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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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왜 파스칼 키냐르가 떠올랐을까. 프랑스 문학 특유의 섬세한 묘사가 돋보여서 그랬거나 아주 가까이에 존재하는 자연 호수, , 나무, 바람 따위-을 느끼게 하는 문장 때문에 그랬을까. 문학 혹은 음악적 감수성 때문이려나

 

요즘 나는 책에 대한 책에 많이 끌린다. 어떤 책은 지적 고양을 위해 섭취하지만 또 어떤 책은 영양가를 떠나 위안을 위해 읽기도 한다. 그림책, 그림에 대한 책, 문체가 아름다운 책, 오직 문체만으로 읽는 책, 여행에 대한 책,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냥 즐거운 책, 서점에 대한 책, 책에 대한 책... 그런 것들은 그냥 나를 위한 책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가 그런 책일 거라 생각해서 읽은 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책인지 살피려 했던 거였다. ‘책방 할아버지라는 표현 때문에 이 책이 좀 만만하고 따뜻하게 여겨진 것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는 이, 감성적인 친구, 미학적인 만남을 위한 그 누군가에게 선물할 만한 책이다. 오히려 중학생들에게는 좀 어려울 것 같다.

 

그레구아르는 배움이 짧은 요양원 직원이지만 삶의 고비를 넘기려 하는 할아버지 파키에 씨를 만나면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갖고 있던 지적이고 감성적인 자산을 그레구아르에게 물려주고 싶었나 보다. 그러나 한 사람을 한 사람의 인생을 책 앞으로 이끄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나도 국어를 가르치고 책으로 아이들을 만나지만 정말 책읽기를 싫어하는 아이, 기초적인 독해력을 갖지 않은 아이를 독서의 바다로 이끄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잘 안다. 심지어 나의 아들, 딸조차도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게 쉽지 않았는 걸. 내가 아는 모든 노하우를 동원하였건만.

그러나 파키에 씨는 그레구아르 안의 맑은 영혼을 알아본 건지, 아니면 삶의 끝자락에서 절박하게 만난 이가 그 아이여서 그런 건지, 그레구아르에게 자신의 모든 영적 에너지를 쏟아 붓듯 한다. 자기에게 책을 읽어 달라 하고, 다른 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라 하고, 삶을 마감하는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책으로 배웅하라 한다. 심지어는 끝끝내 병든 자신의 몸으로 다시는 찾아갈 수 없는 수도원, 거기에 있는 와상(누워서 책 읽는 알리에노르 조각상)을 자기 대신 찾아가 책을 읽어주고 오라는 미션까지 준다. 파키에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해주는 과정에서 그레구아르는 학교 교육에서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책읽기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알아간다. 그야말로 산 교육이다. 그 과정은 참으로 가열하고 아름답다. 나는 문체도 좋았고 그렇게 나이 많은 이가 젊은이에게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는 과정을 보는 일이 참 좋았다. 가르치는 자로서 나의 자세를 돌아보았다. 많은 책을 건네고 읽히고 선물하며 독서교육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내가 과연 충분히 열정적이었던가 반성도 했다. 농담처럼 말하는 영혼을 갈아 넣고 삶을 녹여내는 가르침이란 이런 것일 터이다.

 

마음이 아픈 아이에게 이 책에서 그레구아르가 여행 중에 했던 것처럼 나무에게 책 읽어주기과제를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도 방과 후에 몽골에서 온 아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집에서 어머니께 동화책을 소리 내 읽어드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냥 너 자신을 위해 책을 읽으라는 말보다 누군가를 위해 네가 책 읽어주는 이가 되라는 과제는 세 영혼을 구제할지도 모른다. 책 읽어주는 이, 듣는 이, 그리고 그 미션을 준 이.

 

이 책에서 얻은 시 한편을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위해 교사상담연수 ; 청소년 소설 읽고 우리 학생들 이해하기프로젝트를 하면서 인용했다.

 

 

우리가 쓴 모든 것의 최초의 선구자인 신은

사람들이 취해 있는 이 땅 위에서

정신의 날개를 이 책 속에 넣어놓았다

책을 펼치는 사람은 누구나 거기서 날개를 찾아

영혼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저 높은 곳을 날 수 있다.

