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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ㅣ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들러 심리학>을 먼저 읽고 있었는데 그 책 광고에 ‘<미움받을 용기>의 원저’라고 써 있다. 참 우습지 않은가. 원전은 소외받고 그것의 ‘해설서’가 각광받는 이런 현상. 그렇다고 아들러 심리학이 너무나 학술적이어서 읽기 어려운 책도 아닌데 말이다. <아들러 심리학>은 나중에 학부모 연수나 학부모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해 보았으면 싶을 만큼 쉬우면서도 현실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좋은 책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아들러’를 일본에서는 뭐라고 해석했는지 궁금해졌다.
아들러는 ‘열등감’이라는 표현을 제일 먼저 쓴 심리학자라고 한다. 누구나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기 발전의 계기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지 열등감을 ‘열등 콤플렉스’로, 즉 병적 수준으로 놓아두지 말라고 한다. 또한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열등감이 많은 사람임을 이야기하는 장면도 재미있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거울처럼 깊이가 같다.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다.
우월성 추구나 열등감 모두 성장을 위한 자극이 된다.
열등감 자체는 나쁜 게 아니고 열등 콤플렉스가 병이다. 즉 ‘나는 키가 작아서...할 수 없어’ 등등처럼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가 문제라는 것이다.
말로 잘난 체를 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자랑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다.
반면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이 있다. ‘불행 자랑(너는 내 심정 어떤지 모를 걸)’을 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과 불행을 통해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의 관계를 ‘권력투쟁’으로 보는 관점도 재미있다. 자주 병을 호소하는 사람도, 문제아도, 자신이 우월적 위치에 서고자 일탈이나 병을 이용하는 것으로 본다. 교사들에게도 흔히 말썽꾸러기들을 보면 ‘아프다, 관심과 사랑을 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보라고 한다. 심리학이라는 게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고 남들이 보내는 마음의 신호를 감지하기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닌가. 이 책을 단순히 자기계발서로 여겨 ‘지금 여기서 행복하려고 노력해라.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수준으로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책을 기획한 이들의 의도는 바로 그런 목적으로 독자들이 이 책을 집어들기를 기대하긴 했을 것이다. 과연, 혼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의 병이나 불편감은 나 혼자 안에서 솟아난 것은 아니다. 관계를 주목하지 않고 혼자 행복할 수는 없다. 아들러도 결코 ‘뭐든지 네 마음에 달렸으니 지금 여기서 행복하려 노력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정치토론을 걸어오는 사람의 목적은 상대를 도발하고 비난하여 굴복시키고 싶은 것이고 비행청소년이 된다거나 해서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은 ‘상대가 권력투쟁을 걸어온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싸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고 한다.
분노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인데 화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보는 것은 용기를 잃은 이가 인생의 과제로부터 도피한 까닭이라고 한다. 이 말에 동의하는 것이, 대개 억울감과 피해의식이 많은 이들일수록 남을 비난하고 작은 일에 화를 내곤 하지 않는가.
궁극적으로 아들러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지금 여기의 행복’을 논해서가 아니다. 그는 인간관계의 목표를 공동체 감각을 키우는 것에서 찾는다. 그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부모 자식간 조차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과 용기 부여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만약 자녀를 키우는 입장이라면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아들러 심리학에서도 부모나 교사가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킬지에 대한 언급, 학교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 칭찬과 벌의 무용론 – 칭찬하지 말고 고맙다, 라고 말하라. 칭찬도, 야단도, 체벌도 금물.
칭찬의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고 상하관계에서나 하는 것이므로 하지 말라고 한다. 부모 역시 자녀를 칭찬하지 말고 ‘고맙다’라고 말하라고 한다.
자, 이제 학부모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이런 것을 얻어 가면 좋겠다.
부모는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라고 한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자신이 자녀의 생활, 특히 공부에 ‘개입’하지 않으면 ‘방임’하는 줄 안다. 하지만 공부에 관해서는, 자녀에게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에게 관심은 많으나 개입하지 않는다고 느끼면서 자율적으로 스스로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하긴 잔소리도 지나친 개입도 아닌 방임도 아닌 그런 경지는 참 쉽지 않다. 모든 부모들은 자신이 자녀에게 잘하고 있는 줄 안다. 그런 과도한 자신감과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불안감이 공존하는 모순된 심리 상태에서 자녀를 키우고 있다. 그러니 아이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학교에는 노이로제 상태에 놓인 불안한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부모와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다들 당당하게 그럴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고 자기 아이가 얼마나 게으른지 성토한다. 상담실의 눈으로 보면 노이로제 걸린 아이들보다 더 불안한 것은 바로 그 학부모들이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갈팡질팡하며 결국 내리는 결론은 ‘불안하니까 아이를 학원에 보내겠다’ 이 불쌍한 시대의 자화상 앞에 그야말로 아들러를 강림시키고 싶다.
끝으로, 이 책을 ‘내 마음의 평정을 위한 책’으로 이용하려한다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안해서 밖으로 못나오는 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불안한 감정을 지어내는 것(은둔자의 변명).
누군가에게 욕을 먹었을 때는 ‘상대가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거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
‘어렸을 아버지한테 맞아서 사이가 틀어졌다– 프로이트 식’,‘ 나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맞은 기억을 꺼내들었다 – 아들러 식’
말더듬는 걸로 고민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투’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자의식 과잉으로 더욱 말을 더듬게 된다. 자기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