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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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는 상관없는 생각인데,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상담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심리학자들의 덕을 보고 있지만 정작 심리학자들은 자기 마음을 어디에 기댈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당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들여다보라, 당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헤아리라, 라고 다정하게 혹은 단호하게 말해주는 그들... 그들은...

강신주는 한때 바람을 일으켰던 유명한 심리학자이다. 요즘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별 쓸데없는 궁금증을 가져보았다.

이 책은 내가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스피노자의 입을 빌어 문학작품에 담긴 인간의 본성적인 감정에 대해 말한다. 간접적으로나마 많은 소설들을 읽은 기분이 든다. ‘심리를 본 것이 아니라 문학을 보았다. 잠자리에서 이 책은 나에게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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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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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안다고 더 잘 즐길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서야 음악이든 미술이든 공부를 좀 해볼 마음도, 시간도 생긴다. 방학 중이나 주말에 어렵사리 시간을 내서 연주회를 쫓아가 본다. 청소년 음악회에 가면 귀에 익숙하지만 제목을 몰랐던 곡들이 많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 좀 더 본격적으로 클래식 공부를 해보고 싶던 중에 이 책을 발견했다. 그 전에 <노다메 칸타빌레>를 보았는데 이제 소설도 읽고 음악공부도 한다?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게다가 조금 낯간지럽고 일본스럽긴 하지만 이런 문학적 표현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다.

 

빈약한 소리, 힘겨운 소리로는 안 된다. 갓 말린 보드라운 이불처럼 폭신폭신하면서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어야 한다. ... 하지만 그 물기를 표현하려면 상당한 여유가 있어야 한다.

군더더기 소리를 내지 않으려면 근력이 필요하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면 다리에 힘을 주어야 한다.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으려면 컵을 쥔 손을 허공에서 딱 멈추고 지탱할 힘이 필요하다.

 

사실 모르는 곡명이 더 많았던 점도, 일본 만화나 문학 특유의 경쟁구도도 낯설긴 했지만 그래도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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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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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스플레인 리베카 솔닛

 

이 책은 페미니즘 책일까? 80년대 빨갱이라는 말과 같은 낙인언어가 되어버린 21세기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이 책에 콱 찍어도 될까..

나는 ~주의자이다’, ‘이 책은 ~이즘 책이다그런 단언은 대체로 치졸하고 단순한 평가가 되기 십상이라 생각하는 편이지만 때로는 그런 선언이 단순하여 더욱 강력한 에너지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당신 책을 페미니즘 책이라 부르겠다고 전한다면,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갖는 불온하고 불편한 왜곡을 다 알더라도 리베카 솔닛이라면, 아마 얼마든지 그리 하시라고 할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온각 오욕을 뒤집어쓴 그 단어, 수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그 단어를 다시 말한다. 이 책은 페미니즘 책이다.

 

나는 남자중학생들을 오래 가르쳐 왔는데, 우리 학교 아이들은 요즘 남녀 역차별에 대한 울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의 분노에는 억울함도 있다. 우리가 뭘 그렇게 많이 누렸다는 거냐는, 이제 서서히 여성들이 우위인 (어쩌면 이미) 그런 세상이 오고 있다는, 우리처럼 대체로 지질한 남자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결국은 루저가 되고 말 것이라는 피해의식에 가득 차 있다. 물론 그러면서 그런 울분과 열등감을 어두운 컴퓨터 앞 야동과 게임으로 풀어내기도 하는 안타깝고 답답한 자화상이 바로 21세기 대한민국 10, 20대 남자들이다. 그런 남자아이들에게 차별과 편견’, ‘여성과 인권을 말할 때마다 자주 하는 말이 그것이다. “여성들이 남녀차별을 말하는 것이 결코 여성이 우위인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인권운동은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은 덜 서운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한국의 많은 젊은 남자들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조금은 황당해진다.

 

여성해방운동은 남성의 힘과 권리를 침해하거나 빼앗으려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묘사되곤 했다. 마치 한 번에 한 성만 자유와 힘을 누릴 수 있는 암울한 제로섬 게임인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함께 자유인이 되거나 함께 노예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마리 시어는 페미니즘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급진적 개념이라고 말했다 한다. 실소를 자아내는 말이지만 이처럼 뼈저린 말이라니. 한때, 여자는 사람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머리로는 여자도 사람이지, 당연하지라고 생각할지라도 여전히, 몸으로, 가슴으로, 의식으로는 여자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많은 남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시대이다.

