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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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박학다식이 죄는 아니잖아?’하는 말이 자꾸 머리에 맴돈다. 나는 수업을 위해서도, 나의 흥미를 위해서도 박학다식의 욕구를 채워주는 책들을 좋아한다. 이 책은 중학생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쉬운 문체로 쓰였을 뿐 아니라 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식재료 식물과 중학교 수준의 영양소 이야기나 역사 이야기(어쩌면 약간 야사가 아닐까 싶은 에피소드들도 나온다)로 구성돼 있다.

 

감자나 옥수수의 역사는 흥미로웠다. 식물은 인간에게 먹히지만 가축처럼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이 길들인 것이 아니라 그 식물들이 인간을 길들인 것일 수도 있다는 시각도 흥미롭다. 세상에는 너무나 맛있는 식재료 식물이 넘쳐난다. 특히 잎채소를 좋아하는 나는 자연이 준 풍요에 대해 진심으로 경이감을 느낄 때가 많다. 이 책은 그런 식물들이 어떻게 인간과 어우러지고 싸우고 버티고 여기까지 왔는지 보여준다. 때로는 악마의 식물 취급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굶주림과 싸우는 인간 곁을 지키고 때로는 사악한 자본의 현현으로, 때로는 구휼의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해온 벼, , 옥수수, 토마토, 감자 들, 그리고 남편이 너무나 사랑하는 고추와 콩(두부) 이야기가 흥미롭게 담겨 있다.

 

나무는 지각 변동으로 기후가 달라지자 오히려 풀로 진화했다는 내용에 무릎을 친다. 경쟁과 성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커지고 우뚝해지고 많아지는 것만이 진화가 아니란 이야기다. 더 작고 여리게, 쪼개지고 부서지고 낮아지는 어떤 존재야말로 가장 진보적이고 진화적인 것 일 수도 있다. 벼 한 톨이 1000배로 성장하는 것도, 식물과 식물이 어우러지는 것도 라피도포라처럼 공생을 위해 모습이 달라지는 것도 혼자만 잘 살려는 성취의 단계에서 이룬 일들이 아니다. 때로는 그저 살아남는 것, 때로는 자기를 죽이고 다른 존재를 살리는 것, 때로는 지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오히려 진정한 진화라는 것이다. 세상을 좋고 나쁨, 이기고 짐, 성공과 실패로 나눌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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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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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을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플래그(작은 테이프)를 붙여놓는다. 다 읽으면 그 대목을 다시 읽으며 노트북에 옮긴다. 그리고 서평을 쓸 때 다시 한 번 오타도 정리하고 내용을 묶기도 하면서 그것을 정리한 후 두 개로 복사하여 하나는 서평을 쓸 때 활용한다. 방금 전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서평을 쓰기 위해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서 분명 지금 세 번째 보는 내용인데 이토록 새롭다는 것에 살짝 절망하고 있다(, 그런 내용이 있었지, 하고 떠오르기만 하지 어느 순간 언어나 문장으로 저절로 나올 만큼 기억하지 못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서). 아무리 내가 책 읽는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이라지만 때로는 어딘가에 써먹어야 하는내용조차 그러면 어쩐다... 이렇게 노력이나 들인 공에 비해 성과가 적은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온 내 자신에 살짝 연민을 느끼면서.

 

이 책 서문에 저자가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철학에 대해 가르친다.’라고 쓴 말을 변주하면 이 책도 오늘날의 많은 철학책이 그러하듯 철학을 논하지 않고 철학자와 철학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철학책을 읽을 시간과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살이 잘 발라진 접시를 내놓는 격이다. 그런 책은 전에도 세상에 많았다. 다만 에릭 와이어의 보통 사람같은 말투와 태도 때문에 위화감 없이 읽힌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철학자나 철학과 교수가 쓴 입문용 철학책들의 요점정리식 철학책과는 뭔가 다르다고나 할까.

