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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 정재승 + 진중권 - 무한상상력을 위한 생각의 합체 ㅣ 크로스 1
정재승,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2월
평점 :
창의적이면서도 비판의식이 돋보이는 진중권과 간명하게 사회현상을 과학적으로 간명하게 연관 지어 설명할 줄 아는 정재승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논리적’이고 ‘명료’하면서도 맛깔스러운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중권도 글 중에 고백했다시피, 알고 있는 지식들을 종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이런 걸 김정운은 ‘에디톨로지’라고 표현했는데 오늘날 많은 ‘강사’들이 강의할 때 잘 써먹는 수법이기도 하다. 이들은 깊이 있는 학문적 성취에 이르지는 못하겠지만 공부가 부족하거나 주워들은 것은 있는데 그것들을 종합하고 구조화하는 능력이 부족한 일반인들이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생각해 보면 ‘선생’의 역할도 비슷하다. 정말 인류의 스승이 될 만큼 자기만의 철학과 방향성을 가지고 많은 이들을 이끄는 ‘스승’까지는 아니어도 학교나 학원에서 혹은 자기 동아리에서 어린 학생이나 후배를 가르치는 이들은 조금 먼저, 조금 더 많은 양의 공부를 한 후 그것들을 어떻게 후학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할까 고민하며 재구성한다. 우린 그것을 교수법이라고도 하고 강의안이라고도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진중권과 정재승은 좋은 선생들이다. 이들은 스타벅스, 스티브 잡스, 구글,마이너리티 리포트, 제프리쇼, 셀카, 쌍꺼플 수술, 안젤리나 졸리, 프라다, 생수, 몰카, 개콘, 유재석, 강호동, 세컨드 라이프, 레고, 위키피디아, 파울 클레, 박사... 등을 키워드로 해서 각각의 쟁점들을 인문학자와 물리학자의 시선으로 조명한다.
사실 정재승은 과학자이지만 인문학적 요소를 풍부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아 보이긴 하다. 우리에게 말빨 글빨 좋은 과학자가 많지 않다 보니 정재승이나 최재천 같은 이들이 참 귀하게 느껴진다. 하여간 두 필자가 조금 어슷비슷하게 느껴져 읽다가 이게 누구 글이더라, 하고 이름을 다시 들춰보곤 했다.
스타벅스에서 페미니즘 찾기
진중권의 페미니즘적 시각이 돋보이는 대목이 있다. 스타벅스 이야기를 하다 말고 소위 ‘된장녀’를 비난하는 남자들의 허위의식을 찌른다. 나야 스타벅스뿐 아니라 기타 등등의 비싼 커피를 잘 마시지 않지만(앉아서 커피 마실 시간이 많지 않을뿐더러 그 커피의 ‘맛’이 그 가격에 상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릿값이라 생각하면 좀 다르겠지만) 스타벅스의 다양한 문화적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할 때, 그것이 젊은(여성)이들의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역할(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파노플리 효과로써 상품을 통해 특정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것. 구별짓기의 수단으로써의 스타벅스를 이용한다는 것이다.)을 한다는 혐의에 대해 또 다른 면을 생각하게 해주는 미덕이 있다.
진중권 : 남성중 일부틑 700원짜리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면서 한 잔에 5000원 하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된장녀를 비난한다. 하지만 5000원짜리 밥 사 먹는 주제에 술집 가서는 수십만 원을 쓰는 된장남의 행태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커피 한 잔을 둘러싸고도 성 권력은 어김없이 끼어드는 모양이다.
말하기 능력과 공감 능력
국어교사로서 이 책을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다면 정재승이 유재석과 강호동을 비교해 놓은 이야기가 되겠다. 유재석과 강호동의 가장 탁월한 능력은 공감능력이라고 한다. 유재석은 아줌마 스타일의 여성적 말하기를 하고 강호동은 남성적 말하기를 한단다. 토론 수업할 때 이 글을 읽게 하고(웃음과 뇌과학적 측면을 근거로 말하면서) 멋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능력이며, 아름다운 말하기는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하는 말하기라는 것을 가르쳐주어야겠다. 유정아 아나운서도 대학생 토론 배틀에서 승리하는 팀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팀이 아니라 상대방 발언에 귀기울일 줄 아는 팀이었다고 말한다. 수업 중에는 ‘논리적 말하기/감성적 말하기, 맥락 중심 말하기/핵심 중심 말하기, 남성적 말하기/여성적 말하기, 객관적 말하기/ 주관적 말하기, 원칙적 말하기/ 개방적 말하기’로 활동지를 만들어 먼저 자신의 말하기 스타일을 점검하게 한 후 토론 수업을 할 요량이다.
정재승과 진중권을 ‘크로스’하여 보여주려는 기획은 재미있었지만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인 <썰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재승은 과학자로 정치적 입장을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진보적 입장에 배치되지 않는 의견을 제시한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안이나 쟁점에 접근하지 않는다. 입장 차이가 분명하거나 과학자로서, 인문학자로서의 차이점이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아쉬움이다.
<썰전>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세 명은 모두 ‘불호감의 아이콘’들이다. 그럼에도 인기가 있다는 점 또한 공통점이다. 자기 진영에서 팬층이 있을 뿐 아니라, 안티팬들조차 그들이 하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런 논객들이 바로 유시민, 전원책이다. 사회를 보는 김구라 역시 ‘욕하면서 보게 되는’ 캐릭터다. 캐릭터들 자체가 흡인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모두 ‘팩트에 근거한’ 자기 주장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프로그램은 쟁점은 쟁점대로 살고 출연자들의 박학다식을 즐길 수도 있으면서 토론의 현장이 갖고 있는 매력적 요소들(논리적일 것, 비판적일 것, 때로는 투쟁적일 것)도 느낄 수 있다. 내가 싫어하는 진영의 논객들이 나오면 티비도 라디오도 꺼버리는 사람들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입장이 다른 사람 이야기도 들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쟁점이 부딪칠 때 아슬아슬하게 긴장이 되다가도 패널들이 허당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유머감각을 발휘하거나, 정작 부딪치기 직전에 한 사람이 슬그머니 양보하는 모습들도 보여준다. 우리에게 부족한 ‘똘레랑스 토론’의 가능성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10월에 중2 남학생들과 토론 수업을 할 단원에서 정재승의 글과 비정상회담 110회의 군대문제를 주제 삼아 ‘군 징병제와 모병제’, ‘대체복무를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할까 아닐까’를 주제로 토론수업을 할 것이다. <썰전>의 한 장면도 보여줄 것이다. 우리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정말 많다. 국어 문법도 중요한데, 토론하는 법, 배려하여 말하는 법, 이런 것들을 꼭 가르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공부만 잘하고 싸가지는 없는 아이들, 배려할 줄 모르고 나의 성공만이 최고의 가치라 여기는 청년들,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높은 지위에서 전권을 휘두르며 적반하장의 언사로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권위주의자들’의 나라가 될 것이다. 지금 벌써 그렇지 않느냐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토론으로 이루는 민주주의’, 단 100년으로 쉽게 도달하려 했던 어설픈 근대화의 부작용을 걷어내려면 그런 교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