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왜 학교는 불행한가 :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대한민국 교육을 말하다 -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대한민국 교육을 말하다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교육 3부작 시리즈 1
전성은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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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고 전 교장인 전성은 선생이 쓴 교육에세이이다. 거창고가 어떤 학교인가. 이 땅의 공교육에 과감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대안교육이 가능함을 보여준 학교 아닌가. 게다가 성장과 경쟁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대한민국에서 올바름을 지향하는 의지의 학생들을 기르는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학교이기도 하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 교사가 훌륭하지 않고서 훌륭한 교육이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말이다. 물론 나는 후진 교사들을 딛고 훌륭한 학생이 자라날 수도 있다고 믿지만 그런 기적이나 반면교사의 힘을 믿고 학교를 방치할 수는 없을 터이다. 훌륭한 교사들이 너른 울타리로 학생들을 품을 때 학생들은 그 안에서 편안할 수도 있고 울타리를 뛰어넘어 날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전성은 선생 같은 교사들이 꼭 필요하다. 그의 일갈은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고 과거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런 한계를 뛰어넘어 지금 21세기에도 귀 기울여야 할 만큼 여전히 한국의 교육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아니 오히려 퇴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교 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에 대해 고민할 부분이 있다. 학교는 단지 지적인 학습의 전달 공간만이 아니다. 그 안에서 정신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역으로 일제강점기의 학교의 위상에 대한 고민에서 다시 고찰할 수 있다.

 

독립운동 당시 학교교육이 내걸었던 교육의 목적, 즉 인재 양성은 정의 자유, 공존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간을 길러낸다는 의미였지 통치계급이나 식민통치국가를 위한 인재를 길러낸다는 뜻이 아니었다.... 일제는 1926년 사립학교규제법을 만들어 학교설립기준에 미달하는 학교는 모두 폐교해 버렸다.

 

이런 고찰이 없이 기술적으로 교육만 잘하려 든다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일 뿐이다.

 

정직은 누구에게 정직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정직, 성실과 같은 덕목은 누구에게, 또 누구를 위하는가에 따라 악이 될 수도 있고 선이 될 수도 있다.

 

독일의 평화운동과 비정부 민간운동의 기수와 주요 세력이 바로 히틀러 유겐트 교육을 받은 세대였다는 것(악이 깊은 곳에 더 큰 신의 은총이 내린다).

 

위 대목에서는 영혼 없이 죄를 짓는 모범생, 엘리트 교육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된다. 국정농단의 뒷면에는 최고 엘리트들의 하수인 역할이 큰 몫을 차지했다. 그들이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친일을, 히틀러 치하에 살았다면 아이히만이나 괴벨스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즈음해 귀 기울일 부분이 있다. 이 책 속의 글이 최근에 쓰여 진 것이 아님에도 그의 혜안은 돋보인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학교 설립이 자유로운 신고제이지 허가제가 아니며 교과서는 당연히 국정이 아니다. 누구나 교과서를 쓸 수 있고, 그 책이 교과서로 채택되고 안 되고는 학교와 교사에게 달려 있으며 학부모의 동의도 얻어야 한다. 학부모가 최종 선택권을 갖는 셈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학교가 불평등을 조장해서는 안 됨을 말한다.

 

학교교육은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육은 그 어떤 상대도 악의 축이라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리영희 선생을 해고한 언론사와 대학, 감옥에 보낸 검사와 판사, 간디를 감옥에 보낸 영국인 판사들은 법에 의해서 그렇게 했다. 김대건 신부와 안중근 의사 같은 분들을 사형시킨 검사와 판사들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의 법에 의해서 그렇게 했다. 4.19 혁명 때 데모대에게 총을 쏜 경찰관들은 상사의 명령대로 했다. 그 상사는 법에 의해 발포 명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발포 명령을 내린 상사는 정의로운가.

 

우리가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도 남의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수상 글래드스턴이 수단 독립을 주장하여 선거에 떨어진 연설문(옥스퍼드 대학 정문에 붙어있음)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교육이 그저 일정한 중간 잣대만을 세워 기준에 맞는 인간을 기계적으로 양산하는 일이 아닌, 고차원적이고 심오한 작업임을 말하기도 하였다.

 

주지 말아야 할 도움을 주면 그건 살인이다.

 

경쟁은 불안을 불러오고 공격과 불안이 악순환 되는 사회를 낳는다.

 

현실을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상을 현실로 끌어내리면 발전할 수 없다.

 

구조가 평등하지 않으면 평등한 인간 교육이 나올 수 없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 대목을 만났다. 오로지 교사의 길 이외에 눈 돌리지 않았던 젊은 시절의 의지가 변질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그림이나 합창, 운동 등 취미를 가지는 것은 삶을 풍부하고 자유롭게 해준다. 그러나 취미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다른 사회활동이 교사직보다 우선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박정희 정권 당시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연루된 학생들 이야기와 광주항쟁 시기에 모든 언론조차 쉬쉬하던 항쟁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릴지 말지를 논의한 거창고 교무회의 장면은 감동적이다.

 

1969년 박정희 정권 때 거창고 학생들이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했을 때 교육청에서는 데모에 참가한 학생들을 퇴학시키라고 학교에 압박함. 학교는 학생들을 퇴학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림.

학생들이 규탄한 부정선거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검찰이 밝힐 일이다. 학교가 밝힐 일이 못 된다.

학생들이 차도로 행진한 행위는 도로교통법 위반에 해당한다. 도로교통법에 대한 처벌은 학교가 할 일이 아니다.

학생들이 수업을 빼먹은 데 대한 처벌은 학칙에 의해 출석부에 처리할 일이지 퇴학에 해당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국가의 법을 어겼으면 검찰과 검찰이 구속 기소하고 법원이 재판할 일이다. 학교는 교칙에 관해서만 학생을 처벌할 뿐이다.

 

광주항쟁 당시 전교직원을 모아놓고 원경선 이사장이 광주에서 보고 들은 진상을 상세히 보고한 후 교사들에게 학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 한사람씩 의견을 말하라고 함. 의견은 두 가지. 학생들에게는 때를 기다렸다가 기회를 봐서 알리자는 신중론과 언론의 거짓을 폭로하고 즉각 알려야 한다는 주장. 원경선 이사장의 결론은

 

즉각 진실을 학생들에게 알려라. 학교가 죽더라도 교육이 살아야 한다. 국가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할 때, 학교는 학생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 검은 것은 검다 하고 흰 것은 희다고 말하는 게 교육이다.”