 

대학생인 나의 딸이 어느 날 남자친구와 페미니즘논쟁을 벌이다 결국 싸우고 돌아와서 하소연한다. 남자들은 결코 여자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면서 알라딘을 열어 페미니즘 책을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책 추천을 요구하였다. 나는 집에 있는 <걸 페미니즘><페미니즘의 도전><맨스플레인>을 뽑아주었고 딸이 담은 장바구니에서 3,4,권을 주문해 주었다. 딸은 내가 먼저 저 책 다 읽고, 호돌이(남친 별명)에게 권할 거야.”라면서 씩씩거렸다.

이런 장면은 지하철에서도 본 적이 있다. 여자아이는 앉고 남자아이는 서서 서로 다정하게 바라보면서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목소리는 다정한데, 그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여자가 아기 낳고 육아도 혼자 다 하고 불공평한 세상인 것 같아.” “그래, 하지만 남자는 군대 가잖아,”뭐 이런 대화였다. 옆에 앉은 나는 저들이 조금이라도 말소리가 빨라지거나 화를 내면 어쩌나 아슬아슬해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 대화를 들어야 했다. 다행히 둘 중 누군가가 화제를 돌렸는데(아마도 남자아이였던 것 같다.) 어쩌면 지혜로운 마무리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들은 더 깊은 논쟁으로 들어갔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 이 시대는 남녀가 서로 피해의식에 젖어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세상이다. 겉으로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자들은 마음속으로 저 남자의 공격성, 권위주의가 드러날지 몰라서 두렵고 남자들은 속으로 내 사랑하는 여친이 이기적인 김치녀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녀의 불평등은 역사가 깊고, 쉽게 해결되지도 못할 것 같다. 남녀역차별 주장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었던 단순한 반작용이 아니라 지금 현재 한국의 심각한 사회 갈등 문제가 되어버렸다.

남자들은 정말 뻔뻔스러운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그러는 걸까? 실지로 현대의 젊은 남자들은 제대로 된 성평등 의식을 교육받지도 못했으면서 그렇다고 기성세대 남자들이 누리는 특권들도 누리지 못한다. 비뚤어진 성의식은 물려받고 혜택은 물려받지 못한 젊은 남자들의 분노는 또다시 자기 곁의 학교 친구, 여자 친구, 누나나 여동생에게로 향한다. 그 젊은 남자들을 나쁘다고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들에게 올바른 인권과 존중에 대해 알게 한 적은 있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토론과 대화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뼈저리게, 여자들이 겪어온 수모와 불안한 현실을 남자들이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페미니즘 논쟁은 그 모두를 가로막는다. 일단 안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성폭력 예방교육 시간은 한 해 10시간이 넘는다. 아직도 주로 방송으로 이루어져 수박 겉핥기에 그치는 수업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전에 비하면 인권의식적 측면으로 확장되고 내용도 풍부해지고 있다. 이제는 이것이 성평등 교육으로, 그리고 남녀 모두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인권교육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분노와 증오로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교육이 아니라. 차분하고 깊이 있는 토론 교육은 그들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리베카 솔릿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선언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에 씌어 진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고 현재에 필요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그 용어를 되찾겠다는 뜻이다. 휴머니즘이나 평등주의라는 대체 후보 용어의 경우,,, 날이 너무 무뎌서 아무것도 벨 수 없는 도구는 쓸모가 없다. 라고 말한다. 인정. 하지만 미국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토론 수업 중 한 아이가 넌지시 물어본다. “선생님, 페미니즘의 정확한 뜻이 뭔가요?” 정말로 많은 남자아이들이 페미니즘을 여성인권우월주의로 알고 있거나 해석하고 있다. 워마드의 주장을 곧바로 페미니즘 진영 전체의 주장으로 알고 있는 아이도 많다. 그나마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변질된 것이군요라고 말하는 아이와는 토론을 이어갈 여지나 있다. 의미의 변질이라기보다 확장이거나, 언론 등에 의한 왜곡이다, 라는 말을 알아듣거나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 대다수의 아이들은 논리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토론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놓고는 돌아서서 자기들끼리 메갈이 싫다, 그래봤자 페미니즘은 꼴페미일 뿐이다동어반복하면서 투덜거릴 뿐이다.

