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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스토너 – 정여울 – 나, 풀꽃’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문학 선생이라는 점이다. 중학교에서 열다섯 살짜리 남자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문학적일 수 있을까. 대학에서 문학의 본질을 가르치는 이들과 나를 같은 반열에 놓는 일이 우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나의 정체성을 ‘문학선생’에 놓는다. 물론 문학의 ‘사회적 의미’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가 윤동주에게 물었던 질문,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니?’)를 나 자신에게 되돌리는 그런 선생이라는 점에서 스토너와는 다를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여울이 이 책을 극찬했을 때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을 때도 그렇고 아무래도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 대한 공감은 당연하리라.
농업을 전공한 대학생이었으나 어느 교양 문학 수업에서 만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로 영혼을 한 대 얻어맞은 학생 스토너는 이후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 – 학자 – 교수의 길을 걷는다. 문학과의 만남을 이토록 순정하게, 본질적으로 표현한 글이 많지 않으리라. 어떻게든 문학의 맨 얼굴을 잠시라도 접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충격과 감동을 잘 이해할 것이다. 나에게 그 순간이 어떤 한 지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그 기분은 안다. 중학교 때 조지훈의 시를 읽을 때도 그러했고 하다못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의 감동도, 시리게 느꼈던 기억(그리고 더불어, 분석적으로 시를 가르쳐야 하는 아픔을 스스로 몸부림쳤던 국어선생님들을 얼마나 안타깝게 이해했던가, 나는!)이 있다.
그는 평범한 1학년생들에게 문법과 작문 기초만 가르치게 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아주 중요한 일 같아서 열정적으로 고대하고 있었다. ... 일주일 동안 강의 계획을 짜면서....우선 문법의 논리성이 느껴졌고 그것이 스스로 퍼져나가 언어 전반에 스며들어서 인간의 생각을 지탱하게 된 과정을 알 것 같았다. 그는 학생들을 위해 고안한 간단한 작문 연습에서 아름다운 산문의 싹을 보았으며 자신이 느낀 것들로 학생들에게 활기와 의욕을 불어넣게 될 때를 고대했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스토너는 지금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결코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시절이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스토너는 문학선생에 발 들여놓는 순간부터가 참 그답다. 순수하고 본질적이다. 그가 가장 빛나던 것은 물론 ‘가르치는 기쁨’을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이였다는 데서 나타나지만 말이다.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깊은 희열을 주는지를 맛보고 이 삶을 지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다. 아마 무대 공연을 하는 이들도 그림을 그리는 이들도 책을 써서 독자를 만나는 이들도 다 나름대로 자신의 창작이 인정받는 순간의 기쁨을 알 것이다. 수업은 그런 종류의 창작물이 아니지만 기획과 실연과 교감과 이후의 영향이 일관되게 만나는 일종의 예술이다. 수업을 해본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할 것이다. 수업 듣는 학생들의 눈빛을 통해 자신의 수업이 얼마나 많은 전기적 자극을 주고 있는지를 발견했을 때, 자신의 수업으로 인해 학생들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의 부글거림, 이글거림, 돋아남, 들끓음들이 생겨났는지를 느낄 때의 기쁨.... 스토너는 진정 그걸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결코 화려할 것도 재미있을 것도 없는 ‘선생’이란 자리가 이토록 매력적이라는 것을 아마도 저자인 존 윌리엄스는 스스로 경험했기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다른 장면들 – 스토너가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장면 – 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소설가의 편파적인 시각(스토너 편들기)이 불편했던 점을 조금이라도 언급하고 싶다. 스토너의 선량하고 우유부단한 성품과 달리 아내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묘사했지만 내가 볼 때 두 사람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스토너가 이타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내가 사회적으로 진출하려는 욕구, 예술적 성취의 욕구를 마치 이기적인 사람의 모습인 양 묘사하고 잇는 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견해일 수 있다고 본다. 양육방식의 차이도 그렇다. 부부의 불화는 양육방식의 차이를 낳고 그 갈등 사이에서 아이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지만 아버지가 학자의 길로 딸을 이끌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가 망쳤다는 식으로 보긴 어려울 수 있다. 이것은 양육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부모의 불화가 아이를 불안정하게 키운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 말미에 암에 걸려 죽음으로 걸어들어가는 스토너의 모습이 어찌나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마치 나 자신이 곧 임종을 맞을 것처럼 마음과 몸이 함께 잦아드는 것 같았다. 만약,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자신의 감정과 몸 상태를 그대로 기록하고 죽는다면 이러하리라 싶을 정도로 정밀하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만날 때 얼마나 두려울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상상하지만 만약 병약해져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몸의 쇠잔해짐과 더불어 정신의 힘도 약해지면서 이 삶의 피로함 뒤에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감기몸살이라도 심하게 앓을 때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고 먹고 싶지도 않고 잠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죽음이 얼른 나를 데려가기를 바랄만큼 육체를 곤하게 저 심연으로 가라앉힐지도 모른다. 나의 정신 에너지도 서서히 사그라들면서 다가오는 죽음을 맞는다면, 슬프지만 나쁘지 않으리라. 그래도 스토너의 죽음이 슬펐던 것은 마치 옆에서 며칠간의 임종 과정을 다 지켜본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이리라. 어느 날 갑자기 접한 지인의 죽음이 아니라, 잦아드는 과정을 함께 한 시간들이 주는 그 세세한 아픔의 공유 때문에 충격적이지는 않으나 깊이깊이 슬플 수밖에 없는, 그런 죽음. 이 소설의 미덕은 잔잔해 보이면서도 정밀한 감성의 묘사와 전달에 있다. 문학을 만나는 감성, 잘 가르치고 싶은 열망과 희열, 죽음을 만나러 가는 과정의 고단함 등을 어찌나 치밀하게 묘사했는지 동종의 감수성과 정신영역에 사는 이들에게는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단, 모든 이가 이 즐거움을 공유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별만큼 많은 이들이 각기 다른 즐거움과 감성으로 서로 다른 영역들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사니까. 모든 이에게 문학이란 게 그토록 절실하고 아름답고 밀접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