 

 

전성은 선생의 교육철학은 철학은 없이 교육만 하려드는 일부 공교육 교사와, 경쟁과 성취를 위해 가치를 빼먹은 교육에 매진하는 사교육 관련자(사교육 종사자들도 교육적 고뇌와 갈등이 깊으며, 그 한계 내에서도 인간다운 교육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이 더 많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이지만)에게 제발 올바른 교육철학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간직하고 그러고 나서 학생을 만나라는 경종을 울린다.

 

아이는 부모를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위해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 태어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부모도, 사회도, 학교도 모두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가 학생을 사랑하는 일은 한 아이의 인격 성장을 온 세상의 이익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다... 그런데 한 아이를 가문의 영광을 위한 존재, 학교의 명예를 빛낼 존재, 국가가 써먹을 수 있는 존재로만 생각하고, 그런 아이만 신명나도록 교육한다면 교사와 학생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어떤 과목을 가르치든 아이들이 반역사적인 삶을 살도록 영향을 끼치는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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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천국, 쿠바를 가다 - 세계적 교육모범국 쿠바 현지 리포트
요시다 타로 지음, 위정훈 옮김 / 파피에(딱정벌레)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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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다로는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의료 천국 쿠바를 가다> 등을 쓴 쿠바 전문가이다. 우리 나라에서 쿠바에 관심있는 이치고 그의 책 한 권 읽지 않은 이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오래 전 <몰락..>을 읽고 언젠가 쿠바에 가리라 결심했고 지난 20161월에는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는 비행기 안에서 <교육 천국 쿠바를 가다>를 읽었다. 쿠바 여행은 책 속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가난하고 따뜻한 나라였다. 불편하지만 푸근한 여행이었다. 학교라고는 멀리서 들여다 보는 수준이었고 하교하는 학생들과 몇 마디 나누어 보거나 공터에서 뛰노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게 다였으니 책의 진실을 다 확인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쿠바의 그 유명한 무상교육의 힘을, 그 기운과 아우라를 느꼈다.

 

이 책 내용 자체가 흥미로워서 요점정리한 것을 그대로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다. 기회가 된다면 책 속 내용만 가지고 강독회라고 하고 싶다. 물론, 글자로만 읽은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반론에 부딪힐 것을 잘 알므로 나는 나의 경험과 생각을 설파하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요점정리만으로도 의미있다고 생각될 만큼 쿠바의 교육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만은 강조하고 싶다. 20161월에 간 쿠바 여행기를 써놓은 것 중에서 교육 관련된 부분을 먼저 옮겨본다.

 

 

풀꽃의 쿠바 여행기 11. 뜨리니닷 광장의 학교 수업

 

아름다운 열대의 하늘과 나무가 어우러진 뜨리니닷. 이들의 색채감각은 정말 탁월하다. 같은 채도의, 서로 다른 선명한 색채의 회벽들이 정말 아름답다. 색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조화롭다는 게 더 중요하다. 마요르 광장에 도달해 보니 동네 초등학생들이 무용 수업을 받고 있다. 학교에 운동장이 없고 대부분은 동네 공터나 주변 놀이터, 광장, 공공 체육시설에서 수업을 하는 것같이 보인다. 누군가의 말대로 쿠바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은 이들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다. 건강하고 밝고 깨끗하다. 어른들 중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이도 있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쿠바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은?

아바나에서는 오비스뽀 거리를 향해 걷던 중 작은 공터(그래 뵈어도 바닥에 경기장 선도 다 그려져 있었다.)에서 초등학생들이 피구 시합 하는 장면을 보았다. 일반 남학생과 선수 여학생들의 시합인 듯 보인다. 여학생들만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입은 운동복은 자기 몸매에 꼭 맞춘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 운동화도 새 것이다.

 

말레꼰 근처의 공원에서 방과후수업을 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는데, 모두 하얀 발레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어느 주말 아바나 프라도 거리 한쪽 공터에서 농구를 하는 고등학생들, 자전거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중학생들을 본 적도 있다.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가 꽤 좋아 보여서 좀 놀랬다.

뜨리니닷의 마지막 날 해질 무렵에 본 중학생들은 인라인 스케이팅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아도 장구를 제대로 갖춰서 제대로 수업을 받는 것으로 보였다. 작으나마 그 공터 하나를 오롯이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경제가 어려워도 아이들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중고등학생들은 모두 교복을 입고 있는데 여학생들 치마가 굉장히 짧다. 대체로 다리가 길고 상체가 짧아 짧은 치마가 자연스럽고 예쁘다. 설마 한국 아이들처럼 세탁소 가서 줄여 입은 것은 아니겠지? 여학생들은 대개 짙은 화장을 하고 귀걸이나 네일 아트 등으로 멋을 부리고 다닌다. 우리 나이로 중1이나 되었을까, 아직 초딩 티를 벗지 않은 어린 학생들도.

산타클라라에서 화요일이었던가, 점심시간 막 지날 무렵 중고등학생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았다. 오후 3시 정도 돼야 수업이 끝나고, 방과후수업 프로그램도 많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수업이 일찍 끝났나 싶다. 궁금해서 결국 말을 걸어 보았다. 영어로.

 

너네 중학생이니?”

~”

벌써 학교 끝난 거야?”

아니오.”

그치? 아직 안 끝난 거지? 그런데 어디 가?”

여기까지는 영어로 YES or NO 대화를 했는데 그 다음에 뭐라뭐라 스페인어로 한참 설명을 한다. 당연히 나는 못 알아들었다. 으흠~? 이런 표정으로 알홈다운미소를 지어보였을 뿐...

아이들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와 어디론가 몰려가는 걸 보니 아마도 체험활동이나 방과후수업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엄마나 아빠가 초등학생이나 유치원 아이들은 데리러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젊은 아빠가 분홍색 인형이 그려진 여자아이 유치원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모습이 우리나라와 어쩜 그리 비슷한가 싶어 손뼉을 치고 웃은 적도 있다.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오후면 엄마아빠와 어린 아이들이 마차택시나 트럭택시 같은 데 오밀조밀 붙어 앉아 집으로 향하는 게 우리와 다르다면 다른 풍경이다.