 

그래서 더더욱, 학교에서는, 특히 남학교에서는 정확히 페미니즘 교육, 실시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금처럼 페미니즘이 혐오적 표현으로 변질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이다. 남자교사들이 함께 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딸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래서 딸 아이는 폭풍 페미니즘 독서를 하고, 그 중 몇 권의 책은 남자친구에게 빌려준 후 대화를 나누었나 보다. 물론 서로의 입장 차이를 줄이기 어려워 답답해 했지만 남자친구가 너와 다투었다고 아버지와 이야기했더니 아버지가 나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셔서 나를 돌아보았다. 네 입장을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더 진지하게 듣고 대화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딸아이의 말을 여자들의 과잉반응과 짜증으로 치부했던 자신의 태도를 사과했다 한다.

나는 딸에게 모든 남자를 적으로 생각하지 말자고 말했다. 공부하고, 이해하고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많은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동지이다. 남자를 적으로 만드는 게 페미니즘의 목표는 아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나아지지도 않는다. 오빠나 호돌이처럼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 자기를 돌아보고, 잘못을 지적해 달라, 고치려고 노력하겠다는 남자들과 함께 연대해야 한다, 라고.

 

가르치려는 태도

책의 서두는 그 유명한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어떤 모임에서 한 남자가 잘난 척하며 리베카 솔닛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며어떤 책에 나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내용은 사실은 얼마 전에 저자가 쓴 다른 책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 이 분이 쓴 내용입니다.”라고 옆에 있는 지인에게 알려주었지만 그 남자는 잘난 척을 멈추지 않더란다.

 

이 이야기는 저자처럼 출간된 책과 같은 공적 인정 장치를 거친 사람을 포함하여, ‘여자들의 언술을 불신하는 대부분의 남자들의 오만을 지적하기 위해 꺼낸 에피소드다. 리베카 솔닛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에 해당하는 객관적 증거들을 든다. ‘무사위라는 알카에다 요원이 수상쩍다고 9.11 한 달 전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던 FBI 여성 요원 콜린 롤리의 예가 그중 하나이다. 수많은 사례 중 극히 일부분일 뿐이지만.

 

강간에 대하여

미국의 한 대학에서 여학생이 강간당하자 대학 당국은 해가 지면 여학생들은 나돌아 다니지 말라고 일렀단다. 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해가 지면 캠퍼스에서 남자를 몽땅 몰아내자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였단다.

 

이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성폭력 피해자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우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저자는 예방의 책임을 전적으로 잠재적 피해자에게만 지움으로써 폭력을 기정사실화한다는 점도 지적한다.

 

대학은 여학생들에게 공격자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는 데 집중할 뿐 나머지 절반의 학생들에게 공격자가 되지 말라고 이르는 일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여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전혀 없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절반인 남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성교육의 핵심은 정조를 지키려고 노력하라고 여학생들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남학생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말할 권리와 신뢰받을 권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두고 씨름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더구나 요즘은 양쪽에서 압박이 온다. 남성권리운동과 대중적으로 퍼진 숱한 오보들 때문에, 사람들은 요즘 성폭행 무고가 만연했다고 여기곤 한다. 집단으로서 여성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강간 고발이 진짜 문제라는 암시는 개별 여성을 침묵시키고, 성폭행에 관한 토론을 회피하게 만들고, 남성을 주된 피해자로 부각하는 도구로 쓰인다.

 

남자들은 성폭력 문제가 나오면 왜 모든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하느냐고 항변하지만 이미 모든 여자들이 자신을 잠재적 성폭력 피해자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으며, 긴장하고 평생을 산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주기를 바란다. ‘강간이라는 말이 너무 무섭게 들려서 성폭행으로 바꿔 부르지만 우리는 오히려 정확한 용어를 쓸 필요도 있다. 성폭행 무고가 전혀 없지야 않겠지만, 만약 무고가 그리도 빈번하다면 있지도 않은 성폭행을 고발하여 이후 삶에 어떤 영향을 받을지 뻔한 여성들이 무고를 통해 얻을 것이 무엇인가 되묻고 싶다.

우리 학교 어떤 학생이 여자친구와 노래방에 갔다가 여학생의 가슴을 만져 경찰에 고발되었는데 이 사건을 두고 어떤 남교사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그랬나 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깜짝 놀랐다. 어떤 남자가 이젠 키스도 물어보고 해야겠네?’라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 당연한 것 아닌가?