 

사실 서문을 읽으면서 그 툭툭 던지는 듯한 미국식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읽지 않으려고 한동안 구석에 처박아두었다. 그러다가 에이, 그래도 대충 한 번 훑어는 봐야지,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첫 장에 만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 다루는 철학자들은 공통점이 있다. 삶의 태도랄까,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서의 철학, 그 자신의 약함을 감추지 않은 철학. 세상 모든 예술과 철학과 학문이 다 작가의 삶에서부터 오지 않은 것이야 없겠지만 특히 이 책의 저자가 선택한 철학자들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왕이었지만 연민과 긍휼, 바른 사람의 모범을 보이며 살았던 아우렐리우스도, 사회 변혁에 앞장섰던 간디나 시몬 베유도, 세속의 가치가 아닌 가치를 추구하며 살 수 있다고 보여준 소로도, 가장 낮은 곳, 가장 고통받는 인간으로 살며 자기 고통을 찍어 철학을 논했던 쇼펜하우어나 에피쿠로스도, 그리고 허허실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흘끗, 어깨 너머 쓱 쳐다보고 떠난 소크라테스, 그 자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유 속에서 철학을 구현했던 몽테뉴나 가장 아픈 사람이면서 삶을 무겁게도 우습게도 들었다 놨다 관조하던 니체도 다 그런 사람들 아닌가.

 

이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나, 아니면 어디선가 들은 말이었나, 결국 철학자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 철학을 한다는 말. 이 책이 관통하고 있는 죽음과 노화에 대한 사유가 이 책의 주제가 아닌 모든 철학의 궁극적인 주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늘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이가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 꼭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내 머리와 마음에서 죽음이라는 화두가 떠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도 나쁜 일도 아니라는 위안이 든다.

 

저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은 타고난 비관주의를 억누르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이라 평했다. 아우렐리우스는 고귀한 인간이었지만 사실은 비관주의자였다. 그럼에도 약자에게 관대하고 늘 자신의 품격있게 행동했는지 돌아보려 애쓴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품성을 지닌 뛰어난 사람을 보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극히 드물지만,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얼마나 따뜻해지는가.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고 말했단다. 너무나 공감하는 바이다. ‘행복하다라는 말은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자기 평가일 것이다. 어떤 이는 즐거워서 행복하고 어떤 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행복하며 어떤 이는 뭔가를 도모할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적당한 슬픔이나 외로움이 있어야만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저 유형은 다 다르겠지만 저마다의 즐김, 몰입이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줄지언정 행복의 조건을 규정하기란 힘든 일이지 싶다.

 

이 책을 통해 시몬 베유의 존재를 알게 된 것에 기쁨을 느꼈다. 저자는 그이의 몰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깊이 몰입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몰입할 자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라고 쓴다. 공감. 베유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꼈다고 한다. 베유처럼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자기 고통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내 살과 영혼 속을 파고 들어온다.’고 했다니. 뉴스를 보는 일, 학교에서 아픈 사연을 가진 학생들 이야기에 공감하는 일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베유는 그런 일반적인 공감의 차원을 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지에 가까이 가는 이만이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약자와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은 진정으로 공감능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베유처럼 아프도록 실천하는 이로 살기는 어렵다. 게으르고 이기적인 삶을 추구하는 나는 다만 내 고통을 어떻게 들여다볼까, 라는 과제만으로도 벅차다. 니체처럼 저녁 7시에서 9시 사이에는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어 보고 싶다.

그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원회귀라는 개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작가의 말대로 그것을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준으로 삼으며 이 소소한 삶의 어설픈 오류들을 짚어보고 나는 지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돌아보련다.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니체가 한 말, ‘고통은 청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답해야 하는 부름이다.’을 떠올려 보련다. 그는 정작 신이 죽었다고 외쳤지만(그걸 깨달았을 때 그는 분명 몹시 괴로웠을 거다) 고통이 부름이라면 그 부름을 던진 존재는 누구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 우주적 질문은 무신론자인 내게 오히려 다시 종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먼 우주를 바라보며 초거시적 안목으로 세상을 살다간 칼 세이건처럼 거대하고 허무한 이 생과 여기서 겪었던 고통에 대해 피식 한 번 웃어주며 삶을 마칠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

 