 

동네 공터에서 축구하던 여학생

제일 인상 깊었던 장면은 산타클라라의 변두리 마을을 돌아다닐 때 본 모습이다. 쿠바에는 아직도 우리가 자랄 때 동네마다 하나쯤 있던 공터같은 게 많이 있다. 산타클라라에도 외곽으로 나가 보니 자그마한 유기농 농장, 야채 시장 등이 있고 그 옆에 공터가 하나 있었다. 그때가 아마 오후 3시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나 보다. 학교를 마친 중학생들이 공터에 모여 있는데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어우러져 축구를 한다. 하교 시간이면 아이들 대부분이 학원이나 pc방에 들어가 있어 학교 운동장은 운동부 학생들이, 동네 공원은 담배나 피려고 모인 소위 일찐들이 차지하고 있을 뿐 보통의 아이들이 웃고 뛰노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진 우리나라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렸을 때 저런 비슷한 풍경 속에서 뛰어놀았던 것 같다. 아주 작은 아이들은 물웅덩이 근처에서 놀고, 공터 한 복판엔 가장 힘세고 숫자 많은 남자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또 다른 구석에는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아이들은 뛰어노는 대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수다를 풀었던가... 다양한 연령의 아이들이 모여 남자아이, 여자아이 넘나들며 서로를 살펴보며, 놀며, 눈치도 보며, 알아서 성장하던 복닥복닥하던 그 공간. 바람을 가르며 볼이 빨개지도록 놀다가 정신차려보면 어둑해지던, 바람의 느낌을 배우던 그 공간. 우리 아이들의 잃어버린 공간...

 

우리 집 아이들은 그런 공터는 못 가졌어도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기라도 했다. 피아노 말고는 사교육을 거의 안 받아 시간이 많았던 우리 아들, 딸은 피아노 학원을 마치면 저희들이 다니던 학교 운동장에 가서 바람을 가르며 뛰어놀았다. 그때만 해도 학교 운동장은 넓었고 흙도 많았다. 비가 오면 도랑이 생겨 거기 쭈그리고 앉아 물장난을 했다.

교장이 바뀔 때마다 운동장의 모양이 바뀌긴 했지만 한때는 야외수업을 하는 곡선형의 정원을 가꾸기도 했고 펜스를 모두 떼어낸 자리에 조팝나무와 찔레로 담장을 만들기도 하더니... 몇 년 전에는 운동장 지하에 공용 주차장을 짓고 그 어여쁘던 야생화 담장 자리에 스포츠센터를 지었다. 물론 그 위에 학생들 체육 수업을 할 체육관을 얹었다고 하지만 반 토막이 된 학교 운동장을 보면 숨이 막힌다.

 

앞이 탁 트여 지나가다가도 6학년 교실이 멀리서나마 보여 거기서 공부하고 있을 아이들을 상상하게 하던 학교 정문에는 스포츠 센터가 가로막고 서 있어 본의 아니게 러닝머신 타는 아저씨들을 봐야한다. 이제 다 커서 대학생이 된 아들딸은 초등학교를 지나다닐 때마다 아쉬워한다. 나는

그나마 벽돌을 빻고 풀을 잘라 소꿉을 놀던 아이들은 너희가 마지막인가 보다하면서 그렇게 커온 걸 다행으로 여기자고, 씁쓸함을 달랜다.

 

솔로의 시기어린 시선으로?

오며가며 교복 입은 학생들을 많이 만났는데, 묘하게도 남학생 한 명에 여학생 여러 명이 몰려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눌아(집에서 부르는 딸 이름 한누리이 줄임말이다), 쟤들 봐~”

손을 꼭 잡고 다니는 애들을 가리키니 남자친구가 없는 딸냄은

우쒸~, 쪼끄만 것들이... 다 깨져라~!” 하고 시기한다.

엄마, 쟤네 뭐지?”

해서 보니 잘생긴 남자고등학생 하나랑 여고생 둘이랑 재잘거리며 간다.

우째 여기 애들은 저런 남자 하나에 여자 여럿, 이런 조합들이 많냐? 친구들이겠지 뭐.”

아냐, 근데 이상해. 손은 저 여자애랑 잡았잖아? 근데 이어폰은 다른 애랑 같이 꽂고 가.”

연인끼리 이어폰 하나로 음악을 같이 듣는 우리식 풍경으로 따지면 그 남고생은 양다리? 유치원생들이 어디론가 줄맞춰갈 때 보니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이 남자아기랑 여자아기가 손을 잡고 가는 걸 보면 남녀 비율이 안 맞는 것도 아닐 텐데 남학생 하나에 여학생 여럿이 몰려다니는 건 뭘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이들과는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었건만, 그러려면 스페인어를 엄청 잘해야겠지? 미국이나 캐나다를 가더라도 그곳 학생들과 영어로 자유롭게 대화도 못 나눌 텐데 스페인어라니! 십년도 넘게 공부한 영어도 영 꽝인데 스페인어로 뭔 대화를! 그런 아쉬움에 하염없이 애틋하게 바라보다 눈이 마주친 쿠바의 아이들은 모두 내게 예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조는 아이 없이, 떠드는 학생 없이

한 번은 아바나 시내를 걷다가 학교 옆을 지나게 되었다. 이곳 학교들은 우리처럼 커다란 운동장을 품고 있는 큰 건물들이 아니다. 혁명 시기에 쿠바를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간 부자들의 건물을 접수한 정부가 가장 좋은 건물들을 주로 학교로 사용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운동장 없이 시내 한복판 길거리에 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도로변 바로 옆에 교실이 보인다. 좀 좁은 듯한 교실에 20여명 정도의 중학생들이 앉아 있다. 앞에는 젊은 여선생님이 온몸을 사용하여 열정적으로 뭔가를 설명한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가 학교라는 생각을 채 하지 못했다. 여기 왜 학생들이 앉아있는 걸까, 여긴 뭐하는 델까? 이러면서 창문 안을 들여다보았다가 나중에서야 거기가 학교임을 깨달았다. 자기들을 빤히 들여다보는 이국의 아줌마와 눈이 마주친 창가의 학생들 두엇이 눈을 돌려 우리와 눈인사를 나누었을 뿐, 떠드는 아이도, 자는 아이도 없이 학생들은 모두 앞에 서 있는 선생님에게 집중하고 있다.