 

리베카 솔릿의 책은 예리하고 신랄하기도 하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은 실천할 수 있는 대안들을,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그의 페미니즘에 대한 고찰은 결국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 대한 돌아봄으로 발전한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구속은 바로 자본주의 경쟁과 잔혹함이라는, 남자들이 조금은 더 유리한 체제 - 하지만 어느 쪽에도 진정 유익하지 않은 그것이라고. 사파티스타 혁명처럼 환경 경제 토착문화 등등 여러 관점을 폭넓게 아우르는 이데올로기에 따른 운동들이야말로 페미니즘만은 아닌 페미니즘의 미래일지 모른다. 결국 그래서 페미니즘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진보 운동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치적 진보를 지향하면서 페미니즘은 싫다고 말하는 남자들은 사고의 확장을 위해 좀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노력은 독서, 토론, 경청 등을 말한다. 그게 그렇게도 어려운가? 페미니즘이 싫다면 적을 알고 나를 알기위해서라도 페미니즘에 관해 책을 읽고 그들의 집회에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며 상대방 파악에 나서보자.

뒤에서 욕하는 것은 결코 토론이 아님을, 인터넷에서 웅앵웅, 메퇘지이런 말들을 댓글에 다는 것은 결코 투쟁이 아님을 깨닫기를 바란다. 만약 정말 여성들이 적이라고 느껴진다면 밝은 낮에 토론의 현장에서 토론다운 토론에 함께 하기를 권한다.

어쩌다가 여성인권운동에 맞서는 남성들이 처절한 투사가 되었는지, 약자들끼리 이렇게 싸우면 누가 낄낄거리고 좋아라 할지, 생각만 해도 참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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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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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어느 대학 국제어학원에서 영어회화 수업을 들을 때였다. 미국인 교수가 주말 직전 수업에 각자에게 과제를 내주었다. 나에게는 한국드라마(기초회화반이었으므로)를 보고 와서 이야기를 하라고 했는데 내 옆의 스물한 살짜리 대학생에게는 명동에 가서 남자를 만나라고 했다. 남자친구가 없다는 그녀에게 교수가 전한 남친 만드는 비법은 이거였다. 마음에 드는, 아직 사귀지는 않는 그 남자와 식사를 같이 하라(거기까진 할 수 있지?), 그리고 대화를 나누라, 그러면 넌 연애를 할 수 있다.,. 이게 무슨 황당한 비법인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와 그 남자에 대해말하라. 세상 어떤 남자도 여자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려는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면 다들 자기 이야기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당신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당신에 대해 묻고 관심 갖고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당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간단한 연애의 비법은 사실 모든 관계에서 다 통한다.

 

정혜신은 누군가를 만나면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 라고 묻는다고 한다. 이 단순한 말은 마법의 언어다. 국제어학원의 미국인 교수가 말해준 연애의 비법이자 공감의 첫 마디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다들 자기말만 하려든다. 그런 세상에서 누군가 당신은 어때?’라고 물어주었을 때,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자기 자신에게 비출 때 느끼는 기쁘고 아픈 당혹감을 정혜신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들과 일주일 만에 단둘이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아이가 갑자기 엄만 요즘 뭐가 재미있으셔?” 라고 질문을 던진다. , 난 요즘 뭐가 재미있지? 질문을 받았으므로 대답을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구나, 나 자신도 나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았구나... 내 아들은 그냥 자기 본성대로, 늘 살아왔던 대로 그렇게, 자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에게 집중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무심한 듯 던진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아, 나도 소중한 사람이구나, 우리 아들이 이 엄마한테 관심이 있구나, 이 아이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이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들에게 한수 배웠다. 정혜신의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와 내 아들의 요즘 엄마가 뭐가 재미있으셔?”, 그리고 미국인 교수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물어라.”는 모두 맥락이 통하는 공감의 언어 물꼬 트기들이다. 참 쉬운 첫마디, 그런데 우리가 참 못하는, 기술적 문제가 아닌 태도의 문제인 그런 말들이다.

