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프랑스에 빚지고 있다.’고 어떤 진보 인사가 말했던 적 있다. 그 말에 공감하면서, 내가 프랑스에 가지고 있던 호감의 기원은 저것이겠구나, 싶었다. 정작 프랑스에 가 보면 이방인 관광객에게 무뚝뚝한 그들이나 생각보다 너저분한 길거리에서 무슨 짝사랑의 염으로 여길 오고 싶어 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열광했던 프랑스는 와인이나 샹송, 패션과 같은 피상적인 것들은 어차피 아니지 않았나. 혁명의 역사, 관용의 문화, 늘 대화하고 토론하는 모습 같은 것들이 부러웠던 것이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연인들이 처음 만날 때 사르트르가 어쩌니 저쩌니 철학 논쟁을 벌이는 걸 보고 웃은 적이 있다. 그 모습이 프랑스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왠지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비정상 회담>에서 새로운 프랑스 패널 오헬리엉은 자기 나라의 단점으로 사람들이 매사에 불평불만이 많다고 말했다. 그게 좋은 점이기만 하지는 않겠지만 가진 자들의 불의에 눈감는 대한민국보다는 나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선진국에서 이미 18, 19세기 즈음에 극복하고 확보했던 시민의 권리나 인권에 대한 성문(成文)적 명시를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인위적으로 얻지 않았는가 하는 것 말이다. 식민지와 전쟁과 군부독재를 거치며 민주주의의 역사를 제대로 겪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나마 근대적 헌법을 받아들여서 다행이다라는 생각과, 우리 손으로 쟁취하지 못해서 이리도 취약한가 하는 생각이 교차한다. 탄탄한 민주 헌법과 인권의식을 전세계에 제공하는 역할을 한 프랑스의 역사를 부러워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요약하면 <제르미날>19세기 프랑스 광부들의 파업 이야기다. 시커먼 탄광촌의 비참하고 더러운 광경에 싹트는 달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소설은 소설적 재미와 더불어 대서사적인 구성을 갖춘 대작이다. ‘문학이 무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무언가를 한 많은 사례를 들 수 있겠지만 특히 프랑스 민주주의에 에밀 졸라와 <제르미날>이 한 역할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감히 문학이 뭘 할 수 있냐?’ 는 질문을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1980년대의 문학작품들은 그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마치 프랑스의 19세기처럼, 문학이 곧 투쟁이었던, 아니 삶의 모든 영역이 투쟁 아닐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빛이 바랬지만 김지하가 젊은 대학생들의 피를 끓게 했고 조정래가 소설로 한국근현대사 공부의 불을 지폈다. 대학에서 역사와 사상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는 데 <태백산맥>보다 좋은 실마리가 없었다. 그 소설에 대한 열광과 근현대사에 대한 궁금증이 <민중과 지식인><해방전후사의 인식> 독서와 맞물려졌다. 그리고 그런 동력은(물론 광주에 뿌리를 대고 있긴 했지만) 87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문학은 분명 힘이 세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에밀 졸라와 빅토르 위고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 역시 그들의 혁명사와 맞물려 있으리라. 민중은 우왕좌왕하는데 지식인이나 문필가들은 간이나 보고 있는 형국이 아니었다는 것. 문학과 예술이 곧 혁명의 전선에 함께 했다는 것이 고스란히 그들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에 남아 있다는 것, 지금도 그리하여 어떤 어리석은 정치적 결정에 국민들의 불평불만과 토론 습관은 끊임없이 간여한다는 것. 민주주의는 어리석음을 안고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과정과 역사가 중요한 것이다. 제대로 된 혁명의 역사를 갖지 못한 우리가 프랑스를 부러워하는 것은 그들이 선진국이어서가 아니다. 다 자기들 손으로 (심지어는 시행착오조차) 일궈냈다는 점, 그래서 쉽게 뒤로 물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존중은 없고 동정만 있는 브루주아의 자선

<제르미날> 속의 브루주아들은 그저 사악하기만 하지 않다. 드뉠랭은 합리적인 사장이다. 그레그아르 가족은 온유하고 인격적으로까지 보인다. 가난한 자들에 대해 옹색하나마 연민과 선의도 갖고 있다. 물론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고, 때로는 극단적인 순간에 동정이라도 좋으니 구휼적 자선이 필요하리라. 그러나 그들이 베푼 선의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그것은 사실 본질을 파고들어가 보면 가진 자의 오만이고 자기만족일 뿐이다.