 

<교육 천국, 쿠바를 가다>를 보면 쿠바 학생들이 수업 참여도가 매우 높다고 한다. 공부를 즐기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엄격한 학교 규율이나 낙제제도 때문일 수도 있고 즐겁게 학습할 수 있는 프로그램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배움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화가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공부의 의미, 즉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좋은 사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호세 마르티가 독립운동을 할 때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킬 때도 지도자들은 민중에게 배우지 않으면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호세 마르티는 교육으로 자유를강조했고 피델 역시 혁명 직후 국방비를 아껴 교육 예산에 쏟아부었다. 말하자면 온 국가와 역사가 나서서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야 할 명분을 설득하는 셈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에 맞는 것임을 미리 각인시키는 것인데,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공부하는 학생들의 결기를 따라잡기는 어려운 법이다.

 

물론 여기에도 고민해야 할 지점이 있다. 쿠바의 교육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본질적으로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쿠바에서는 학생이 지각을 하거나 무단결석을 하면 학교와 지역이 결합하여 그의 행방과 가정에서의 관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설득을 한다니, 이것을 두고 관리가 잘 되고 있다 할지(우리나라처럼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고 부모에게 학대를 받아도 모르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이게 지나쳐서 국가와 공동체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아야 할지, 헷갈린다.

지각을 하면 학생 자치회 같은 데서 잘못된 부분을 스스로 반성하게 만든다 하는데, 표현이 좋아 학생들끼리 스스로 규율을 잡아가는 것이지, 그에 따른 부작용은 없는지도 궁금하다.

 

쿠바는 전반적으로 엄격한 규율이 사회 전반을 지배한다. 물론 그럼에도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열정이 넘치는 면, 규율이 엄격하다면서도 횡행하는 사회 곳곳에 부정부패가 존재하는 점, 국민들이 국가나 경찰을 그다지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분위기는 또 모순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규율과 자유, 엄격함과 다정함 사이에서

교복을 입히는 이유가 학생들이 빈부격차를 느끼게 하지 않으려고란다. 우리나라에서도 교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빈부격차를 드러내지 않고 학업에 열중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지만 적어도 교복이 규율의 상징이지 자유의 상징이 아님은 분명하지 않은가.

, 학생 자치회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학생이 스스로 자치적 힘을 가져야 하고 그걸 학교가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학교 안의 자치 조직은 어느 만큼까지 학생들 스스로 안에서 영향을 지닐 수 있을까, 또 어떤 모습이어야 같은 학생들끼리 권위를 느끼지 않으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간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학교에는 자치라는 것 자체가 별로 없으니 비교가 어렵긴 하지만 학생자치의 한계가 잘못 규정되거나 그 목적이 잘못 설정되면 과거 우리가 가졌던 학생회, 학도호국단, 애향단, 선도부 같은 형태를 학생자치라고 호도했던 기억처럼 본질이 훼손될 수도 있다.

학생을 지도하는 방식에도, 학교가 어차피 조직인 바에는 개인의 원하는 바와 공동체의 가치가 부딪칠 때 설득과 공감의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에게 꼭 친절해야 하는 겁니까? 그런 다정함은 다른 교사에게 피해를 주고 자칫하면 학생들을 방치하는 것이 될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교사들 대상으로 상담연수를 하면서 아이들 마음에 숨겨진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듣기 싫어하는 선생들이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봐줘야 하느냐, 혹은 들어주라고만 하면 언제 가르치라는 말이냐, 항변하는 이들도 있다.

반면 학교 밖을 나오면 학생의 인권을 존중해주기를 요청하는 이들을 많이 만난다. 학부모 입장에서 아이들 개개인이 존중받지 못하는 학교를 원망하는 이도 있고, 교육운동을 하는 이들은 권위주의적인 학교 문화를 탓한다. 그런 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최소한의 엄격함이나 약속 지키기조차 없으면 학교에서 오히려 가장 약한 아이들이 피해를 입음을 강변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고민은 아마 학교를 퇴직하는 날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무엇이 옳음이고 무엇이 균형인가를. 누군가의 말처럼 학교가 죽어야 교육이 산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아예 학교 자체가 자본의 계산에서 만들어진 구조물이라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학교라는 틀거리를 유지한다면, 그렇다면 어떤 학교를 만들어야 하며 어떻게 학교라는 공동체 조직은 유지하면서도 즐겁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교육이 가능할까라는 고민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아래는 <교육 천국 쿠바를 가다>에서 요점정리한 부분이다. 주옥같은 구절이 많음에도 추리고 추렸음을 밝히는 바이다.

 

숙제는 아주 많지만 학교는 재미있고, 모르는 부분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른 과제를 내준다고 아이들은 대답했다.” - 다구치 마사토시가 전하는 말.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학교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면 일정한 규모가 필요하므로 폐교나 통폐합을 진행(학생 성적과 투자 예산을 상관관계 하에 두고...미국의 경우도 그러함) 하지만 쿠바는 전국 169개 무니시피오(지자체) 가운데 47개는 산촌에 있고 그 안에 많은 학교들이 있으며 과소화가 진행되지 않도록 농촌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특별계획을 가지고 있고 소규모 학교를 더욱 충실히 유지하도록 결정함.

 

칠레는 쿠바와 달리 자유국가이므로 부모가 학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저소득층 가정에서는 이런 자유로운 권리가 사실상 무의미하다. 선택은 자유일지라도 사회경제적 자위에 따라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거의 정해져버리는 것. 저소득층 자녀가 다니는 학교일수록 수업의 질이 낮다.

 

미국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너무 가까우면 이상한 사람으로 비친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고소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예의범절 문제도 부모나 지역사회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므로 교사는 퇴학이라는 해결책을 곧바로 사용. 하지만 쿠바에서는 청소년 범죄에 대해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체크해서 부모나 심리학자와 함께 대응책을 결정. 범죄 위험이 있는 청소년은 미성년자대책위원회’(지역 각 조직위원회 학생대표, 내무부 책임자, 노조, 여성연맹, 당원 등등)에서 지역이 총동원되어 함께 지원한다.