학교는 예배당과 같은 성소이다.

아이가 알파벳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하나씩 따라 읽을 때

문자 하나하나마다 미덕이 들어 있으니

그 심장은 이 겸허한 미광 속에서 은은히 빛난다.

그러므로 아이에게 책을 주어라.

손에 램프를 들고 걸어라,

그 아이가 따라올 수 있도록. -빅토르 위고

 

 

모두가 학교를 욕하지만 높은 정신을 지녔던 어떤 이는 학교에서 종알종알 책 읽는 아이들의 가치를 귀하게 평가했다는 생각을 해보면 학교를 지키고 있는 내가 조금은 자랑스럽다. 아이들에게 책 읽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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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마르얀 사트라피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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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는 이란 남서부에 있는 도시란다. 지은이 마르잔 사트라피는 이란 출신의 예술인이다. 여성이다. 이란에 대해 아는 바 없고 사실은 관심도 없다. 다만 학생들에게 읽힐 만한 책들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과정에서 이 책을 접했는데 나야 별로 관심 없는 분야라 할지라도 남자 중학생인 우리 학교 학생들이 읽으면 좋을 책일 것 같았다. 하지만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도 세상에 대한 눈을 넓히는 독서를 하게 되었음을 인정한다. 눈을 닫고 모른 척 했던 절반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란의 역사는 워낙 복잡해서 이 책을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리석은 역사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 같다. 비슷한 연배(지은이는 69년생이다)에 조국이 역사의 격동을 겪어야 했던 청춘에 대한 공감으로도 이 책은 의미가 있었다. 지은이는 고문과 살인이 일상이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진보적인 부모 밑에서 남다른 감각과 지성을 지닌 소녀로 살았던 일에도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일반인이 겪기도 힘든 역사이지만 특히나 자유롭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춘기 소녀에게 남녀차별과 억압, 정치적 질곡의 사회를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 역시 사춘기와 청춘 시절까지를 군부독재 치하에서 보내야 했다. 중학교 때 소문으로 듣던 광주와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겪어야 했던 전두환의 역사, 대학생 시절의 6월 항쟁, 청춘 내내 맴돌던 최루탄 냄새와 불심검문, 잡혀가던 친구들, 남영동에 끌려갔다 온 남자친구... 물론 우리는 마르잔처럼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다. 그리고 완벽하지는 않아도 이제는 민주정부를 누리고 산다. 해일을 피해 안전한 언덕에 올라 남의 고통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책 읽는 심정이 편치만은 않았다. 하긴, 바깥에서 우리 한반도를 바라보는 이들은 우리가 핵전쟁의 위험 속에서 근근이 살고 있다고 안쓰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나라 여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멀리 뉴스를 접할 때에는 폭격으로 아이들이 죽고 민간인의 삶이 파괴되고 여자들이 명예살인을 당해도 너무 흔한 뉴스의 피로함 때문에 아예 기사를 읽고 싶지 않게 된다. ‘타인의 삶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럴 때 문학은, 예술은 더 가까이 그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내게 속삭인다. ‘남의 일이라고? 이토록 생생한데? 너의 일일 수도 있었는데? 그들도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었는데? 차도르나 히잡 같은 베일을 쓰면 표정이 감춰져서 욕망도 억누르면서 그런 삶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 거라 생각하지? 너와 똑같이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고 공부하고 배우고 싶어 하고 사랑하고 싶어 하고 가족과 헤어지지 않고 싶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왜 몰라? .....채찍질이다.