저자는 결국 자신이 스토아 철학자임을, 혹은 그런 지향을 지니고 있음을 밝힌 것 같다. 쉽게 말하면 현실을 즐기라고 말하는 것도 같다. 자본주의적 욕망이 아닌 유연한 삶의 태도와 여유로.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저자의 정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 30대에 저 말을 접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위안을 받았다. 내 고통의 많은 부분은 뭔가를 바라고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그런데 그러기도 싫고 그러기도 힘들다는 마음의 투정 그 둘 사이의 갈등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카잔차키스의 말은, 그 태도는 나를 얼마나 가볍게 했던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생명이란 없겠지만 그나마 무심한 듯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의 오연한 매력은 늘 세속적 욕심에 목매지 않을 때 나오더라.

 

몽테뉴 왈,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현재가 아니며, 죽음이 현재일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몽테뉴 왈, ‘오늘과 다른 빛도, 오늘과 다른 밤도 없다. 저 태양과 저 달, 저 별, 저들이 뜨고 지는 방식,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조상이 즐겼던 것과 똑같으며, 똑같은 것이 우리의 후손을 즐겁게 할 것이다.’ 이 얼마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말인가?

그렇다면 정녕 철학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에서 비롯된 학문이 맞는 것 같다.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레너드 코헨의 음악을 찾아 들었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구입했다. 그리고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이 대목에 격하게 공감하며 쇼펜하우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물론 나는 나의 얕은 지식을 지혜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그저 데이터, 그저 지식에 불과한 것들도 삶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것들을 모으고 잘 운용하다보면 지혜로운 인간으로 되어갈 수도있으리라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보긴 한다. 내가 나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면 철학을 읽는 보람이 있는 게 아닐까? 아니, ‘철학에 관한 책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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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 - 최승자의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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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의 60여 년 인생 중 어쩌면 가장 활발하고 빛나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작가 회의에 초청받아 가서 석 달 넘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날들을 일기장에 적었다. 나중에야 노트북에 적었겠지만 처음에는 수기로. 그게 1994년이란다. 1994. 강원도에서 근무하던 사립학교를 그만두고 아기와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새로운 직장에 다니며 생애 가장 힘든 나날을 보내던 나는 그 무렵을 최승자의 시들로 버텼더랬다. 나와 함께 나달나달해진 최승자의 시집 속 시들은 당연히 그이가 아이오와에 가기 전 피눈물 흘리듯 쓰던 시들이었겠지. 그이가 시를 쓸 나이와 비슷한 나이를 지나고 있던 나 역시 삶의 피눈물을 흘리며 그이의 시를 읽었던 것이다. 그렇게, 단 한 번 면식도 없는 그의 삶과 나의 삶을 이어본다.

 

일기가 뭐 재미있을까 싶었다. 그저 사랑하는 시인의 사생활이 궁금했을 뿐이고, 그 안에 시를 쓴 과정이나 심정 이야기를 좀 담았으려나 싶었던 게다. 그런데 참 재미있게 읽었다. 미주알고주알 재미난 문체로 구체적이고 서사적으로 드라마틱하게... 이야기를 엮는 이가 아니다, 최승자는. 그저 오늘은 어디서 리딩이 있었고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서 이웃 작가들을 초대해 먹였고, 이런 소소한 나날들의 기록일 뿐이다. 그리고 시인은 파티를 즐기는 이도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이도 아니기에 꼭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나 세미나 같은 거에나 나가고 관광도 거의 하지 않고, 그래서 특별한 사건도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그이가 룸메이트 쇼나와 교감을 나누고 결국 그를 신뢰하게 되는 과정, 특이하고 진중한 마틴과 어쩌면 영적인 끌림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은 그 사귐에 설레며 책을 읽었다.