 

학력저하를 최소화하는 교정 캠페인 : 지나친 과학적 사회주의 수용을 비판(규율이나 복장의 표준화,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수업 암기 일변도의 학습, 형식적인 지식 주입 등을 수정하려 노력함), 지나친 중앙 전담 집중관리에서 학교, 교장, 교사의 자주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수정, 지역과의 연관성 강화한다.

 

쿠바는 경제 붕괴로 에너지 40%로 살아가야 하고 소련 해체로 무역거래 85%를 잃어버린 나라에서 단 한군데의 학교도 문 닫지 않은 나라.

 

공원 한 켠에 15명 정도의 어머니와 아이들이 모여 6살짜리 가정교육 중 (커뮤니티 자원봉사) 어머니들에게 질문하고 가정교육 방법을 교육함.

 

설탕노동자 교육에 대해.

사탕수수 수출이 막히게 되어 전국가적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지자 연 횟수 8000회 가까이 94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회의를 열어 공장폐쇄와 구조조정에 대해 회의를 거침.

 

이에 대해 카스트로는 이렇게 연설함.

각 공장은 대학이 될 것이다. 중학교와 직업훈련학교가 있는 모든 마을이 대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통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이든 일반교양이든 전인적인 교육이든, 전문적 기술지식뿐만 아니라 고학, 예술, 인문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교양이 높은 국가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200210월 아바나 아르테미사에서 열린 집회에서 1만여 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을 앞에 두고 한 연설).

 

쿠바의 국민적 영웅인 호세 마르티는 교육받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도 쿠바 교육 정신을 관통하는 정신이다.

 

학교위원회 학부모와 피오네로가 밀접하게 연계하여 숙제, 각종 규율, 등교거부 등에 대해 협의. 지각 등도 엄격하게 상급학생이 관리함(존 듀이의 아이들중심교육에 대해 가리야 다케히코 교수는 존듀이가 유복한 가정 출신의 학습의욕이 높은 아이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발적으로 배우려 들지 않는 아이는 내평개쳐 버린다고 염려. 쿠바의 예의범절이 엄격한 것은 아이는 어른보다 무조건 착하다라는 미국의 낭만주의와 정반대 교육관이다).

 

레닌고교 같은 각 학교 교내에 오르가노포니코’(유기농장)에서 학생들이 농사를 짓게 함.

아바나 농업대학의 경우 중학생때부터 취미동아리(시르쿨레 데 인데레사)에서 농업을 배워온 학생을 선택함. 쿠바에서는 농업을 좋아하는 학생이 전문학교에 입학하고 더욱 심도 깊게 공부하고 싶은 학생이 대학에 진학한다. (

 

전국 식자교육 캠페인

1960년 카스트로는 유엔총회에서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인류의 유산을 강탈당하고 있다.”라고 말함.

전국적인 식자교육운동을 벌임. 19614, 바라데로에 천명의 학생 자원봉사자 1진이 찾아와 1일주일간 철저히 훈련을 받고 농민들에게 글자를 가르침(두 권의 책, 지도서와 학습서, 그리고 한 켤레의 신발, 두 켤레의 양말, 올리브 그린 색 베레모, 두 벌의 셔츠와 바지, 견장과 모포를 짊어지고 학생들은 두메산골로 흩어져 낮에는 농민들과 더불어 일하고 밤에는 랜턴 불빛 아래서 글자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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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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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존경할 만한 어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젊은 시절에는 그런 선배들이 없다고 생각했다. 학교 현장에서 그런 선배를 만나지 못했다. 물론 좋아할 만한 선배교사들은 더러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그런 선배가 되어야 할 나이가 되고 있는데, 나 역시 존경할 만한 선배로 불릴 자신이 없다.

 

리영희, 문익환, 신영복 같은 분들은 너무나 머나 먼 곳에서 우러러 보아야 할 분들 같았다. 그런데 황현산을 읽으면서, 마치 아주 가까이에 존경할 만한 선배가 있었구나 싶은 안도감을 느낀다. 황현산이 위대한 석학이 아니라서 우러러보이진 않고 그저 안도하는 것이냐고? 그런 건 아니다. 아마도 내가 문 공부하고 황현산을 같은 문학도라 생각해 선배라 여기는 건지는 건지도 모른다. 헤아려 보니 그분은 내 부모님 연배 정도 되는데, 주변에서 본 그 연배 어르신들은 교양이나 지적 수준, 개개인의 인격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보수적이다.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 우기기만 한다. 폭넓은 사고를 하기보다 내 자식, 나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옹호하고 편법과 부도덕에 대해 관용적이다. 전형적인 한국식 자본주의 사고방식에 윤리적 일관성 따위가 없다. 그러나 황현산 선생은 다르다. 선생 같은 어른이 곁에 있었다면 조곤조곤 세상을 달리 보아야 함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실 것 같다. 신문에 난 그 분의 칼럼을 꼭 챙겨 읽으며, 읽을 때마다 그 젊은 감각에 놀란다. 이 책도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 전에 쓴 글들로 채워져 있는데도 전혀 뒤처진 느낌이 없다.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진응연 시인 <용산 메랄콜리아>를 인용하면서)

...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2009)

 

그러면서 그의 글은 문학도다운 감성이 촉촉하다 나도 그의 물총새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다시 두근거림을 느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저마다 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옳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싱가포르처럼 법적 제재가 많아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는 사회, 일본처럼 공동체 문화가 사람들의 삶을 규제하는 사회, 프랑스처럼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규범이 사람들의 행동을 규약 하는 사회 중 무엇이 이상적일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느 사회나 제멋대로 행동하고 싶은 사람들과, 그들만큼 무지막지하고 잔인하게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그냥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은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그들을 제약하지 않고도 약자들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있을까? 인간 본성이 그런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불완전하나마 지금까지 인류가 구축해 놓은 민주주의니 법치주의니 하는 것들이 기특하기도 하다. 정치나 법으로가 아니어도 그것이 가능한 세상을 꿈꿀 때,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말하기도 하고 종교적 경지를 논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그것은 내 마음의 문제라 여기라고도 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절대로 불가능할지라도 조금이나마 그 이상에 닿는 어떤 사회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애쓰는 현실 자체가 가장 행복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역설일지라도. 독재와 맞서고 부조리와 맞서고 자본에 맞서는 일, 온갖 부당한 일들로 가슴 아파하는 일, 이 모두가 너무 괴로워 다시는 모태에 들고 싶지 않으나 주어진 이 생에서만큼은 크든 작든 뭐라도 하려고 애쓰는 일, 죽는 날까지 자포자기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는 일, 그런 삶의 과정이 그나마 가장 가치 있는 삶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 인사동에 나가봐야겠다. 책을 써야겠다. 집회에 나가야겠다. 그림을 그리고 조그마한 시골집을 알아봐야겠다. 어린 남자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야겠다.