 

지은이이자 주인공인 마르잔이 어린 의협심에 못된 짓을 한 친구 아빠 이야기를 하면서 그 친구에게 응징하겠다 하자 마르잔의 어머니는 그 애 아빠가 그랬지. 하지만 그게 라민의 잘못은 아니잖니.”라고 말한다. 이 쉬운 말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전대의 악행을 후대에게 복수하려 들면 그 어떤 역사도 발전하지 못하리라. 피의 역사가 아직도 계속되는 곳을 보면 그 복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무조건 용서를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책임을 분명히 하되 감정적인 보복의 욕구로 넘나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마르잔의 부모는 마르잔을 유럽으로 보내기로 한다. 마르잔의 할머니가 떠나는 손녀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거다. “살다 보면 사내 녀석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야. 만약 그 녀석들이 네게 상처를 준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그건 녀석들이 멍청해서라고, 그렇게 하면 네가 남자들의 잔인함에 대응하려는 걸 막을 수 있을 게다.” 할머니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헛된 복수에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말라는 지혜로운 이유가 더 크다. 하지만 나는 그 다음 말이 더 마음에 남았다. “언제나 존엄성을 잃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 ‘자존감의 의미를 이보다 명확하게 표현한 훈화가 있을까 싶다. 사춘기 초입에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말들과 비슷하다.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똑바로 걷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단단하게 살라고 스스로에게 뇌는 말들이 조금은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 할머니의 말은 마르잔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을까. 그냥 당당하라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라니. 그 어려운 것을 해내야 존엄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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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노래 - 자연의 위대한 연결망에 대하여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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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정재승, 최재천, 쳇 레이보,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과학자이면서 문학성 뛰어난 글을 쓰는 사람들 혹은 이야기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거기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의 이름을 더한다. 나는 문학이 영혼을 구제한다고 믿는 사람이다삶이 팍팍할 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문학작품과 예술 작품들이었다. 소설과 시에 젖어 살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현실의 효용을 위해 매진하지만, 삶이 핍진하다고 느껴질 때, 책장 어딘가에 사랑하는 시인의 시가 꽂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읽다가 잠시 멈춘 보르헤스나 페소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황현산 선생과 문학에 대해 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잠자리에 들기 전 단 몇 분이라도 내 영혼은 숨을 쉴 수 있다.

 

그런데 문학적인 과학자라니. 과학은 정연한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아름다운 상상력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은 문학과 닮았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궁금함을 풀어가는 방식의 차이이다. 그래서 진정 과학의 세계를 탐구한 이들은 실로 문학적이었다. 뉴튼이 그랬고 어머니를 마녀사냥에서 구해내려고 이야기를 썼던 케플러가 그랬다. 우주를 탐구하다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자기의 과학적 지식을 펼쳤던 칼 세이건 또한 그랬다. 거기 조지 해스컬을 더한다.

 

식물학자이고 나무를 탐구하는 그이지만 나무의 물성을 뛰어넘는 영성을 보는 이가 필자이다. 진정으로 나무와 교감하고 숭배한다. 사실 그러지 않으면 그 직업에 진정으로 종사하는 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 강아지의 마음까지 읽고 헤아리는 강형욱,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짚는 오은영, 달팽이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엘리자베스... 교사도 그렇다.

 

해스컬은 케이폭 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아마존 원주민들의 삶을 논하고 올리브 나무를 통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와 갈등을 짚는다. 그렇다고 거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는다. 바라보는 이의 시선, 마치 오래 그 자리에 서서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았을 나무 같은 시선. 그리고 그는 유려한 문체로 삶의 풍경을 묘사한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내가 북미의 어느 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흐르며 미루나무를 스쳐 지나는 것 같다. 황폐한 바람 속의 올리브나무 언덕에 서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처절한 시위를 바라보는 것 같다. 케이폭 나무 위에서 원시림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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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 북유럽 사회가 행복한 개인을 키우는 방법
아누 파르타넨 지음, 노태복 옮김 / 원더박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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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식 삶의 형태를 베끼다시피 살고 있다. “왜 꼭 미국식이어야 해? 만약 베끼고 닮으려 애쓸 수밖에 없다면 다른 대안은 없는 거야?”라며 서유럽식 혹은 북유럽식을 들먹이면 기존의 미국식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은 유럽, 특히 북유럽식을 일종의 사회주의취급한다. 저자는 노르딕 국가들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힘써 증명하려 한다. ‘20세기에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와 맞서 목숨을 바쳤던 핀란드인의 수는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죽은 미국인의 수와 얼추 같다.(핀란드 인구는 미국의 1/60)’ 라든가 오늘날 노르딕 시스템은 현대 생활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시민에게 최대한 많은 물질적 경제적 독립을 제공하게끔 의도적으로 설계되었다.’면서 노르딕 사회는 최대한의 자율을 제공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개인적인 사회라고 주장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노르딕 사회가 유토피아는 아닐 것이다. 재작년 여행으로 다녀온 여름의 북유럽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유럽 여행 때마다 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그런데 이토록 아름다운 유럽에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겠는가?‘에 대한 답은 아니오이다. 그래도 북유럽의 복지 제도와 사람들의 삶의 철학 일부는 빌려다가 우리나라에 적용하고 싶은 갈망이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요즘 정책에 북유럽식 정책과 제도들이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정치인, 행정가들이 꽤 있는 것 같다.

