤던 국어선생님들을 얼마나 안타깝게 이해했던가, 나는!)이 있다.

 

그는 평범한 1학년생들에게 문법과 작문 기초만 가르치게 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아주 중요한 일 같아서 열정적으로 고대하고 있었다. ... 일주일 동안 강의 계획을 짜면서....우선 문법의 논리성이 느껴졌고 그것이 스스로 퍼져나가 언어 전반에 스며들어서 인간의 생각을 지탱하게 된 과정을 알 것 같았다. 그는 학생들을 위해 고안한 간단한 작문 연습에서 아름다운 산문의 싹을 보았으며 자신이 느낀 것들로 학생들에게 활기와 의욕을 불어넣게 될 때를 고대했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스토너는 지금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결코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시절이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스토너는 문학선생에 발 들여놓는 순간부터가 참 그답다. 순수하고 본질적이다. 그가 가장 빛나던 것은 물론 가르치는 기쁨을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이였다는 데서 나타나지만 말이다.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깊은 희열을 주는지를 맛보고 이 삶을 지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다. 아마 무대 공연을 하는 이들도 그림을 그리는 이들도 책을 써서 독자를 만나는 이들도 다 나름대로 자신의 창작이 인정받는 순간의 기쁨을 알 것이다. 수업은 그런 종류의 창작물이 아니지만 기획과 실연과 교감과 이후의 영향이 일관되게 만나는 일종의 예술이다. 수업을 해본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할 것이다. 수업 듣는 학생들의 눈빛을 통해 자신의 수업이 얼마나 많은 전기적 자극을 주고 있는지를 발견했을 때, 자신의 수업으로 인해 학생들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의 부글거림, 이글거림, 돋아남, 들끓음들이 생겨났는지를 느낄 때의 기쁨.... 스토너는 진정 그걸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결코 화려할 것도 재미있을 것도 없는 선생이란 자리가 이토록 매력적이라는 것을 아마도 저자인 존 윌리엄스는 스스로 경험했기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다른 장면들 스토너가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장면 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소설가의 편파적인 시각(스토너 편들기)이 불편했던 점을 조금이라도 언급하고 싶다. 스토너의 선량하고 우유부단한 성품과 달리 아내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묘사했지만 내가 볼 때 두 사람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스토너가 이타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내가 사회적으로 진출하려는 욕구, 예술적 성취의 욕구를 마치 이기적인 사람의 모습인 양 묘사하고 잇는 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견해일 수 있다고 본다. 양육방식의 차이도 그렇다. 부부의 불화는 양육방식의 차이를 낳고 그 갈등 사이에서 아이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지만 아버지가 학자의 길로 딸을 이끌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가 망쳤다는 식으로 보긴 어려울 수 있다. 이것은 양육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부모의 불화가 아이를 불안정하게 키운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 말미에 암에 걸려 죽음으로 걸어들어가는 스토너의 모습이 어찌나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마치 나 자신이 곧 임종을 맞을 것처럼 마음과 몸이 함께 잦아드는 것 같았다. 만약,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자신의 감정과 몸 상태를 그대로 기록하고 죽는다면 이러하리라 싶을 정도로 정밀하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만날 때 얼마나 두려울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상상하지만 만약 병약해져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몸의 쇠잔해짐과 더불어 정신의 힘도 약해지면서 이 삶의 피로함 뒤에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감기몸살이라도 심하게 앓을 때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고 먹고 싶지도 않고 잠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죽음이 얼른 나를 데려가기를 바랄만큼 육체를 곤하게 저 심연으로 가라앉힐지도 모른다. 나의 정신 에너지도 서서히 사그라들면서 다가오는 죽음을 맞는다면, 슬프지만 나쁘지 않으리라. 그래도 스토너의 죽음이 슬펐던 것은 마치 옆에서 며칠간의 임종 과정을 다 지켜본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이리라. 어느 날 갑자기 접한 지인의 죽음이 아니라, 잦아드는 과정을 함께 한 시간들이 주는 그 세세한 아픔의 공유 때문에 충격적이지는 않으나 깊이깊이 슬플 수밖에 없는, 그런 죽음. 이 소설의 미덕은 잔잔해 보이면서도 정밀한 감성의 묘사와 전달에 있다. 문학을 만나는 감성, 잘 가르치고 싶은 열망과 희열, 죽음을 만나러 가는 과정의 고단함 등을 어찌나 치밀하게 묘사했는지 동종의 감수성과 정신영역에 사는 이들에게는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 모든 이가 이 즐거움을 공유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별만큼 많은 이들이 각기 다른 즐거움과 감성으로 서로 다른 영역들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사니까. 모든 이에게 문학이란 게 그토록 절실하고 아름답고 밀접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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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G. 융 무의식 분석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총서 3
C.G.융 지음, 설영환 옮김 / 선영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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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의식에 관한 융의 저작이다. 물리학까지 동원되는 융의 박학다식함이 독자에게 즐거움을 줄 수도 있건만, 어색한 번역 때문에 책의 진가를 한국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떤 인간이 어떤 것에서 이뤄지고 있는가를 알기만 해서는 그 인간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이 문제라면 그 인간을 산 인간이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성취한 바로 인간을 평가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싶다. 융은 프로이트처럼 과거의 원인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로 현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는 아들러와 융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야말로 애초 문명인의 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신경증 환자에 대해서는 신경증은 자기 자신과의 불화나 알력이다. 의식은 도덕적 이상에 따르려고 하는데 의식은 비도덕적 이상을 지향하여 행동하려 한다,’고 말하는데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신경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거꾸로 비도덕적인 사람이 신경증에 걸리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은 도덕 자체가 억압되어 있다.’