 

정혜신의 책에서 가장 공감되는 대목은 존재가 소멸된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빠르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방법이 폭력이라는 말이었다. 맞다. 우리는 보통 폭력을 저지른 사람을 비난하고 미워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를 벌할 땐 벌하더라도 그 폭력의 근원이 무언지 살필 필요는 있다. 특히 우리처럼 아이를 키우고 가르쳐야 하는 부모와 교사들은 더더욱.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자녀와 학생들의 폭력적 행동은 대개가 어른들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저게 누굴 닮아 저럴까?’, ‘어디서 저런 이상한 녀석이 우리 학교에 들어왔지?’ 라고 욕하고 밀쳐내려 하기 전에 내 모습에서 자식의 폭력성을 돌아보고 그 아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친구들에게 표출되는 폭력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정혜신은 또 폭력은 자기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하는데 아들러가 아이들이 부모나 친구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쓴다고 한 것처럼 아무 것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인정받을 방법을 갖지 못한 사람이 세상에 인정받을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자존감이 높고 자기 내면에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은 폭력이나 폭언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정혜신은 충조평판을 하지 말라고 한다. 외워두면 좋을 것 같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줄임말이다. 아들러도 하지 말아야 할 많은 말들을 제시했다. 위 네 가지 말고도 조롱과 칭찬마저도 삼가라 했다. 칭찬조차도 수직적 권력관계에서 나온 말이라고. 물론 아들러의 주장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고 교사의 입장에서는 때로 충고와 조언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수평적 인간관계에서는 충조평판의 폐해를 분명히 안다. 나 역시 남편에 대한 나의 언어들, 내 어머니에게 하는 말들을 돌아보니 대개가 저기 어딘가에 걸렸던 것 같다.

 

정혜신은 마음과 존재에 대한 공감이 곧 상대방이 한 행동에 대한 공감은 아니란 점을 분명히 말했다. 많은 교사들이 상담 연수할 때 걱정하는 부분 중에 공감해 주면 아이들이 기어올라요. 학생들은 공감하는 교사에게 막 행동해도 되는 줄 알지 않을까요?’ 한다. 교사나 부모는 아이들과 다정하게 공감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물론 그렇게 아이 행동을 이해하면 야단치거나 벌을 주기 어렵긴 하다) 아이들이 잘못한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다정함과 단호함의 경계를 어떻게 짓느냐고 울상을 지을 게 아니다. 아이들도 다정하나 분명하고 엄격할 때, 즉 화내거나 짜증내지 않고 진심을 담아 네가 한 행동은 잘못된 것임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자라고 말하는 부모나 교사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혜신이 나의 오랜 질문에 답한 것이 있다. ‘토 달지 않고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은 공감이 아닌 감정 노동일 뿐이라고. 기질적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힘들어 하는 내가 어쩌다 상담을 공부했을까 싶을 때가 많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많이 힘들다. 내 어머니와의 대화에서는 지칠 때가 많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대해 정혜신은 감정노동과 공감은 다르다고 말해준다. 공감해주기 싫다, 라고 마음속에서 도리질 칠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던 많은 상담교사, 심리치료사, 혹은 맏딸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에게 아니,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준다.

 

정혜신은 또 정서적 공감과 정서적 호들갑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간혹 사람을 잘 사귀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좋아지지 않을 때 그게 이상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그의 다가옴은 늘 과장되어 있었다. 분명 나에 대해 말하고 묻는데 그게 기분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공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감은 반드시 진심과 동반되어야 한다. 거짓 공감은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곧 피곤해진다. 물론, 내가 만나는 학생들도 당연히 그걸 안다.

 

나는 상담업무를 맡은 교사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었지만 아무 상관없는 일반인에게도 이 책은 따뜻하게 읽힐 것 같다. 자기의 말을 돌아보고 관계를 돌아보게 해준다. 자기성찰만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고 잘 견뎌왔는지를 스스로 묻고 스스로 위안하게 해주는 힘도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정혜신이 앞에서 그렇게 내 스스로 묻고 대답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럼 정혜신은? 그에게는 남편이 그런 역할을 한단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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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브 광장의 작은 책방
에릭 드 케르멜 지음, 강현주 옮김 / 뜨인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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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석 같은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버릴 부분이 없다. 책 속 서술자가 나였으면, 싶었다.

나는 지금 중학교에서 선머슴 같은 남자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문학을 가르친다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저 강아지 같은 소년들과 윤동주를 말하고 자기 시를 쓸 때의 진지함을 말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며 잘 살고 있다. 이 충분한 교감이 상처받지 않고, 가장 아쉬울 때 퇴직을 맞이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퇴직하면 시골집에 작은 어린이 도서관을 갖는 게 꿈이다. 으리으리하지 않은, 그냥 시골집에서 그냥 막 자라는 풀꽃들로 마당을 삼고 가끔씩 찾아오는 어린 손님들을 위해 책을 준비하는 그런 도서관 말이다.

