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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왜 학교는 불행한가 :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대한민국 교육을 말하다 -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대한민국 교육을 말하다 ㅣ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교육 3부작 시리즈 1
전성은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7월
평점 :
거창고 전 교장인 전성은 선생이 쓴 교육에세이이다. 거창고가 어떤 학교인가. 이 땅의 공교육에 과감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대안교육이 가능함을 보여준 학교 아닌가. 게다가 성장과 경쟁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대한민국에서 올바름을 지향하는 의지의 학생들을 기르는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학교이기도 하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 교사가 훌륭하지 않고서 훌륭한 교육이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말이다. 물론 나는 후진 교사들을 딛고 훌륭한 학생이 자라날 수도 있다고 믿지만 그런 기적이나 반면교사의 힘을 믿고 학교를 방치할 수는 없을 터이다. 훌륭한 교사들이 너른 울타리로 학생들을 품을 때 학생들은 그 안에서 편안할 수도 있고 울타리를 뛰어넘어 날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전성은 선생 같은 교사들이 꼭 필요하다. 그의 일갈은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고 과거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런 한계를 뛰어넘어 지금 21세기에도 귀 기울여야 할 만큼 여전히 한국의 교육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아니 오히려 퇴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교 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에 대해 고민할 부분이 있다. 학교는 단지 지적인 학습의 전달 공간만이 아니다. 그 안에서 정신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역으로 일제강점기의 학교의 위상에 대한 고민에서 다시 고찰할 수 있다.
독립운동 당시 학교교육이 내걸었던 교육의 목적, 즉 인재 양성은 정의 자유, 공존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간을 길러낸다는 의미였지 통치계급이나 식민통치국가를 위한 인재를 길러낸다는 뜻이 아니었다.... 일제는 1926년 사립학교규제법을 만들어 학교설립기준에 미달하는 학교는 모두 폐교해 버렸다.
이런 고찰이 없이 기술적으로 교육만 잘하려 든다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일 뿐이다.
정직은 누구에게 정직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정직, 성실과 같은 덕목은 누구에게, 또 누구를 위하는가에 따라 악이 될 수도 있고 선이 될 수도 있다.
독일의 평화운동과 비정부 민간운동의 기수와 주요 세력이 바로 히틀러 유겐트 교육을 받은 세대였다는 것(악이 깊은 곳에 더 큰 신의 은총이 내린다).
위 대목에서는 영혼 없이 죄를 짓는 모범생, 엘리트 교육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된다. 국정농단의 뒷면에는 최고 엘리트들의 하수인 역할이 큰 몫을 차지했다. 그들이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친일을, 히틀러 치하에 살았다면 아이히만이나 괴벨스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즈음해 귀 기울일 부분이 있다. 이 책 속의 글이 최근에 쓰여 진 것이 아님에도 그의 혜안은 돋보인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학교 설립이 자유로운 신고제이지 허가제가 아니며 교과서는 당연히 국정이 아니다. 누구나 교과서를 쓸 수 있고, 그 책이 교과서로 채택되고 안 되고는 학교와 교사에게 달려 있으며 학부모의 동의도 얻어야 한다. 학부모가 최종 선택권을 갖는 셈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학교가 불평등을 조장해서는 안 됨을 말한다.
학교교육은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육은 그 어떤 상대도 악의 축이라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리영희 선생을 해고한 언론사와 대학, 감옥에 보낸 검사와 판사, 간디를 감옥에 보낸 영국인 판사들은 법에 의해서 그렇게 했다. 김대건 신부와 안중근 의사 같은 분들을 사형시킨 검사와 판사들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의 법에 의해서 그렇게 했다. 4.19 혁명 때 데모대에게 총을 쏜 경찰관들은 상사의 명령대로 했다. 그 상사는 법에 의해 발포 명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발포 명령을 내린 상사는 정의로운가.
“우리가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도 남의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수상 글래드스턴이 수단 독립을 주장하여 선거에 떨어진 연설문(옥스퍼드 대학 정문에 붙어있음)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교육이 그저 일정한 중간 잣대만을 세워 기준에 맞는 인간을 기계적으로 양산하는 일이 아닌, 고차원적이고 심오한 작업임을 말하기도 하였다.
주지 말아야 할 도움을 주면 그건 살인이다.
경쟁은 불안을 불러오고 공격과 불안이 악순환 되는 사회를 낳는다.
현실을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상을 현실로 끌어내리면 발전할 수 없다.
구조가 평등하지 않으면 ‘평등한 인간 교육’이 나올 수 없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 대목을 만났다. 오로지 교사의 길 이외에 눈 돌리지 않았던 젊은 시절의 의지가 변질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그림이나 합창, 운동 등 취미를 가지는 것은 삶을 풍부하고 자유롭게 해준다. 그러나 취미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다른 사회활동이 교사직보다 우선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박정희 정권 당시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연루된 학생들 이야기와 광주항쟁 시기에 모든 언론조차 쉬쉬하던 항쟁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릴지 말지를 논의한 거창고 교무회의 장면은 감동적이다.
1969년 박정희 정권 때 거창고 학생들이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했을 때 교육청에서는 데모에 참가한 학생들을 퇴학시키라고 학교에 압박함. 학교는 학생들을 퇴학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림.
학생들이 규탄한 부정선거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검찰이 밝힐 일이다. 학교가 밝힐 일이 못 된다.
학생들이 차도로 행진한 행위는 도로교통법 위반에 해당한다. 도로교통법에 대한 처벌은 학교가 할 일이 아니다.
학생들이 수업을 빼먹은 데 대한 처벌은 학칙에 의해 출석부에 처리할 일이지 퇴학에 해당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국가의 법을 어겼으면 검찰과 검찰이 구속 기소하고 법원이 재판할 일이다. 학교는 교칙에 관해서만 학생을 처벌할 뿐이다.
광주항쟁 당시 전교직원을 모아놓고 원경선 이사장이 광주에서 보고 들은 진상을 상세히 보고한 후 교사들에게 학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 한사람씩 의견을 말하라고 함. 의견은 두 가지. 학생들에게는 때를 기다렸다가 기회를 봐서 알리자는 신중론과 언론의 거짓을 폭로하고 즉각 알려야 한다는 주장. 원경선 이사장의 결론은
“즉각 진실을 학생들에게 알려라. 학교가 죽더라도 교육이 살아야 한다. 국가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할 때, 학교는 학생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 검은 것은 검다 하고 흰 것은 희다고 말하는 게 교육이다.”
전성은 선생의 교육철학은 ‘철학’은 없이 ‘교육’만 하려드는 일부 공교육 교사와, 경쟁과 성취를 위해 ‘가치’를 빼먹은 교육에 매진하는 사교육 관련자(사교육 종사자들도 교육적 고뇌와 갈등이 깊으며, 그 한계 내에서도 인간다운 교육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이 더 많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이지만)에게 제발 올바른 교육철학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간직하고 그러고 나서 학생을 만나라는 경종을 울린다.
아이는 부모를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위해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 태어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부모도, 사회도, 학교도 모두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가 학생을 사랑하는 일은 한 아이의 인격 성장을 온 세상의 이익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다... 그런데 한 아이를 가문의 영광을 위한 존재, 학교의 명예를 빛낼 존재, 국가가 써먹을 수 있는 존재로만 생각하고, 그런 아이만 신명나도록 교육한다면 교사와 학생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어떤 과목을 가르치든 아이들이 반역사적인 삶을 살도록 영향을 끼치는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