 

특히 저자처럼 핀란드인으로 태어나고 자라 미국에서 결혼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북유럽의 장점들은 더더욱 도드라지게 보일 것 같다. 지구상에서 제일 잘 나가는 두 선진국, 미국 북유럽, 말로만의 비교가 아니라 살아본 사람의 경험에 직업적(저자는 저널리스트이다) 특성을 살린 취재, 즉 결이 다르지만 하여간 두 지점에서 접근한 팩트에 근거했으니 이보다 설득력 있는 비교보고서가 또 있을까 싶다. 이 책이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너무나 다른 두 선진국의 대비된 모습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경제력은 따라가지도 못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미국을 닮은 경제, 교육, 문화 형태를 지닌 우리나라이기에 더더욱 남 이야기 같지 않은 것이다.

 

 

출산과 육아, 보육과 교육에서 노르딕은 국가의 공적 책임이 강조되는, 마음껏 아이를 휴가를 받아 육아에 전념할 수 있으면서 치우치지 않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인생 목표 2/3, 즉 자신의 성장과 교육, 자식의 성장과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니 삶의 무게가 한껏 가벼워진다. 반면 미국은(한국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치열한 경쟁에 놓인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는 제도적 장치와 경쟁과 성취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가치관은 당연히 함께 가는 세트이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보육과 교육 현장마저 내내 경쟁가도를 달려야 하는 것이 미국과 한국의 현실이다.

 

핀란드에서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기 상자를 보내준다. 전국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보편교육의 복지는 확대되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수월성 제고라는 이름으로 영어 유치원, 초등 사립학교, 자사고나 특목고 등으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교육적 출발선 자체를 달리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있다. 겉으로는 보편교육을 말하지만 미국과 비슷하게 자유주의, 엄밀히 말하면 자본주의적 철학에 기반한, ‘사적 소유 존중하고 자유롭게 교육적 선택을 하라는 주의다. 자유를 존중하면 경쟁을 당연시하는데 근본적 불평등에 대한 개선의지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따져보니 미국과 우리는 참 많이 닮았다. 어린이집부터 차별은 시작된다. 적어도 중학교까지만이라도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하긴, 작년 사립유치원 보조금 전횡 파동이 있을 때, 절반 가까운 국민들은 사립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의 공립화을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개인의 자유, 사유재산 인정의 논리 때문이었고 많은 댓글이 우리나라가 공산주의냐, 모든 유치원교육과정을 공립화하게?’라는 논조를 유지했다.

 