 

사실 이 책 이전에 최근에 나온 <어느 게으른 시인 이야기>를 먼저 읽었다. 그 책 말미에 아이오와 작가 회의가 끝날 무렵 신비주의에 천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나무들은>에서도 미국에서 좋아하는 책을 많이 사 모으는 가운데 점성술 관련 책에 흥미를 보이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시인은 영혼이 맑고 직관이 뛰어나다 보니 아마도 그 맑은 기운으로 영빨을 경험했을 것이다. 칼 융 역시 그런 경험을 많이 했고 그런 측면을 분석심리학에 잘 활용했다 하는데 세상에 과학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영역에 심리학이나 시, 예술이 다가간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고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칫 그 경계가 애매하면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실제로 최승자는 이 이후 정신적으로 한동안 앓았다 한다. 그게 그 무렵 빠져들던 신비주의의 문제이기만 할까 싶기는 하다. 그의 기질은 언제라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그래서 시가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고 그 아주 얇은 경계에서 그는 늘 아슬아슬한 사람이었을 터이니.

 

하지만 그에게 이제는 세속적인 건강과 맛있는 밥, 따뜻한 사람과의 기댐, 소위 행복이라고 부르는 그 무언가가 다가가면 좋겠다. 평생 외로웠다 해도 노년은 더 이상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령 더 이상 내 젊은 날에 나와 함께 피흘려주던 그런 시,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의 책 세일즈 포인트가 높은 걸 보면서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십수 년의 침잠을 마치고 복간이든 어쨌든 다시 책이 나오고 주목을 받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의 시를 사랑했는지 고백을 들으며 그이가 조금은 덜 외롭겠다 싶어 기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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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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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스카웃은 씩씩한 여자아이다. 오빠인 젬과 함께 변호사로서 흑인 톰의 사건을 변호하는 아버지를 지켜본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19세기 말 미국, 보수적이고 고즈넉한, 그저 그들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적당히 선량하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한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인종차별 사건을 다룬다. 주제의 묵직함에 다가가기 전까지 나는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기분으로 책을 즐길 수 있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 시절만의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정서가 있다. 생활은 자연과 가깝고 사람들은 완고하면서도 인간적이던.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큰 줄기는 흑인 톰 브라운의 백인 소녀에 대한 강간 사건을 다루는 법정의 치열한 공방이다. 그것을 스카웃과 젬의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게 참 독특하다. 왜 아이들 시선으로 사건을 보게 했을까. 톰은 무조건 흑인을 죄악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억울하게 감옥으로 가야 했지만 시대적 편견이 아니더라도 사건이 가지고 있는 복잡함 때문에도 발목을 잡힌다. 어떤 사회적 명분이나 욕심의 렌즈를 끼지 않고 그 사건을 보려면 어린아이의 시선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한편은,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이기에 더더욱 올바른 가치를 마음에 담으라는 작가의 뜻이기도 할 터이다.

 

이 책이 미국 학교의 필독서 중 하나라고 들었다. 만만치 않은 분량을 읽어내면서 미국 청소년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두 아이의 아버지, 변호사 애티커스의 언행과 철학은 어쩌면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페르소나로 삼고 싶은 모습이 아닐까. 점잖고 지적이면서도 강인한, 강하지만 자신의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정의롭고 멋진 백인 남자. 그리고 그 슬하에서 바르게 커나가는 두 아이들의 위상 역시 미국적 지향이 담겨있다.

이 소설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면서 미국아이들은 어떻게 커나갈까. 안으로는 인종차별이 극심하다고는 하나 적어도 그런 언행이 나쁘다는 것을 닳도록 듣고 배우며 크겠지. 정의와 공정에 대해 고민하고 논쟁하겠지. 우리에게는 어떤 소설이 <앵무새 죽이기>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좋은 작품이 많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 교육과 토론에 적합한 장대한 작품이 있을까 싶다. 아무리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역사가 채 100년이 안 된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문학적 자산이, 특히 청소년에게 읽힐 문학적 자산이 너무 적은 건 아닌지 씁쓸한 마음이 든다.

