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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 북유럽 사회가 행복한 개인을 키우는 방법
아누 파르타넨 지음, 노태복 옮김 / 원더박스 / 2017년 6월
평점 :
우리는 미국식 삶의 형태를 베끼다시피 살고 있다. “왜 꼭 미국식이어야 해? 만약 베끼고 닮으려 애쓸 수밖에 없다면 다른 대안은 없는 거야?”라며 서유럽식 혹은 북유럽식을 들먹이면 기존의 ‘미국식’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은 유럽, 특히 북유럽식을 일종의 ‘사회주의’ 취급한다. 저자는 노르딕 국가들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힘써 증명하려 한다. ‘20세기에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와 맞서 목숨을 바쳤던 핀란드인의 수는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죽은 미국인의 수와 얼추 같다.(핀란드 인구는 미국의 1/60)’ 라든가 ‘오늘날 노르딕 시스템은 현대 생활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시민에게 최대한 많은 물질적 경제적 독립을 제공하게끔 의도적으로 설계되었다.’면서 노르딕 사회는 최대한의 자율을 제공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개인적인 사회라고 주장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노르딕 사회가 유토피아는 아닐 것이다. 재작년 여행으로 다녀온 여름의 북유럽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유럽 여행 때마다 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그런데 이토록 아름다운 유럽에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겠는가?‘에 대한 답은 ‘아니오’이다. 그래도 북유럽의 복지 제도와 사람들의 삶의 철학 일부는 빌려다가 우리나라에 적용하고 싶은 갈망이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요즘 정책에 북유럽식 정책과 제도들이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정치인, 행정가들이 꽤 있는 것 같다.
특히 저자처럼 핀란드인으로 태어나고 자라 미국에서 결혼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북유럽의 장점들은 더더욱 도드라지게 보일 것 같다. 지구상에서 제일 잘 나가는 두 선진국, 미국 북유럽, 말로만의 비교가 아니라 살아본 사람의 경험에 직업적(저자는 저널리스트이다) 특성을 살린 취재, 즉 결이 다르지만 하여간 두 지점에서 접근한 팩트에 근거했으니 이보다 설득력 있는 비교보고서가 또 있을까 싶다. 이 책이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너무나 다른 두 선진국의 대비된 모습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경제력은 따라가지도 못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미국을 닮은 경제, 교육, 문화 형태를 지닌 우리나라이기에 더더욱 남 이야기 같지 않은 것이다.
출산과 육아, 보육과 교육에서 노르딕은 국가의 공적 책임이 강조되는, 마음껏 아이를 휴가를 받아 육아에 전념할 수 있으면서 치우치지 않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인생 목표 2/3, 즉 자신의 성장과 교육, 자식의 성장과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니 삶의 무게가 한껏 가벼워진다. 반면 미국은(한국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치열한 경쟁에 놓인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는 제도적 장치와 경쟁과 성취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가치관은 당연히 함께 가는 세트이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보육과 교육 현장마저 내내 경쟁가도를 달려야 하는 것이 미국과 한국의 현실이다.
핀란드에서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기 상자’를 보내준다. 전국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보편교육의 복지는 확대되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수월성 제고’라는 이름으로 영어 유치원, 초등 사립학교, 자사고나 특목고 등으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교육적 출발선 자체를 달리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있다. 겉으로는 보편교육을 말하지만 미국과 비슷하게 자유주의, 엄밀히 말하면 자본주의적 철학에 기반한, ‘사적 소유 존중하고 자유롭게 교육적 선택을 하라’는 주의다. 자유를 존중하면 경쟁을 당연시하는데 근본적 불평등에 대한 개선의지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따져보니 미국과 우리는 참 많이 닮았다. 어린이집부터 차별은 시작된다. 적어도 중학교까지만이라도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하긴, 작년 사립유치원 보조금 전횡 파동이 있을 때, 절반 가까운 국민들은 ‘사립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의 공립화’을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개인의 자유, 사유재산 인정의 논리 때문이었고 많은 댓글이 ‘우리나라가 공산주의냐, 모든 유치원교육과정을 공립화하게?’라는 논조를 유지했다.