나는 최근에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미드를 열심히 보고 있다. <프렌즈>를 넘어 <모던 패밀리>를 거의 다 보았는데 영어가 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많은 상념의 골목에 접어들게 된 것은 사실이다. 미국 중산층 가족 이야기인 <모던 패밀리>에는 취업과 해고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쉽지 않은 해고가 미국의 작은 규모 사업장에서 쉽게 거론되는 게 의아했다. 이 책에 의하면 미국은 고용도 해고도 비교적 유연한 것 같다. 여러 가지 면에서 못 가진 자들에게 불리한 사회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민중의 분노따위가 별로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미국 교육이 엉망이네 어쩌네 해도 racism에 대한 경계는 제법 뚜렷해 보이는데 합리적 교육이 행해지는 사회에서 노동인권이나 보편복지에 대해 어찌 그리 무지한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노르딕에서는 당연한 유급 출산 휴가나 휴직, 아빠 육아 등이 미국에서는 힘겨운 일이란다. 의료보장은 민간기업에 의존해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정작 혜택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단다. 그런 시스템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혜택을 받을 당사자들이 국가 의료보장의 필요에 대해 냉담하다는 것이다. 당연한 권리를 선택의 문제, 자유의 문제로 오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핀란드를 비롯한 노르딕 국가의 학생 학력 수준이 높고 그것은 교육복지가 뛰어난 점과 보편교육을 중시하는 교육철학이 원인일 것임은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다. 미국은 교육비가 많이 들고 그 모든 과정이 개인의 선택과 능력에 달려 있다. 취업과 경제적 부에 연관이 되니 당연히 좋은 대학 교육에 대한 선망이 높다. 재능의 차이에 환호하고 100%의 재능 차이가 낳은 10000%의 소득 격차를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고 멋지다, 당연하다,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환호한다. 그런 사회문화 때문에 사람들은 제도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똑똑한 수억의 사람들, 특히 학자들, 언론인이나 지성인들이 왜 그런 미국 제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걸까, 참 궁금하고 궁금하다.

 

핀란드도 1940년대 소련과의 전쟁 직후 미국 못지않은 교육불평등의 시대를 지나왔다. 대대적인 학교개혁으로 그것을 극복했단다. 사회적 혁명만큼 돌풍적이었을 것 같다. 우리 사회도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분단입시야말로 사회를 관통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 고리가 아닌가 싶은데 그 두 분야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른 분야의 소소한, 제도적인, 부분적인 개혁은 많은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핀란드처럼 모든 교육을 공립화할 수는 없을까? 적어도 교육비만큼은 보편복지를 실행할 수는 없을까? 교사교육의 수준을 높이고 그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면 안 될까? 하긴, 교육만 그리 하고 다른 분야를 자본주의의 자유로운(과연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손길에 놓아둔다면 경쟁과 성취의 욕구 때문에 교육의 균등성을 그대로 둘 리 없는 부자, 가진 자, 기득권자들이 힘을 행사할 것이 분명하므로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어서 가히 혁명적일 정도의 개혁이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어 내려면(게다가 분단의 문제(국방)까지- 삼파전이로다) 거의 건국을 해야 할 수준일 것이다.

 

미국 학교는 공적으로 예산 투입을 많이 하지도 않고 격차가 심하다. 게다가 자유경쟁이라는 기치 아래 시험을 치러 학교평가를 하고 그에 따라 예산을 차등지급한다. 시험에 들이는 비용이 매년 17억 달러란다. 차라리 그 돈을 가난한 학교에 투입하면 청소년 범죄 문제 및 국가적 학력저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은 그대로 교사에 대한 평가이자 학교에 대한 평가가 된다. 이 제도가 좋다고 본떠서 전국 학업성취도평가라는 것을 도입한 대통령도 있었다. 하지만 핀란드 등이 입증한 바, 학생과 학교를 경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결코 학력 신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정책 결정자와 학자들은 몰라서 그리 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엔 그들도 그 공과 과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다만 기득권자들에 유리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놓고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는 것이다. 네가 좋은 대학 못 가고 잘살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너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고 네가 경쟁에서 도태된 탓이다, 는 논리. 왜 노르딕처럼 탁월함이 아니 고르고 공평한 교육을 위해 천천히 함께 가기를 추구하면 안 되는 것일까?

 

핀란드 속담 중에 아이의 일은 노는 것이다.’ 라는 것이 있단다. 날씨가 참 좋았던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 거리에서 많은 노인들이 배낭을 메고 등산이나 산책을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 맑은 공기를 쐬며 일 년에 몇 안 되는 쾌적한 가을을 즐겨야 하는 사람은 어린이들, 청소년들 아닌가. 그런데 같은 시각 그들은 더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학원을 향하고 있었다. 슬픈 자화상이다..