  

애티커스가 아이들에게 한 말 중 이런 것이 있다. “무지개 색깔 중 어떤 피부색을 하고 있건 한 인간이 평등하게 대접받을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있다면 거긴 바로 법정일 거야.” 법조인이라면 저런 자부심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법이란 것도 완전무결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일반인에게 저런 최소한의 신뢰는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앵무새 죽이기>는 책의 문학적 가치와 상관없이 나를 여러모로 착잡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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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의 고양이 : 상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서현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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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의 고양이>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야기이다. 책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지만 작가의 그림체가 프랑스풍이라서 유학파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루브르 미술관의 공간 구조와 그곳의 그림들에 대해서까지 잘 알고 있는 걸 보면 깊이 경험하지 않고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싶다.

 

미술관 어딘가에 고양이들이 산다. 그들 중 신비로운 녀석이 하나 있다. 그림들 중에는 존재가 드나들 수 있는 그림이 있다. 그림 속으로 사라진 소녀가 있다... 이런 조각들 하나하나도 흥미롭고 아름답지만 그 조각들을 이어 맞춰 개연성을 준 작가의 능력도 놀랍다. 이야기도 놀랍지만 그림도 독특하고 아름답다. 그저 만화라고만 부르기엔 아깝다. ‘작품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그림 속을 들락날락하는 존재의 이야기는 동양적이다. 물론 서양에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처럼 그림에 영성을 부여한 작품이 없는 건 아니다. 판타지적인 스토리지만 <모나리자>의 초상을 도둑맞았다 되찾은 전력이 있는 미술관이라면, 현실 세계와 헷갈릴 만큼 정교한 그림들이 저렇게 많은 장소라면, 수많은 사연과 혼을 갈아넣은 듯한 작품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면 그 그림들 중 하나쯤 살아있는 세상이 있을 법도 하지 않을까? 가장 혼이 맑은 어린 소녀라며, 먼 나라에서 온 것 같은 어린 고양이라면 그 세상을 넘나들 법한 일 아닌가? 소녀와 고양이가 그 그림 속 세계에서 뛰어노는 장면은 범우주적이고 초월적이다. 시간을 괘념치 않는 순정한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교향곡 4악장 말미, 이제 이 음악은 곧 끝이 날 것을 관객들 모두 안다. 감정이 최고조로 이르고 모든 악기가 총동원되어 가장 격정적인 음률을 만들어 낸다. 감동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때 이성이 살짝 묻는다. 언제 어떻게 끝나지? 어떻게 이 감동을 흐지부지도 아니고 뚝 떨어지는 허무감도 아니면서 아쉽지 않게 맺으며 억눌렀던 박수를 터뜨리게 하려나? 멋진 교향곡은 저 질문에 항상 아쉬움 없이 답을 해준다.

눈물이 핑 돌 것처럼 아름다운 클라이맥스의 장면을 보면서 도대체 작가는 이 무지막지한 상상을 어떻게 현실로 당겨올 것인가 궁금했다. 작가는 교향곡처럼 그걸 멋지게 해낸다. 어쨌든 현실의 시계를 흘러가는 거니까. 떠난 이는 떠난 거고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

 

내가 이 책을 깊이 읽은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이번 겨울, 하루 서너 장씩 그림을 그렸다. 그림 그리기를 언젠가 할 일로 미루다가 본격적으로 집중적으로 해낸 두 달 동안 정말 많은 그림을 그렸다. 주로 원근법과 정교한 드로잉 연습이었지만 이 그림 연습은 언젠가 여행 스케치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나만의 그림 동화나 에세이를 쓰게 할 수도 있다. 희망사항일 때는 즐길 수 있고 그게 목표가 되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지금은 그저 하루 서너 시간, 음악을 듣거나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그림에 몰두하는 시간들이 행복할 뿐이다. 잠들기 전에는 엎드려 <루브르의 고양이>의 한 컷 한 컷들을 작은 스케치에 따라 그려본다. 0.5mm의 가는 펜으로 고양이들을 그리고 세실의 안경 속 속눈썹을 그린다. 루브르 지붕 너머 파리의 숲을 그려본다. 따라그리기는 좋은 공부가 되기에 핀터레스트에서 찾아낸 그림들로 원근법 연습을 하고 거리 스케치를 하면서 좋아하는 선을 만들어간다. 당연히 그림 실력도 늘었지만 잘 못 그려도 상관없다. 그리는 동안 행복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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