 

사례 중에서 사업 후 휴식을 즐기고자 했으나 우울증에 빠진 남자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성공적인 사업 수행에서 벗어나 퇴직 후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어 했지만 막상 퇴직한 후에는 그러지 못했다. 다시 일로 복귀해 보았지만 일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는 그렇게 멋지게 전환되지 않았다. ‘예전에 조직을 이끌었던 것처럼 그의 데몬은 그를 파멸로 이끄는 속임수를 감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일이 별 의미 없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교훈도 얻을 수 있고 한편으로 에너지가 강한 사람은 그 에너지의 방향을 어떻게 잡는지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도 필요하다. 그런 열망의 에너지는 좋은 관계를 만나면 긍정적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남을 해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대립과 긴장이 없는 곳에 에너지는 없다. 그런 고로 의식의 입장에서 그 대립물이 발견되어야 한다.

사랑의 대립물은 권력에의 의지이다. 사랑이 지배하는 곳에 권력의지는 없으며, 권력이 판치고 있는 곳에는 사랑이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그늘이다.

 

비슷한 이야기로 인간관계의 불화는 자기 자신과의 불화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무의식은 억압한다면 그 배후에서 습격할 것이다.’ ‘억압을 제거하면 의식의 여러 내용들이 무의식 속에 가라앉는 것을 막게 되고, 그럼으로써 무의식의 생산활동이 멈추게 되리라.’ 무의식을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님을 융은 제안한다. 무의식의 긍정적 측면을 아니마와 아니무스로 설명하기도 한다.

 

무의식이란 마음 중 의식되지 않는 것들의 존재- 의식 영역의 바닥 밑에 체류하여 의식에 의해 지각되지 않은 채 형성되어 잠재의식적으로 흡수된다. 이것은 직관이나 사색으로 인지되기도 하고 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무의식을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직관을 열어놓아야 한다.

무의식이라는 게 그야말로 무의식적으로존재하다 보니 다음과 같은 일도 발생한다.

 

니체는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안에서 1835(<짜라~>를 쓰기 전)에 발행된 선원의 수기 중 일부를 쓴다. 이는 표절의 의도가 아니라, 자신이 읽은 것을 무의식에 묻어두었다가 꺼낸 듯하다.(어렸을 때 들은 농부의 노래를 나이든 작곡가가 자신의 교향곡 악장에 테마곡으로 쓰는 경우가 있음).

 

그러고 보면 나 역시 도종환 시에 흠뻑 빠져 있을 때 도종환 풍의 시를 쓰곤 했다. 의도하지 않은 표절이 예술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은 오래 인간의 역사 속에 공유된 원형들, 그리고 동시성(이것도 융의 개념이다), 인간 사고의 유사성과 더불어 무의식적 습득으로 인한 의도하지 않은 닮음에서 기인하는 바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표절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무의식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융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의식이란 게 그야말로 100% 의식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완벽한 의식은 불가능하며 인간은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에 좀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드문, 훌륭한 품성이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뒷부분의 에 관한 부분이다. 번역을 다른 이가 한 것인지, 융의 문체가 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문장도 보다 명료해진다. 융은 꿈을 하나의 사실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꿈은 의미를 지니며 꿈은 무의식의 고유한 표현 중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인과적이고 목적적이라고 본다. 프로이트와 달리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그리고 긍정적이며 보완적인 의미로 꿈을 바라본다.