 

그의 반민주에 대한 판단은 엄격하다.

그러나 현실의 조건이 이러저러하니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까지만 실현하자는 식으로 선을 긋는 것은 현실의 압제를 인정하자는 것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다.....

 

자유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말이 이 땅에서 자유를 억압한 적은 없지만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은 민주주의도 자유도 억압했다(자유민주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학교폭력에 대해 쓴 부분이 있어 솔깃했다. 중고등학교 현장을 경험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학자나 대학 강단에 있는 이들이 흔히 그러듯 지나치게 포괄적인 이야기만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다음과 같은 글은 오히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할 때 읽어 주고 싶기까지 했다. 나 역시 학교폭력에 대한 토론수업이나 훈화를 할 때 폭력에 대한 폭넓은 사고를 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사람은 또 다른 각도에서도 누군가에게 혐오를 보인다. 어디서는 점잖고 특정인에게만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사람은 없다. 우리 아이가 집에서는 참 착한데 학교에서 친구를 때렸네요, 라는 학부모 말은 틀린 것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관심을 폭력 일반에 대한 관심으로 넓혀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많은 폭력 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1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료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그의 문학관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책에는 베껴두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이 참 많았다. 자신이 문학의 길을 가게 했던, 어린 시절 섬마을의 풍취를 묘사한 글은 고등학교 시절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고 또 읽었던 감성을 떠오르게 할 정도다. 그는 시인을 자신에게 특별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 곧 시를 쓸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이 있다고 믿었기에 불행해진 사람들은 우리 시대에도 많다. 라고 설명하면서 시마 詩魔 라는 말을 썼다. 우리 학교에도 동료교사 중에 시인이 한 분 있는데 정말 시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그토록 멋지고 아프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에서 우리는 왜 헤어나오지 못하겠는가. 그를 보면서도 느끼고, 나 역시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의 시적 감수성을 토대로 공감하는 바이다.

 

그의 문학론은 이렇게 이어진다. 문학이 예술이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해준 황현산 님께 사랑과 존경을 전한다.

 

어떤 며느리가 아궁이에 불을 피울 때마다 시어머니를 풍자하는 노래를 불렀다. 누군가 이것을 시어머니에게 고자질하자 시어머니가 나도 그 노래 들었다. 노래로는 무슨 소린들 못하겠으며, 노래가 그렇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냐.”... 이것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다.

 

 

여름날 왕성한 힘을 자랑하는 호박순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자랄 것이며, 폭죽처럼 타오르는 꽃이라 한들 감시하는 시선 앞에서 무슨 흥이 나겠는가.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 댁 뒤란에서 보았던 뱀, 미술숙제를 다 끝내지 못하고 자던 밤 어둠 속에 떨어지던 싸락눈 소리, 어느 골목에서 맡았던 음식 냄새, 제사상을 밝히던 은밀한 촛불과 얼룩진 병풍, 쥐구멍에서 꺼낸 반쪽짜리 곶감, 나는 이런 것들을 애써 외워둔 적이 없지만 그 기억들은 내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잇다가 어떤 계기를 얻어 마치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처럼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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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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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읽은 지 오래 되었다. 책 한 권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거니와 한꺼번에 여서일곱 권의 책을 읽는 습관이 있고, 다 읽은 책을 정리하는 데 읽는 만큼의 시간이 들다 보니 이제야 서평을 쓴다. <윤리21>과 어슷비슷한 시기에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엄기호의 <단속사회>를 같이 읽었던 것 같다. 근대 이후의 시대를 조망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책들, 그리고 개인화로 인해 오히려 몰개인화 되어가는 근대(현대)인들의 이야기며 공동체가 붕괴되는 현상에 대한 입장들이 묘하게 겹친다. 시대별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통찰력 있는 인문사회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들일 수도 있겠다.

 

칸트는 도덕성이 공동체의 규범에서 유래한다는 생각과 공리주의를 둘 다 비판했다.

만약 사람이 공동체의 규범에 따른다면 그것은 타율적이지 자유는 아니다. 정말로 자유로운 행위나 자유로운 주체가 있을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없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동시에 타자도 자유로운 주체로 취급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근대를 철학적으로 살피지만 한국과 비교해 읽는 재미가 있다. 식민주의에 의해, 그리고 근대화를 표방한 개발독재에 의해 강제로 무너져버린 농촌공동체에 대한 아쉬움이 21세기의 새로운 대안으로 모색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공동체를 비판하는 일본 철학자의 시각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일본은 공동체 문화가 아직도 지배적인 듯 보인다. 그것이 오히려 탈근대화를 막았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보면 일본이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자본이 인성을 극악하게 부패시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단단한 공동체적 결속이라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오히려 일본 내부의 진보적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걸림돌로 보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사회를 도쿠가와 시대에 일그러진 형태로 형성되고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해체되지 않은 마을공동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긴밀하고 친화력 있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은 없고 공동체만 있는, 그런 형태로 말이다. 식민통치와 전쟁, 분단으로 오히려 기존 공동체의 붕괴를 맛보아야 했던 우리와는 다른 경험이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중세의 공동체와 비슷한 듯 보인다. 중세가 지나서야 개성이라는 게 생겼다고 본다. 물론 에리히 프롬은 그런 개인화의 갈 방향이 자본주의밖에 없었던 현실이 문제라고 지적하지만 어쨌든 타자화가 시작되면서 근대화가 시작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일본과 같은 동양도, 에리히 프롬의 서양도, 몰개성의 시대를 넘어 진정한 개성화의 시대는 맞이하지 못한 셈이 된다.