그레그아르 가족이 라 마외드 가족에게 베푼 것은 동정에 불과했다.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은 어린아이들에게 옷가지를 주는, 현실인식에서 멀리 떨어진 자선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선량함이 어떻게 폭력적일 수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결국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고혈로 풍요를 누리지만 겉으로는 폭력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중산층들도 자기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치 도축의 피를 손에 묻히지 않고 요리된 고기를 먹는 자들이 고상을 떨고 있는 형상이다.

 

반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광부 가족들의 미덕은 극단적인 경우에도 자존을 잃지 않는다는 것. 아이들을 끌고 구걸을 하러 가야 했던 라 마외드도 끝내 인간의 품격을 잃지는 않았다. 파업 과정에서 브루주아들이 제시한 타협점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존감 때문이다. 그래서 당당해 보인다.

 

광부들의 지도자격인 에티엔 등 혁명의 선두에 선 사람들의 양면성을 다룬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의도의 시작이 순수했더라도 과정의 변질은 언제나 혁명을 망쳐왔다. 자기들끼리의 불필요한 논쟁, 혁명의 순수성을 말하지만 사실은 명예욕에 휩싸인 인간들, 민중의 함성을 인기의 척도로 생각하고 연연해 하는 모습, 먼먼 중앙의 인정에 목매 언젠가는 노동이 아닌 언변으로 또 하나의 브루주아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 자기 안의 그런 욕망들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단지 혁명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인간성을 고찰하는 소설이 될 수 있었다. 인간은 나약하다. 문제는 언제나 고민하고 성찰하는가 아닌가이다. 성찰하지 않는 인간은 서서히 이기적으로 변하거나 심지어 악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에티엔은 나약함과 이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끊임없이 고민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그나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민중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도 흥미롭다. 민중은 절대선도 절대악도 아니다. 그래도 무너진 갱도의 동생을 구하려 사투를 벌이다 폭사한 쟈사리, 남편과 아이들을 잃고 다시 일터로 나아가는 강인한 라 미외드, 갱도에서 죽음 직전에 마지막 사랑을 나누는 카트린과 에티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평범하고 나약하지만 숭고하다. 오히려 삶에 기반한 욕망이기에 인간적이었고 평범했기 때문에 더 감동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카트린은 어리석었고 에티엔은 위선적이었지만 죽음 앞에서 함께 했던 두 사람은 처절할 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에티엔은 카트린이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깨울까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은 줄 알면서 그가 그녀를 처음으로 가져서 그녀에게 아이를 배게 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울컥 슬픔이 복받쳐올랐다.’

 

 

'지금까지 그 어떤 소설도 아직 모호하기만 했던 노동자들의 열망을 이처럼 심오하고 진실하게 표현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졸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존경과 사랑이 부럽다. 1902105일 몽마르트 묘지에서 거행된 졸라의 장례식에서 프랑스 북부 드냉에서 달려온 광부 대표단이 세 시간 넘게 졸라의 묘혈 앞을 돌면서 제르미날, 제르미날을 연호했다는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졸라가 1866~1867 전후 프랑스 탄광들의 크고 작은 파업들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그 진정성이 더했던 것이리라. 그는 실제로 675미터 아래 땅속 갱도까지 내려가 보았고 탄광촌을 직접 방문해 눈으로 직접 보고 기록하여 <앙쟁에 관한 노트>를 작성했으며 이걸 바탕으로 제르미날을 집필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현실의 힘이 되어준 위대한 문학과 문학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토록 문학적으로도 강력하고 현실에서도 투쟁적이었던 문필가가 누가 있었던가 돌아보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문학이 정치나 혁명과 손을 잡고도 당당할 수 있는 그런 나라에서 한 번쯤은 살아보고 싶다. 이 생에는 이미 불가한지도 모르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