 

융은 꿈의 장면들은 의식적인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고도로 객관적인 소산이라고 말한다. 꿈은 의식의 저변을 흐르지만 확정적이고 명확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꿈은 도덕적으로 잘 행동하라고 명령하지는 않는다. 가령 완벽한 신사가 추저분한 여자 꿈을 꾼다면 외적인 완벽한 자신의 모습의 허구성을 보상하기 위해 의식을 평형을 이루려는 무의식의 시도일 수 있다. 꿈의 상징은 인간의 마음의 본능적 부분에서 합리적 부분으로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전달자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꿈과 꿈꾼 이를 분리할 수 없고 이미 정해진 꿈 해석이란 있을 수 없다. 각 인간마다의 맥락을 봐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동양식 꿈 해몽이 다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융 식으로 말하자면 문화적 축적으로 이룬 원형이 공통적인 꿈 해석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개인의 맥락이지 매뉴얼화한 해몽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꿈에 대통령을 만났다의 한국식 해석은 대길이지만 융은 열등감이 강한 사람이 꿈에서 위대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거나 완벽한 척 젠 체하는 신사가 현실에서 경멸하는 추저분한 여인꿈을 꾸며 자신의 무의식을 만난다고 해석한다.

 

같은 꿈이 반복되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한다. 무의식이 지속적으로 보내는 신호일 것이다. 꿈은 꿈꾸는 이의 생활태도에서 부족한 것을 보상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고 장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고 한다.

 

또 꿈은 정신적 균형을 잡아주기도 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날아가거나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꾸기도 한단다. 오만에 대한 무의식의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꿈 중에서 꿈꾼 이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인출해낼 수 없는 요소가 종종 있다. 이를 융은 원형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 같다. 우리 몸에 진화의 흔적이 있듯이 옛날의 심리가 우리들 심리 속에 있다는 것이다.

 

융은 많은 신앙인들은 심리학을 두려워해 원형적인 마음의 힘과 상징을 외면했다.’면서 일찍이 정신이었던 것들이 오늘날 지능과 동일시되어 만물의 어버이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고 의미 있는 주장을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의 원형 손실은 꿈의 상징으로 보상된다.

 

 

무의식은 단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의식이 되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정신적 내용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내가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모든 것, 언젠가 의식했지만 이제는 망각된 모든 것, 나의 감각에 의해 인지되었지만 의식이 유념하지 않은 모든 것, 내가 의도 없이, 주의하지 않고, 다시 말해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하고자 하고 행하는 모든 것, 내 안에 준비되어 있어 나중에야 비로소 의식에 나타나게 될 모든 미래의 것...

 

이 무의식이 순전히 개인의 것이든 원형에 근거한 집단 무의식이든, 그것에 귀 기울이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융은 강조한다. 인간 안에는 의식으로 알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 분명 있다.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이들이 공부하는 학문이 아마 심리학일 것이다. 그 근원을 거대한 영적 존재로 보는 이들은 종교를 선택할 것이고 인간 보편성에서 신비를 풀어보려는 이들은 문학과 예술을 선택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무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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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들러 심리학>을 먼저 읽고 있었는데 그 책 광고에 ‘<미움받을 용기>의 원저라고 써 있다. 참 우습지 않은가. 원전은 소외받고 그것의 해설서가 각광받는 이런 현상. 그렇다고 아들러 심리학이 너무나 학술적이어서 읽기 어려운 책도 아닌데 말이다. <아들러 심리학>은 나중에 학부모 연수나 학부모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해 보았으면 싶을 만큼 쉬우면서도 현실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좋은 책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아들러를 일본에서는 뭐라고 해석했는지 궁금해졌다.

 

아들러는 열등감이라는 표현을 제일 먼저 쓴 심리학자라고 한다. 누구나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기 발전의 계기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지 열등감을 열등 콤플렉스, 즉 병적 수준으로 놓아두지 말라고 한다. 또한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열등감이 많은 사람임을 이야기하는 장면도 재미있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거울처럼 깊이가 같다.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다.