 

(근대화 이전의 일본)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적인데 자기(자아, 에고)’는 없다. 분열증적 인간(깊은 관계를 거부하는)... 자신들의 소작료만 지나치지 않으면, 자기 땅만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알 바 아니다. 다만 사회를 두려워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행동할 따름.

(현대사회) 대개의 사람들은 단지 악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기독교 공동체에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도가 되는 것뿐.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이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잇는가가 아니라는 것(예 주식투자자의 경우,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일지라도 어디선가 전쟁이 나서 자기 주식이 오르면 좋아할 수 있다.). 즉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그가 무엇을 하는가와는 다른 것.

 

고진의 세계시민, 공공성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항상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반해 자신의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때로 현저하게 제한되어도 좋다. .. 통상적으로 공적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것인데도 칸트는 그것을 사적인 것이라고 하며, 역으로 거기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공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개인을 세계시민(코스코폴리탄)이라고 불렀다.

천재적인 예술가는 이 공통감각에 반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고립되지만, 결국에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이번에는 그것이 공통감각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토마스 쿤도 과학적 명제의 진리성을 만드는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패러다임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칸트의 공통감각과 매우 비슷하다. 아렌트나 하버마스가 공공적 합의라 부르는 것은 사실 공통감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의 합의이다. 하버마스는 코소보에 대한 공습을 공공적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로 지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유럽 국가끼리의 합의였다. 아렌트와 하버마스에 의거하면 공공성 = 국가인 듯.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세계시민을 말하면서 “‘좋은 사원, 좋은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도덕이다. 그러나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도덕성을 거스르는 것으로, 세계시민으로 행동하면 대부분의 경우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고 말한다. 소시민과 의식 있는 세계시민 사이의 갈등을 말하는 듯하다.

칸트는 종교적인 주장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형이상학이라면 논박했다. 윤리적인 한에서 종교를 인정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저 세상에서 구원받는 식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에 다르기 위해서 그러한 신앙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고진의 윤리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을, ‘도덕은 사회나 공동체의 도덕을 말하는 것이로 해석한다.

 

윤리에 대하여

예컨대 어떤 사람이 평생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면 돈이 있어서 그러한 입장에 놓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악을 면한 부자나 지배계급이 구원된다면 악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구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도 마찬가지. 부처나 예수도 저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가 중요했다.

 

이 대목은 고진이 현실에서 어떤 윤리로 살아갈 것인지를 설파했을 뿐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제 고진과 같은 주장들은 많은 진보적 종교학자들 혹은 사회학자에 의해 반복 주장 되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 기독교에서는 편협한 종교적 시각이 지배적인 것을 생각하면 그들을 붙들고 위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 우리가 더 크게 짓는 죄는 무엇인가, 도덕이 아닌 윤리의 영역에서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오십 보와 백 보의 차이

이 책에서 오십보와 백보의 차이라는 부분에서 매우 공감하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세상을 바꾸는 여러 가지 행동에서 오십보나 백보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망을 갈 때 가더라도 오십 보를 갔는지 백 보를 갔는지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예 도망을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좋지만 현실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 악인에게 조용히 부역을 한 사람과 소심하나마 무언가를 한 사람, 부정의한 세상에 맞서 하다못해 불복종이라도 한 사람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거부하지 못하는 많은 소시민 가운데, 망설이고 스스로 반성하던 사람들 속에 저항의 싹은 죽지 않고 숨어 있다. 가끔 꽤나 진보적인 사람들 가운데 그런 소심하고 나약한, 숨은 생활진보인들을 부역하고 침묵한 이들과 싸잡아 오십보나 백보나라고 비판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이고 고진이 말하는 담론은 보다 크고, 전복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내가,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죄에 대해 사회구조를 탓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현상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가의 문제다.

 

우리가 실제로는 죄를 범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는 범하고 있다는 사실(내가 쓰는 전기, 내가 방관하고 있는 것, 내가 누리는 커피와 여행, 내가 향유하거나 눈감는 정치...).... 예컨대 나는 소를 죽이지 않지만 비프 스테이크를 먹는다. 나는 군사적, 경제적 제국주의에는 반대하지만 그것에 의해 얻어진 생활수준은 향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면 자기가 손수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차이를 배제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논리이다... ‘자유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역시 개개인이 관계들의 산물이면서도 그것을 초월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개개인의 자본가와 경영자가 도덕적으로는 선하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자본의 담당자인 한 강제되고 마는 관계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단지 악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기독교 공동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도과 되는 것 뿐.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이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괄호넣기, 배제에 대하여

나는 이 책을 한창 읽던 중에 한 동료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00샘이라는 젊은 교사는 매우 유능하고 학생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이인데 최근 들어 이런 발언을 자주 한다. “아침에 지각하는 학생이 있다. 많은 교사들이 지각하는 학생들 벌을 주거나 야단을 친다. 그러면서 약간 늦은 학생에 대해 출석부에 지각 체크를 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벌을 줄 필요는 없다. 출석부에는 단호하게 체크를 해야 한다(물론 아이와 지각하게 된 사정에 대한 진심어린 상담은 꼭 필요하다).... 학생이 싸워 학부모 간 갈등이 생길 때 교사가 할 일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조사하고 학부모중재위원회를 잘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지 사이에서 두 아이의 사정을 전하고 감정에 호소하고 설득하고... 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등등.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그이지만 과연 교사가 그러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문제는 그와 같은 교사의 태도에 대해 공감하는 젊은 교사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것일까? 학생들의 속사정에 깊이 들어가 때로는 (학생의 사정을 이해해 출석부 지각 체크를 하지 않는 따위의) 탈법도 불사(?)하는 교사와 합리적이고 정확하게 학사와 학생을 대하는 교사 중 무엇이 교사의 지향점이어야 할까. 어느 새 나도 나이든 교사가 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이란 책을 정리하다가 재미난 구절을 발견했어요.

'괄호에 넣는다'는 표현.

도덕적, 지적 관심을 배제하는 것

예를 들면 의사들이 자기 가족을 수술하지 않는 것 같은 현상이랍니다.

 

더불어 이에 대해 고진은 이런 말도 하네요.

"언제나 무엇이든 사물을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만큼 비과학적인 일도 없다."

괄호를 벗겨야 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요.

