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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평점 :
품절
1. 나는 학교에서 두려움 없이 ‘反차별’을 가르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대체로 평등을 지향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 다들 차별이 나쁘다고는 말한다. 차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는 희망 때문에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논리적으로 꼬여 있는 아이들도 가장 기본이 되는 생각,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에서부터 출발할 수만 있다면 토론을 통해서 주변의 다른 비논리적인 사고들은 정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차별 좀 하면 어때?’라고 생각하는 교사 혹은 학생을 만난다면... 나는 회피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하려 애쓸 수 있을까? 그리고 대다수의 ‘차별은 나쁘다는 걸 알아. 하지만 여자는..., 외국인은....’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의 생각을 바로잡거나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 길고도 정교한 교육방법을 기획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2. 내가 누리는 ‘차별의 특권’은 없는가?
남성특권 목록
-내가 승진에 자꾸 실패한다면 그 이유가 성별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밤에 공공장소에서 혼자 걷는 걸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운전을 부주의하게 한다고 해서 나의 성별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외모가 전형적 매력이 없더라도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안정적 삶을 살고 있는 중산층 가정 삶이라는 특권(?)에 안주하면서 입으로만 반차별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본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그로 인해 아이들을 잘 양육할 수 없는 학부모들을 보면서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있지는 않은지. 등등.
3.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는가?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개선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백인은 ‘많이’, 흑인은 ‘별로’라고 대답했다 한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인권이나 이주민 상황에 대해 질문해도 비슷하지 않을까. 간혹 백인이면서 흑인인권 운동을 하는 이라든지 남성이면서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이, 교사이면서 학생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등 고도의 초자아로 객관성을 유지하는 이들이 있겠으나 그들 외의 대부분의 일반인에게 ‘객관적인 입장’이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약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말해야 한다. 말하는 것 자체가 투쟁인 것이다. 거꾸로 내가 만약 다수이자 강자의 위치라면 자신의 생각이 아닌 약자의 입장에서 그들은 어찌 생각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교사인 내가 강자이고 학생은 약자라는 것을 잊지 말자.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전보다 좋아졌지 않은가’라고 생각하지 말고 학생들이 뭉텅이 취급 받고 무시받고 외면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그들을 그런 취급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돌아볼 일이다.
4. 나 자신에게 스며있는 ‘구조적 차별’은 없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농담들, 에구, 한 대 때려주지 그랬어, 남자가 왜 그래?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동남아스럽게 생겼네. 어제 짱깨집 갔어. ... 또 뭐가 있을까? 우리 속에 녹아 있는 학생을 차별하는, 혐오하는, 편견에 빠진 그런 표현들... 여럿이 모여서 싫어하는 소수 집단에 대한 혐오표현을 쓰거나 희화화하며 죄책감을 덜고 자기들끼리 연대감을 느끼며 심지어 도덕적 기준의 경계를 무너뜨림(혐오표현을 함부로 쓰면서 집단적 편견과 적대감도 봉인해제 됨. 일베의 세월호 비하 같은 것). 이럴 때는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유머를 만나면 정색하고 따져야 한다.)
5. 이것은 단순한 배려인가, 공정하고 합리적인 조치인가?
공무원 시험에서 장애인 수험생을 위해 대필을 해준 것, 어떤 선진국에서 비영어권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입학 후 일정 기간 동안 시험시간을 1.5배 더 주는 정책을 편 것 등...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에게 수행평가의 기준을 달리 주는 일은 어떠한가?
6. 나는 정의로운 사람인가?
정의의 범위 – 누구나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의 영역은 한계선이 있다. 그 범위가 넘어선 사람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대해도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공산주의자가, 난민이, 성소수자가 도저히 선 안으로 들일 수 없는 ‘정의의 범위’일 것이다. 나의 ‘정의의 범위’는 무엇인가? 범죄자? 나의 경우 청소년 범죄에 대해서 처벌보다 교화와 사회적 원인 교정이 더 필요하다는 ‘허용적 입장’이다. 하지만 일반 범죄, 특히 강력 범죄에 대해서는 사형 등 엄벌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나의 생각에 모순은 없는가?
7.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인가?
학식과 경험이 많으며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도록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저항세력으로 등장한다.
많이 배운 자가 가진 자 편에 서는 일은 80년대 독재 정권하에서뿐 아니라 현재까지(사실은 고래로 그래왔지만) 일반적인 현상이다. 교사는 누구보다도 학식과 경험으로 사회변화를 이끌어가야 할 사람들이지만 대개는 침묵, 혹은 동조, 혹은 오히려 앞장섬으로써 기득권에 복무했다. 나에게는 그런 요소가 없는가? 나이가 들면 이제는 그만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8. 나의 교권은 안녕한가?
평등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 여성의 권리가 높아지면 남성은 손해를 보는가? 학생 인권이 높아지면 교권은 떨어지는가? 난민을 지원하면 국민에게는 손해인가?
교권은 ‘교사의 권리’가 아니며 학생인권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 많은 이들이 학생인권이 높아지면서 교권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교권은 학생을 때릴 수 있는 권리, 모욕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므로 학생인권을 존중한다고 해서 교권이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지금은 과거에 교사들이 교육할 권리와 권한을 학생을 함부로 대해도 제재 받지 않을 권한과 착각한 데서, 그리고 그런 착각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는 시기이며, 여태까지 제대로 인정받아 보지 못했던 학생인권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자리 잡게 만드는 과도기이다. 그래서 생기는 오류들이 많다. 아무 질문이나 던지고 교사를 모욕하고 교사의 수업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학생의 권리인 양 착각하는 학생과 학부모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제대로 존중받고 자란 학생들은 교사에게 그러지 않으며 교사로서 자존감을 굳게 지키고 있는 교사는 결코 학생을 모욕하지 않는다.
서로가 존중하며 서로의 권리와 인권을 존중하는 학교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 데 아직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그리고 하필 지금이야말로 가장 그 혼돈의 정도가 심한 울돌목이다. 여기를 빠져나가면 아마도 나는 퇴직교사가 되어 안정되어 가는 학교를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겠지..라고 희망사항을 적어본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 화해하고 함께하는 열린 공동체로서의 ‘우리들’을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