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존경할 만한 어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젊은 시절에는 그런 선배들이 없다고 생각했다. 학교 현장에서 그런 선배를 만나지 못했다. 물론 좋아할 만한 선배교사들은 더러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그런 선배가 되어야 할 나이가 되고 있는데, 나 역시 존경할 만한 선배로 불릴 자신이 없다.

 

리영희, 문익환, 신영복 같은 분들은 너무나 머나 먼 곳에서 우러러 보아야 할 분들 같았다. 그런데 황현산을 읽으면서, 마치 아주 가까이에 존경할 만한 선배가 있었구나 싶은 안도감을 느낀다. 황현산이 위대한 석학이 아니라서 우러러보이진 않고 그저 안도하는 것이냐고? 그런 건 아니다. 아마도 내가 문 공부하고 황현산을 같은 문학도라 생각해 선배라 여기는 건지는 건지도 모른다. 헤아려 보니 그분은 내 부모님 연배 정도 되는데, 주변에서 본 그 연배 어르신들은 교양이나 지적 수준, 개개인의 인격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보수적이다.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 우기기만 한다. 폭넓은 사고를 하기보다 내 자식, 나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옹호하고 편법과 부도덕에 대해 관용적이다. 전형적인 한국식 자본주의 사고방식에 윤리적 일관성 따위가 없다. 그러나 황현산 선생은 다르다. 선생 같은 어른이 곁에 있었다면 조곤조곤 세상을 달리 보아야 함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실 것 같다. 신문에 난 그 분의 칼럼을 꼭 챙겨 읽으며, 읽을 때마다 그 젊은 감각에 놀란다. 이 책도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 전에 쓴 글들로 채워져 있는데도 전혀 뒤처진 느낌이 없다.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진응연 시인 <용산 메랄콜리아>를 인용하면서)

...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2009)

 

그러면서 그의 글은 문학도다운 감성이 촉촉하다 나도 그의 물총새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다시 두근거림을 느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저마다 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옳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싱가포르처럼 법적 제재가 많아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는 사회, 일본처럼 공동체 문화가 사람들의 삶을 규제하는 사회, 프랑스처럼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규범이 사람들의 행동을 규약 하는 사회 중 무엇이 이상적일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느 사회나 제멋대로 행동하고 싶은 사람들과, 그들만큼 무지막지하고 잔인하게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그냥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은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그들을 제약하지 않고도 약자들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있을까? 인간 본성이 그런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불완전하나마 지금까지 인류가 구축해 놓은 민주주의니 법치주의니 하는 것들이 기특하기도 하다. 정치나 법으로가 아니어도 그것이 가능한 세상을 꿈꿀 때,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말하기도 하고 종교적 경지를 논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그것은 내 마음의 문제라 여기라고도 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절대로 불가능할지라도 조금이나마 그 이상에 닿는 어떤 사회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애쓰는 현실 자체가 가장 행복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역설일지라도. 독재와 맞서고 부조리와 맞서고 자본에 맞서는 일, 온갖 부당한 일들로 가슴 아파하는 일, 이 모두가 너무 괴로워 다시는 모태에 들고 싶지 않으나 주어진 이 생에서만큼은 크든 작든 뭐라도 하려고 애쓰는 일, 죽는 날까지 자포자기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는 일, 그런 삶의 과정이 그나마 가장 가치 있는 삶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 인사동에 나가봐야겠다. 책을 써야겠다. 집회에 나가야겠다. 그림을 그리고 조그마한 시골집을 알아봐야겠다. 어린 남자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야겠다.

 

그의 반민주에 대한 판단은 엄격하다.

그러나 현실의 조건이 이러저러하니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까지만 실현하자는 식으로 선을 긋는 것은 현실의 압제를 인정하자는 것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다.....

 

자유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말이 이 땅에서 자유를 억압한 적은 없지만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은 민주주의도 자유도 억압했다(자유민주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학교폭력에 대해 쓴 부분이 있어 솔깃했다. 중고등학교 현장을 경험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학자나 대학 강단에 있는 이들이 흔히 그러듯 지나치게 포괄적인 이야기만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다음과 같은 글은 오히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할 때 읽어 주고 싶기까지 했다. 나 역시 학교폭력에 대한 토론수업이나 훈화를 할 때 폭력에 대한 폭넓은 사고를 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사람은 또 다른 각도에서도 누군가에게 혐오를 보인다. 어디서는 점잖고 특정인에게만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사람은 없다. 우리 아이가 집에서는 참 착한데 학교에서 친구를 때렸네요, 라는 학부모 말은 틀린 것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관심을 폭력 일반에 대한 관심으로 넓혀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많은 폭력 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1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료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그의 문학관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책에는 베껴두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이 참 많았다. 자신이 문학의 길을 가게 했던, 어린 시절 섬마을의 풍취를 묘사한 글은 고등학교 시절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고 또 읽었던 감성을 떠오르게 할 정도다. 그는 시인을 자신에게 특별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 곧 시를 쓸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이 있다고 믿었기에 불행해진 사람들은 우리 시대에도 많다. 라고 설명하면서 시마 詩魔 라는 말을 썼다. 우리 학교에도 동료교사 중에 시인이 한 분 있는데 정말 시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그토록 멋지고 아프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에서 우리는 왜 헤어나오지 못하겠는가. 그를 보면서도 느끼고, 나 역시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의 시적 감수성을 토대로 공감하는 바이다.

 

그의 문학론은 이렇게 이어진다. 문학이 예술이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해준 황현산 님께 사랑과 존경을 전한다.

 

어떤 며느리가 아궁이에 불을 피울 때마다 시어머니를 풍자하는 노래를 불렀다. 누군가 이것을 시어머니에게 고자질하자 시어머니가 나도 그 노래 들었다. 노래로는 무슨 소린들 못하겠으며, 노래가 그렇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냐.”... 이것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다.

 

 

여름날 왕성한 힘을 자랑하는 호박순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자랄 것이며, 폭죽처럼 타오르는 꽃이라 한들 감시하는 시선 앞에서 무슨 흥이 나겠는가.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 댁 뒤란에서 보았던 뱀, 미술숙제를 다 끝내지 못하고 자던 밤 어둠 속에 떨어지던 싸락눈 소리, 어느 골목에서 맡았던 음식 냄새, 제사상을 밝히던 은밀한 촛불과 얼룩진 병풍, 쥐구멍에서 꺼낸 반쪽짜리 곶감, 나는 이런 것들을 애써 외워둔 적이 없지만 그 기억들은 내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잇다가 어떤 계기를 얻어 마치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처럼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