우월성 추구나 열등감 모두 성장을 위한 자극이 된다.

열등감 자체는 나쁜 게 아니고 열등 콤플렉스가 병이다. 나는 키가 작아서...할 수 없어등등처럼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가 문제라는 것이다.

 

말로 잘난 체를 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자랑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다.

반면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이 있다. ‘불행 자랑(너는 내 심정 어떤지 모를 걸)’을 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과 불행을 통해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의 관계를 권력투쟁으로 보는 관점도 재미있다. 자주 병을 호소하는 사람도, 문제아도, 자신이 우월적 위치에 서고자 일탈이나 병을 이용하는 것으로 본다. 교사들에게도 흔히 말썽꾸러기들을 보면 아프다, 관심과 사랑을 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보라고 한다. 심리학이라는 게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고 남들이 보내는 마음의 신호를 감지하기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닌가. 이 책을 단순히 자기계발서로 여겨 지금 여기서 행복하려고 노력해라.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수준으로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책을 기획한 이들의 의도는 바로 그런 목적으로 독자들이 이 책을 집어들기를 기대하긴 했을 것이다. 과연, 혼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의 병이나 불편감은 나 혼자 안에서 솟아난 것은 아니다. 관계를 주목하지 않고 혼자 행복할 수는 없다. 아들러도 결코 뭐든지 네 마음에 달렸으니 지금 여기서 행복하려 노력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정치토론을 걸어오는 사람의 목적은 상대를 도발하고 비난하여 굴복시키고 싶은 것이고 비행청소년이 된다거나 해서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은 상대가 권력투쟁을 걸어온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싸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고 한다.

분노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인데 화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보는 것은 용기를 잃은 이가 인생의 과제로부터 도피한 까닭이라고 한다. 이 말에 동의하는 것이, 대개 억울감과 피해의식이 많은 이들일수록 남을 비난하고 작은 일에 화를 내곤 하지 않는가.

 

궁극적으로 아들러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지금 여기의 행복을 논해서가 아니다. 그는 인간관계의 목표를 공동체 감각을 키우는 것에서 찾는다. 그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부모 자식간 조차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과 용기 부여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만약 자녀를 키우는 입장이라면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아들러 심리학에서도 부모나 교사가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킬지에 대한 언급, 학교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 칭찬과 벌의 무용론 칭찬하지 말고 고맙다, 라고 말하라. 칭찬도, 야단도, 체벌도 금물.

칭찬의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고 상하관계에서나 하는 것이므로 하지 말라고 한다. 부모 역시 자녀를 칭찬하지 말고 고맙다라고 말하라고 한다.

, 이제 학부모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이런 것을 얻어 가면 좋겠다.

부모는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상태에서 지켜보라고 한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자신이 자녀의 생활, 특히 공부에 개입하지 않으면 방임하는 줄 안다. 하지만 공부에 관해서는, 자녀에게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에게 관심은 많으나 개입하지 않는다고 느끼면서 자율적으로 스스로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하긴 잔소리도 지나친 개입도 아닌 방임도 아닌 그런 경지는 참 쉽지 않다. 모든 부모들은 자신이 자녀에게 잘하고 있는 줄 안다. 그런 과도한 자신감과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불안감이 공존하는 모순된 심리 상태에서 자녀를 키우고 있다. 그러니 아이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학교에는 노이로제 상태에 놓인 불안한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부모와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다들 당당하게 그럴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고 자기 아이가 얼마나 게으른지 성토한다. 상담실의 눈으로 보면 노이로제 걸린 아이들보다 더 불안한 것은 바로 그 학부모들이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갈팡질팡하며 결국 내리는 결론은 불안하니까 아이를 학원에 보내겠다이 불쌍한 시대의 자화상 앞에 그야말로 아들러를 강림시키고 싶다.

 

 

끝으로, 이 책을 내 마음의 평정을 위한 책으로 이용하려한다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안해서 밖으로 못나오는 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불안한 감정을 지어내는 것(은둔자의 변명).

누군가에게 욕을 먹었을 때는 상대가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거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

 

어렸을 아버지한테 맞아서 사이가 틀어졌다프로이트 식’,‘ 나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맞은 기억을 꺼내들었다 아들러 식

 

말더듬는 걸로 고민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투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자의식 과잉으로 더욱 말을 더듬게 된다. 자기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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