나는 최근에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미드’를 열심히 보고 있다. <프렌즈>를 넘어 <모던 패밀리>를 거의 다 보았는데 영어가 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많은 상념의 골목에 접어들게 된 것은 사실이다. 미국 중산층 가족 이야기인 <모던 패밀리>에는 취업과 해고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쉽지 않은 ‘해고’가 미국의 작은 규모 사업장에서 쉽게 거론되는 게 의아했다. 이 책에 의하면 미국은 고용도 해고도 비교적 유연한 것 같다. 여러 가지 면에서 못 가진 자들에게 불리한 사회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민중의 분노’ 따위가 별로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미국 교육이 엉망이네 어쩌네 해도 racism에 대한 경계는 제법 뚜렷해 보이는데 합리적 교육이 행해지는 사회에서 노동인권이나 보편복지에 대해 어찌 그리 무지한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노르딕에서는 당연한 유급 출산 휴가나 휴직, 아빠 육아 등이 미국에서는 힘겨운 일이란다. 의료보장은 민간기업에 의존해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정작 혜택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단다. 그런 시스템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혜택을 받을 당사자들이 국가 의료보장의 필요에 대해 냉담하다는 것이다. 당연한 권리를 선택의 문제, 자유의 문제로 오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핀란드를 비롯한 노르딕 국가의 학생 학력 수준이 높고 그것은 교육복지가 뛰어난 점과 보편교육을 중시하는 교육철학이 원인일 것임은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다. 미국은 교육비가 많이 들고 그 모든 과정이 개인의 선택과 능력에 달려 있다. 취업과 경제적 부에 연관이 되니 당연히 좋은 대학 교육에 대한 선망이 높다. 재능의 차이에 환호하고 100%의 재능 차이가 낳은 10000%의 소득 격차를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고 ‘멋지다, 당연하다,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환호한다. 그런 사회문화 때문에 사람들은 제도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똑똑한 수억의 사람들, 특히 학자들, 언론인이나 지성인들이 왜 그런 미국 제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걸까, 참 궁금하고 궁금하다.
핀란드도 1940년대 소련과의 전쟁 직후 미국 못지않은 교육불평등의 시대를 지나왔다. 대대적인 학교개혁으로 그것을 극복했단다. 사회적 혁명만큼 돌풍적이었을 것 같다. 우리 사회도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분단’과 ‘입시’야말로 사회를 관통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 고리가 아닌가 싶은데 그 두 분야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른 분야의 소소한, 제도적인, 부분적인 개혁은 많은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핀란드처럼 모든 교육을 공립화할 수는 없을까? 적어도 교육비만큼은 보편복지를 실행할 수는 없을까? 교사교육의 수준을 높이고 그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면 안 될까? 하긴, 교육만 그리 하고 다른 분야를 자본주의의 자유로운(과연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손길에 놓아둔다면 경쟁과 성취의 욕구 때문에 교육의 균등성을 그대로 둘 리 없는 ‘부자, 가진 자, 기득권자’들이 힘을 행사할 것이 분명하므로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어서 가히 혁명적일 정도의 개혁이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어 내려면(게다가 분단의 문제(국방)까지- 삼파전이로다) 거의 건국을 해야 할 수준일 것이다.
미국 학교는 공적으로 예산 투입을 많이 하지도 않고 격차가 심하다. 게다가 ‘자유경쟁’이라는 기치 아래 시험을 치러 학교평가를 하고 그에 따라 예산을 차등지급한다. 시험에 들이는 비용이 매년 17억 달러란다. 차라리 그 돈을 가난한 학교에 투입하면 청소년 범죄 문제 및 국가적 학력저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은 그대로 교사에 대한 평가이자 학교에 대한 평가가 된다. 이 제도가 좋다고 본떠서 ‘전국 학업성취도평가’라는 것을 도입한 대통령도 있었다. 하지만 핀란드 등이 입증한 바, 학생과 학교를 경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결코 학력 신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정책 결정자와 학자들은 몰라서 그리 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엔 그들도 그 공과 과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다만 기득권자들에 유리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놓고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는 것이다. 네가 좋은 대학 못 가고 잘살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너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고 네가 경쟁에서 도태된 탓이다, 는 논리. 왜 노르딕처럼 ‘탁월함’이 아니 고르고 공평한 교육을 위해 ‘천천히 함께 가기’를 추구하면 안 되는 것일까?
핀란드 속담 중에 ‘아이의 일은 노는 것이다.’ 라는 것이 있단다. 날씨가 참 좋았던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 거리에서 많은 노인들이 배낭을 메고 등산이나 산책을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 맑은 공기를 쐬며 일 년에 몇 안 되는 쾌적한 가을을 즐겨야 하는 사람은 어린이들, 청소년들 아닌가. 그런데 같은 시각 그들은 더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학원을 향하고 있었다. 슬픈 자화상이다..
한때는 우리나라 학교가 낙후되고 교육이 후진국적인 이유 중 하나를 ‘국방비’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오래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학교 예산이 풍부한 지금도 여전히 교육적인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걸 보면 당연히 예산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핀란드의 교육개혁이 시작되었을 1860~70년대는 경제적으로도 힘겨운 시기였다단다. 교장도 수업을 하고 행정비용을 줄이고 표준화된 전국단위 시험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는 등 지혜로운 교육 행정 으로 교육개혁을 단행했다. 다시, 문제는 철학인 것이다.
저자는 두 나라의 장점을 결합한 교육을 상상한다. 핀란드의 저렴하고 느슨한 탁아, 잘 훈련된 교사, 집에서 가까운 우수하고 균질한 학교, 무상 교육에 미국의 다양한 학생 구성, 학생들의 개성과 자주성 인정 교육, 체계적이고 고무적인 교육방식, 연극수업 및 과학 프로젝트 수업 및 토론 동아리 등등을 결합한.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식 교육을 70년 이상 해보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므로. 노르딕 방식을 도입하는 신선한 경험을 하기에도 우리는 근대적 관점에서 아직 신생국가에 가까우므로. 늦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