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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사실 이 책은 읽은 지 오래 되었다. 책 한 권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거니와 한꺼번에 여서일곱 권의 책을 읽는 습관이 있고, 다 읽은 책을 정리하는 데 읽는 만큼의 시간이 들다 보니 이제야 서평을 쓴다. <윤리21>과 어슷비슷한 시기에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엄기호의 <단속사회>를 같이 읽었던 것 같다. 근대 이후의 시대를 조망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책들, 그리고 개인화로 인해 오히려 몰개인화 되어가는 근대(현대)인들의 이야기며 공동체가 붕괴되는 현상에 대한 입장들이 묘하게 겹친다. 시대별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통찰력 있는 인문사회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들일 수도 있겠다.
칸트는 도덕성이 공동체의 규범에서 유래한다는 생각과 공리주의를 둘 다 비판했다.
만약 사람이 공동체의 규범에 따른다면 그것은 타율적이지 자유는 아니다. 정말로 자유로운 행위나 자유로운 주체가 있을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없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동시에 타자도 자유로운 주체로 취급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근대를 철학적으로 살피지만 한국과 비교해 읽는 재미가 있다. 식민주의에 의해, 그리고 근대화를 표방한 개발독재에 의해 강제로 무너져버린 농촌공동체에 대한 아쉬움이 21세기의 새로운 대안으로 모색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공동체를 비판하는 일본 철학자의 시각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일본은 공동체 문화가 아직도 지배적인 듯 보인다. 그것이 오히려 탈근대화를 막았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보면 일본이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자본이 인성을 극악하게 부패시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단단한 공동체적 결속이라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오히려 일본 내부의 진보적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걸림돌로 보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사회’를 도쿠가와 시대에 일그러진 형태로 형성되고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해체되지 않은 마을공동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긴밀하고 친화력 있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은 없고 공동체만 있는, 그런 형태로 말이다. 식민통치와 전쟁, 분단으로 오히려 기존 공동체의 붕괴를 맛보아야 했던 우리와는 다른 경험이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중세의 ‘공동체’와 비슷한 듯 보인다. 중세가 지나서야 ‘개성’이라는 게 생겼다고 본다. 물론 에리히 프롬은 그런 ‘개인화’의 갈 방향이 자본주의밖에 없었던 현실이 문제라고 지적하지만 어쨌든 ‘타자화’가 시작되면서 근대화가 시작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일본과 같은 동양도, 에리히 프롬의 서양도, 몰개성의 시대를 넘어 진정한 개성화의 시대는 맞이하지 못한 셈이 된다.
(근대화 이전의 일본)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적인데 ‘자기(자아, 에고)’는 없다. 분열증적 인간(깊은 관계를 거부하는)... 자신들의 소작료만 지나치지 않으면, 자기 땅만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알 바 아니다. 다만 ‘사회’를 두려워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행동할 따름.
(현대사회) 대개의 사람들은 단지 악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기독교 공동체에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도가 되는 것뿐.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이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잇는가가 아니라는 것(예 주식투자자의 경우,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일지라도 어디선가 전쟁이 나서 자기 주식이 오르면 좋아할 수 있다.). 즉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그가 무엇을 하는가’와는 다른 것.
고진의 ‘세계시민, 공공성’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항상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반해 자신의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때로 현저하게 제한되어도 좋다. .. 통상적으로 공적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것인데도 칸트는 그것을 사적인 것이라고 하며, 역으로 거기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공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개인을 세계시민(코스코폴리탄)이라고 불렀다.
천재적인 예술가는 이 공통감각에 반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고립되지만, 결국에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이번에는 그것이 공통감각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토마스 쿤도 과학적 명제의 진리성을 만드는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패러다임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칸트의 ‘공통감각’과 매우 비슷하다. 아렌트나 하버마스가 ‘공공적 합의’라 부르는 것은 사실 공통감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의 합의이다. 하버마스는 코소보에 대한 공습을 ‘공공적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로 지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유럽 국가끼리의 합의였다. 아렌트와 하버마스에 의거하면 공공성 = 국가인 듯.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세계시민’을 말하면서 “‘좋은 사원, 좋은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도덕이다. 그러나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도덕성을 거스르는 것으로, 세계시민으로 행동하면 대부분의 경우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고 말한다. 소시민과 의식 있는 세계시민 사이의 갈등을 말하는 듯하다.
칸트는 종교적인 주장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형이상학이라면 논박했다. 윤리적인 한에서 종교를 인정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저 세상에서 구원받는 식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에 다르기 위해서 그러한 신앙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고진의 ‘윤리’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을, ‘도덕’은 사회나 공동체의 도덕을 말하는 것이로 해석한다.