 

한때는 우리나라 학교가 낙후되고 교육이 후진국적인 이유 중 하나를 국방비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오래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학교 예산이 풍부한 지금도 여전히 교육적인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걸 보면 당연히 예산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핀란드의 교육개혁이 시작되었을 1860~70년대는 경제적으로도 힘겨운 시기였다단다. 교장도 수업을 하고 행정비용을 줄이고 표준화된 전국단위 시험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는 등 지혜로운 교육 행정 으로 교육개혁을 단행했다. 다시, 문제는 철학인 것이다.

 

저자는 두 나라의 장점을 결합한 교육을 상상한다. 핀란드의 저렴하고 느슨한 탁아, 잘 훈련된 교사, 집에서 가까운 우수하고 균질한 학교, 무상 교육에 미국의 다양한 학생 구성, 학생들의 개성과 자주성 인정 교육, 체계적이고 고무적인 교육방식, 연극수업 및 과학 프로젝트 수업 및 토론 동아리 등등을 결합한.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식 교육을 70년 이상 해보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므로. 노르딕 방식을 도입하는 신선한 경험을 하기에도 우리는 근대적 관점에서 아직 신생국가에 가까우므로.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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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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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학>은 말 그대로 걷기에 대한 통찰의 문학작품이었다면 이 책은 소소한 일상과 책, 상념들을 담고 있다. 특히 왜 쓰는가라는, 작가들 누구나 스스로에게 무수히 던져보았을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들이 담겨 있다. 어머니 집에 돌봐줄 이가 없게 된 살구나무 열매들을 거두며, 그것을 잼으로 담그는 과정에 소소히 작가가 읽고 겪은 일들이 담긴다. <걷기의 인문학> 먼저 읽어 나에게는 위대하게만 느껴졌던 작가가 어머니 때문에 애면글면하고 독박부양에 억울해 하는 모습이 친근하다. 그 와중에도 정신적 중심을 잃지 않는 고고함(사실은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비슷한 모습을 정희진이나 은유에게서 본 적 있다. 작가라 하면 꽤나 우아할 것 같지만 생활은 누구에게나 누추하고 주름진 것, 게다가 이들처럼 최선을 다해 사는 이들은 먼지와 밥차리기를 벗어날 수 없었던 일상, 그럼에도 그 위에 피어나는 정신승리의 결과가 글쓰기였다. 나는 그들과 연대의 연장 선상에 나를 놓아본다. 이름을 얻고 아니고를 떠나 우리는 모두 치열하게 살아왔다. 손가락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책만 읽고 글만 쓴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아마도 글은 더욱 빛났나 보다. 그래서 더욱 나는 그들의 글에 마음이 꽂혔나 보다. 리베카 솔닛은 버릴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살구잼을 담그면서 깨닫는다. 내 앞에 놓인 두 개의 유리병은 받아 적은 이야기 같다. 두 유리병에는 그렇게 보관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것이 담겨 있다. 어떤 이야기는 사라지게 두는 편이 나았겠지만, 무언가를 적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 이야기를 그 모습 그대로, 설탕물에 담근 살구처럼 고정시키는 일이다. 일상은 곧 글의 필연과 닿는 비유가 된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가 한 말,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을 인용하면서 그이는 글쓰기가 왜 필요한지 설파한다.

글쓰기에 관하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할 이유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살아가기 위해. 폭력이나 무감각으로 누군가의 삶을 앗아가는 것을 정당화하고 삶의 실패를 변명하기 위해, 라고 말하고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기대로 가득한 고치처럼 술탄을 감싸고, 결국 그 안에서 그는 조금은 덜 잔혹한 사람이 되어 나옴으로써 문학의 사명을 다한다. 그러면서 서사가 없었더라면 희미해졌을 감정이 생생하게 유지되고, 과거에 있었던 일과 거의 관련이 없고 지금과는 더욱더 관련이 없는 감정이 서사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문학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도 언급한다. 즉 문학은, 이야기는, 서사는 인간사 안팎으로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임을 말한다. 내가 평생을 걸쳐 스스로에게 묻는 것, 왜 아이들에게 실용 이상의 문학을 가르쳐야만 하는 것일까, 글쓰기 따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문학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거냐고 묻는 사람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에 대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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