나탈리는 물론 나보다 더 에너지 넘치는 서점 주인이다. 아름다운 남프랑스, 햇살이 좋은 위제라는 작은 시골 마을 에르브 광장에 서점을 열었다. 부럽다. 광장이 내다보이는 서점도, 그녀의 집 -‘우리 정원은 몇 그루의 올리브나무, 세 그루의 커다란 편백나무, 아가판서스 꽃과 라벤더 꽃이 이는 토스카나 분위기의 잘 정돈된 마당에 가까웠다- . 유럽은 유럽의 것. 나는 나만의 것으로 마당도, 책이 많은 책장도, 책으로 만나는 사람들도, 햇살도 갖고 싶은 것이다.

 

나탈리는 서점에 온 손님들에게 책을 권한다. 기꺼이 대화를 나눈다. 그가 단지 서점 운영자이고 장사꾼에 그치지 않는 이유이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은 나탈리는 책으로 맺어진 형제라 칭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가진 재능을 사람들과 나눌 의무가 있다. 책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책을 나누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복무일 것이다. 나탈리는 그것을 제대로 해낸다.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선생처럼, 가끔은 친구처럼, 몰래 애인처럼 말이다. 글을 모르는 이국의 젊은 새댁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여행자에게 여행지에 대한 책을 권하기도 한다.

 

고리타분한 독서에 딸을 가두는 엄마와 거기서 탈출하려는 딸 끌로에 이야기는 인상 깊다. 나탈리는 몇몇 학교나 가정에서 문학은 19세기에 멈춰 있다고 말하면서 어린 학생들이 감성을 키우려면 고전문학에서 시작하기보다는 자신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방법이다.’라고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렇게 나탈리가 권하는 책으로 자기만의 독서를 시작한 소녀의 날갯짓으로 그 가족으로 불통에 기안한 가족의 아픔마저 치유하게 된다.

물론 현실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 나 역시 교사로서 상처받은 아이와 그 상처의 근원이 된 가족, 아이의 부모와의 대화를 시도하곤 했지만 소설과 달리 나의 개입은 그렇게 드라마틱하거나 해피엔딩적이지도 않다.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문제는 밖에서의 관심이나 돌봄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만큼 뿌리가 깊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서나마 이런 행복한 결말들을 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은 이후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해본다. 무조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고전소설 같이 단순한, 그런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단순명쾌한 문제해결이 현실을 극복하게 할 리야 없지만 잠시라도 그런 기쁨을 맛보고, 맛보게 하고 싶다고.

끌로에는 자신이 책에서 읽은 여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도 그녀처럼 되고 싶어요. 아주 열정적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매 순간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에요.

 

나에게도 소년들을 독서의 길로 이끈 경험이 많다. 국어시간을 통해서도 그러하고 담임으로서도 그러하고 두레일기를 쓰거나 학급문고를 운영하거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도 그렇다. 아이들에게 책 선물을 자주 하는 편인데 이보다 좋은 생활지도가 없다. 아무리 거칠게 행동하는 아이도 아무리 상처가 깊은 아이도, 자기에게 책을 선물로 주는 어른 앞에서는 자기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대개의 아이들이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해 일탈도 하고 우울해하기도 한다. 아무 책이라도 좋겠지만 자기 이야기를 반영한 책, 자기가 정말 읽고 싶었던 책, 읽고 나서 독서나 삶의 또 다른 빛을 발견하게 한 책을 건네주는 어른이 있다면 그 아이는 살아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폭력으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아이가 있었다. 녀석은 학폭위가 열려 징계 명령을 받은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린 것처럼 보였다. 급식시간에 치마를 입고 온 내 뒤에서 아이스케키동작을 하는 것을 유리창으로 보게 되었는데, 그 전까지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잠을 자도, 친구를 때렸다고 해도, 껄렁대며 무리들을 이끌고 다녀도 다 어린아이라 그렇지, 하고 용서가 되었던 녀석이 몹시도 싫어졌다. 도대체 자기에게 늘 다정하고 너그러웠던 교사에게, 그것도 나이가 50이 넘은 선생에게 그런 장난을 왜 하는 걸까? 이맘때 남자아이들은 위악을 떨면서 무리에서의 서열을 정비하는데 녀석은 아마도 나 이렇게 교사도 능멸할 수 있는 놈이야, 내가 두목 맞지?’ 이런 걸 아이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춘기 때 허세 떠는 남자아이들의 심리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복도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늘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지만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아이에겐 건성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자기 담임에게 그러더란다. “안정선 선생님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늘 다정하셨는데 요즘은 안 그러셔서요.” 웃고 말았다. 아이들이 미워질 때도 많지만 열 번에 열 번 용서하고 보듬지 않으면 선생일 수 있으랴 싶다. 그래서 그녀석이 사회봉사를 가기로 한 전날 나는 아이를 불렀다. 그리고, 내 아들이 군대에 가 있을 때 내가 보내준 시집, ‘검열필도장이 찍힌 시집 <딸아 외로울 땐 시를 읽으렴>을 건넸다.