윤리에 대하여
예컨대 어떤 사람이 평생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면 돈이 있어서 그러한 입장에 놓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악을 면한 부자나 지배계급이 구원된다면 악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구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도 마찬가지. 부처나 예수도 저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가 중요했다.
이 대목은 고진이 현실에서 어떤 윤리로 살아갈 것인지를 설파했을 뿐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제 고진과 같은 주장들은 많은 진보적 종교학자들 혹은 사회학자에 의해 반복 주장 되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 기독교에서는 편협한 종교적 시각이 지배적인 것을 생각하면 그들을 붙들고 위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 우리가 더 크게 짓는 죄는 무엇인가, 도덕이 아닌 윤리의 영역에서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오십 보와 백 보의 차이
이 책에서 ‘오십보와 백보의 차이’라는 부분에서 매우 공감하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세상을 바꾸는 여러 가지 행동에서 ‘오십보나 백보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망을 갈 때 가더라도 오십 보를 갔는지 백 보를 갔는지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예 도망을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좋지만 ‘현실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 악인에게 조용히 부역을 한 사람’과 소심하나마 무언가를 한 사람, 부정의한 세상에 맞서 하다못해 ‘불복종’이라도 한 사람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거부하지 못하는 많은 소시민 가운데, 망설이고 스스로 반성하던 사람들 속에 저항의 싹은 죽지 않고 숨어 있다. 가끔 꽤나 진보적인 사람들 가운데 그런 소심하고 나약한, 숨은 생활진보인들을 부역하고 침묵한 이들과 싸잡아 ‘오십보나 백보나’라고 비판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이고 고진이 말하는 담론은 보다 크고, 전복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내가,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죄에 대해 ‘사회구조’를 탓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현상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가의 문제다.
우리가 실제로는 죄를 범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는 범하고 있다는 사실(내가 쓰는 전기, 내가 방관하고 있는 것, 내가 누리는 커피와 여행, 내가 향유하거나 눈감는 정치...).... 예컨대 나는 소를 죽이지 않지만 비프 스테이크를 먹는다. 나는 군사적, 경제적 제국주의에는 반대하지만 그것에 의해 얻어진 생활수준은 향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면 자기가 손수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차이를 배제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논리이다... ‘자유’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역시 개개인이 관계들의 산물이면서도 그것을 초월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개개인의 자본가와 경영자가 도덕적으로는 선하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자본의 담당자인 한 강제되고 마는 관계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단지 악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기독교 공동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도과 되는 것 뿐.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이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괄호넣기, 배제에 대하여
나는 이 책을 한창 읽던 중에 한 동료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00샘이라는 젊은 교사는 매우 유능하고 학생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이인데 최근 들어 이런 발언을 자주 한다. “아침에 지각하는 학생이 있다. 많은 교사들이 지각하는 학생들 벌을 주거나 야단을 친다. 그러면서 약간 늦은 학생에 대해 출석부에 지각 체크를 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벌을 줄 필요는 없다. 출석부에는 단호하게 체크를 해야 한다(물론 아이와 지각하게 된 사정에 대한 진심어린 상담은 꼭 필요하다).... 학생이 싸워 학부모 간 갈등이 생길 때 교사가 할 일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조사하고 학부모중재위원회를 잘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지 사이에서 두 아이의 사정을 전하고 감정에 호소하고 설득하고... 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등등.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그이지만 과연 교사가 그러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문제는 그와 같은 교사의 태도에 대해 공감하는 젊은 교사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것일까? 학생들의 속사정에 깊이 들어가 때로는 (학생의 사정을 이해해 출석부 지각 체크를 하지 않는 따위의) 탈법도 불사(?)하는 교사와 합리적이고 정확하게 학사와 학생을 대하는 교사 중 무엇이 교사의 지향점이어야 할까. 어느 새 나도 나이든 교사가 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이란 책을 정리하다가 재미난 구절을 발견했어요.
'괄호에 넣는다'는 표현.
도덕적, 지적 관심을 배제하는 것
예를 들면 의사들이 자기 가족을 수술하지 않는 것 같은 현상이랍니다.
더불어 이에 대해 고진은 이런 말도 하네요.
"언제나 무엇이든 사물을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만큼 비과학적인 일도 없다."
괄호를 벗겨야 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요.
00샘은 참 독특하게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요.
혹시 내가 받아들이기를, 고진이 말한 '괄호에 넣는'것과 황샘이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같은 것일까요?
잘못 받아들인 것일까요?
독특한 문제제기인데 받아들일 수는 없고(사실은 반박하고 싶은 것이오.),
그러나 아직 생각은 진행 중이고,
00샘은 좋은 교사라고 늘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꽤 좋은 교사라 믿었던 만큼 위와 같은 생각이 무겁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논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논쟁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므로 이야기를 던져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