 

00샘은 참 독특하게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요.

혹시 내가 받아들이기를, 고진이 말한 '괄호에 넣는'것과 황샘이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같은 것일까요?

잘못 받아들인 것일까요?

 

독특한 문제제기인데 받아들일 수는 없고(사실은 반박하고 싶은 것이오.),

그러나 아직 생각은 진행 중이고,

00샘은 좋은 교사라고 늘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꽤 좋은 교사라 믿었던 만큼 위와 같은 생각이 무겁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논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논쟁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므로 이야기를 던져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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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 문학의 비밀을 푸는 20개의 놀라운 열쇠, 개정증보판
정여울 지음 / 메멘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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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이 책은 짐작컨대 정여울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문학을 가르칠 때 사용한 강의록을 풀어쓴 것 같다. 문학을 접근하는 키워드를 이렇게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한편으로는 중고등학교의 문학(국어) 수업도 이렇게 주제별로 접근하면 좋겠다는 부러움도 있다. 중고등학교는 공통교육과정으로 설정된 교육과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텍스트를 제시해야 하다 보니 주제 선정에 교사가 개입할 여지가 적다. 텍스트에 대해서는 제7차 교육과정이 비교적 자유롭게,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하라고 권장하지만 공교육 현장에서 그럴 배포를 지닌 교사는 많지 않다고 봐야 한다. 대개는 교과서를 벗어나지 못한다.

 

정여울이 예로 든 문학작품들은 사실 매우 보편적으로 읽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요즘 대학생들(국문과 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만약 교양과목으로 문학을 듣는 학생들이라면)이 이 작품들을 다들 읽고 수업에 들어올까 싶다. 하긴 이와 같은 현상은 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작품을 온전히 읽을 시간은 없고 작품에 대한 해설만을 배우는 현실이다. 그래서 어떤 국어교사는 일부러 설명 없이 2,3시간 동안 작품만 읽히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우상의 눈물>, <마지막 거인>, <행복한 청소부>같은 작품, 혹은 일부이기는 하지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읽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기도 한다. 1시간 동안 여러 작품의 해석을 듣는 것보다 2시간 동안 한 작품을 오롯이, 스스로 읽는 것이 더 소중할 때가 많다.

 

정여울이 제시한 키워드들은 나의 학생들과 문학 공부할 때도 염두에 둘 만하다. 금기, 슬픔, 정체성, 죽음, 사물과의 교감, 패러디, 시점, 의인화, 은유와 환유, 상징, 아이러니, 알레고리, 트릭스터, 악인, 기억상실증, 공간, 날씨, 음식, 환상, 트라우마, 통과의례, 자기 정체성, 재앙, 러브스토리 등등이 그것이다. 이 중 중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시점, 비유와 상징, 시공간적 배경 정도를 가르친다. 최근에는 패러디 시 혹은 소설 쓰기 수업도 가끔 등장하기도 한다. 나는 해마다 자기 정체성을 주제로 시 쓰기’, ‘내 상처 수필 쓰기를 하고 있는데 이는 문학수업으로써보다는 문학을 자기성찰의 도구로 쓴다는 의미에 방점을 찍은 수업이다. 앞으로 슬픔, 정체성, 죽음, 사물과의 교감, 트릭스터, 악인, 기억상실과 같은 소재들을 문학수업에 활용할 만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여울의 관점에서 신선하게 받아들인 점들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A.I.> 는 피노키오의 강도 높은 패러디라고 했는데 영화를 본 입장에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때 읽어서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위대한 개츠비>는 주인공이 아닌 이웃 닉의 시점으로 신비롭고 난해하게 묘사했다고 하는데, 보통 교과서에서 소설의 시점을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이렇게 네 가지로 가르칠 때 학생들이 많이 하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예시자료가 될 것 같다. 학생들은 2인칭 시점은 없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 그럴 때 나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예로 들곤 했다. 사실상 다자 시점이고 로 바꿨을 뿐이긴 하지만 어쨌든 서술자를 로 부름으로써 ‘2인칭 주인공 시점을 취하고 있는 드문 소설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일종의 관찰자 시점으로써 흔치 않은 사례가 될 것 같다.

 

다음은 정여울이 제시한 은유법 문장들인데 이것 역시 수업에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적 표현에서 은유를 찾아보면 시험에 많이 나오는 표현법으로써의 비유나 별로 즐겨 읽지 않는 시에서 나오는 비유로써의 따분함을 벗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모둠 친구들과 다음 문장에서 은유적인 부분을 찾고 원관념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자’, 이런 활동을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배가 시야로 들어오고 있다(공간으로 비유)

그는 어떻게 그 일에서 벗어났을까?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어제 너 때문에 정말 받았어.

너에게 을 떠넘겨서 미안해.

그녀는 뚜껑이 열렸다.

그는 그릇이 큰 사람이야.

꼭대기(높은 지위) 밑바닥(삶의 저점) 반쪽(배우자)

 

교육과정에서 대유법혹은 상징으로 가르치는 환유 metonymy(속성이 비슷한 다른 낱말을 빌려서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활동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아이들이 많이 쓰는 환유를 만들어 보라고 하면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 용어같은 것들이 등장하지 않을까? 가령 경희중학교(내가 근무하는 학교 이름)는 롤(L.O.L 중학생들이 좋아하는 게임 이름)의 성지이다’, 이런 식으로?

 

그 빨강머니는 정말 정열적이야.

근사한 포드를 샀어.

지하철은 파업 중이다.

부시가 이라크를 공격했다.

광주는 역사의 대격변을 예고했다.

 

 

요즘 학교교육에서 부족한 측면 중 하나가 슬픔, 죽음, 부끄러움, 두려움에 대한 교육이다. 나는 문학수업의 목표를 설파할 때 공감능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가장 인간적인 요소 중 하나가 슬픔, 염치, 부끄러움, 두려움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사춘기 남자 중학생들이 갖고 싶은 일반적인 정신적 가치는 대담함, 강함이다. ‘슬픔, 염치, 부끄러움, 두려움들은 그들이 갖고 싶은 가치가 아니다. 성장과 경쟁, 성공과 성취를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일을 약한 일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염치나 부끄러움, 슬픔이나 연민같은 것들이 얼마나 인간적인 가치인지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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