 

이 책은 내가 제자들에게 많이 선물하는 책이야. 하지만 이 도장, 이거 보이지? 이 책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 샘 아들의 군대 가 있을 때 내가 보내 준 책, 제대하면서 가지고 나온 거거든. 이 책 너 줄게. 네가 올해 겪은 일들, 너에게도 고통스러웠겠지만 누군가를 때리고 괴롭히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 나쁜 일을 겪기 전에 배우고 성찰한 계기로 삼는다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어. 사회봉사 가서 생각 많이 하길 바란다. 선생님이 이 책을 주는 마음도 헤아려 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 ”라고 말하며.

 

그래서 아이가 천사가 되었느냐고? 현실에 그런 드라마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니까. 그래도 그 아이는 복도에서 나를 만나면 다가와 손을 잡으면서 다정하게 인사를 한다. 사회봉사를 다녀와서는 생각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의젓하게 말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행동은 조금씩 좋아지지 않을까? 훗날 어른이 되면 중학교 때의 자기가 조금은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서서히, 조금씩 성장한다는 걸 잘 아니까.

 

나탈리는 문학과 독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작은 사다리가 되어주는 이런 문학을 좋아한다. 그 흔적을 통해서 또 다른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생각들

 

나는 책들에 둘러싸인 채 혼자가 되는 순간을 좋아한다. 그럴 때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탈리는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하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서점을 운영하고 도서관을 관리하고 문학교사가 되고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교사가 된 사람, 문학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 생계의 수단으로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 않더라도, 즉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더라도 역량이 부족한 사람도 많다. 그런데 나탈리는 진심으로문학과 책을 사랑할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의 상황을 파악하는 직관력도 뛰어나고 그 사람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다만, 딸을 대하는 나탈리의 태도는 좀 불안하다. 심리적으로 딸에게 집착하는 모습이 보이고, 아마도 그로 인해 딸과 불화가 생겼겠지 싶은 태도들이 있다. 타인에게는 그토록 너그럽고 객관적인 나탈리가 오직 딸에게만은 작은 일에도 금방 상처받고 화를 내는 이유가 무얼까. 기질적으로 나탈리는 안정적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이고 딸은 예술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인 듯 보이는데, 딸의 에너지를 품고 이해하기엔 나탈리는 조금 소심한 엄마인 건지도 모르겠다.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내가 딸을 대하는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개는 엄마들이 딸에게 자기 자아의 희망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젊은 딸은 언제나 넓은 세상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하고 늙은 엄마는 딸이 별일 없이 살기를 바란다. 클로에에게 엄마의 세상에서 벗어나 자기가 자기 세계를 개척할 때 좀더 용기를 내라고 말해주던 나탈리는 그 이야기를 자신의 딸에게 들려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딸이 자유로워져야 엄마도 자유로워진다. 영원한 숙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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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네요. 2018-12-31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을 잘 쓰는 분들이야 넷공간에 넘쳐나지만,
그분들 중에 겸손함이 묻어나는 분은 흔치 않죠.
그래서 님 글이 좋네요.

풀꽃선생 2019-01-21 22:58   좋아요 0 | URL
어떤 칭찬보다도 마음이 꽉 차는 격려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은총맘 2019-06-10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글을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정말 훌륭한 스승님이시네요.. 늘 건강하시길

풀꽃선생 2019-09-30 13: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날이 갈수록 교사로서 부끄럽습니다. 어린교사였을 때는 미숙해서 실수를 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노련해질수록 아이들이 보내는 신호에 둔감해지는 건 아닌지 또 걱정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