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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평점 :
책 읽을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플래그(작은 테이프)를 붙여놓는다. 다 읽으면 그 대목을 다시 읽으며 노트북에 옮긴다. 그리고 서평을 쓸 때 다시 한 번 오타도 정리하고 내용을 묶기도 하면서 그것을 정리한 후 두 개로 복사하여 하나는 서평을 쓸 때 활용한다. 방금 전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서평을 쓰기 위해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서 분명 지금 세 번째 보는 내용인데 이토록 새롭다는 것에 살짝 절망하고 있다(아, 그런 내용이 있었지, 하고 떠오르기만 하지 어느 순간 언어나 문장으로 저절로 나올 만큼 기억하지 못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서). 아무리 내가 책 읽는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이라지만 때로는 어딘가에 ‘써먹어야 하는’ 내용조차 그러면 어쩐다... 이렇게 노력이나 들인 공에 비해 성과가 적은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온 내 자신에 살짝 연민을 느끼면서.
이 책 서문에 저자가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철학에 대해 가르친다.’라고 쓴 말을 변주하면 이 책도 ‘오늘날의 많은 철학책이 그러하듯 철학을 논하지 않고 철학자와 철학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철학책을 읽을 시간과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살이 잘 발라진 접시를 내놓는 격이다. 그런 책은 전에도 세상에 많았다. 다만 에릭 와이어의 ‘보통 사람’같은 말투와 태도 때문에 위화감 없이 읽힌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철학자나 철학과 교수가 쓴 입문용 철학책들의 요점정리식 철학책과는 뭔가 다르다고나 할까.
사실 서문을 읽으면서 그 툭툭 던지는 듯한 미국식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읽지 않으려고 한동안 구석에 처박아두었다. 그러다가 에이, 그래도 대충 한 번 훑어는 봐야지,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첫 장에 만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 다루는 철학자들은 공통점이 있다. 삶의 태도랄까,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서의 철학, 그 자신의 약함을 감추지 않은 철학. 세상 모든 예술과 철학과 학문이 다 작가의 삶에서부터 오지 않은 것이야 없겠지만 특히 이 책의 저자가 선택한 철학자들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왕이었지만 연민과 긍휼, 바른 사람의 모범을 보이며 살았던 아우렐리우스도, 사회 변혁에 앞장섰던 간디나 시몬 베유도, 세속의 가치가 아닌 가치를 추구하며 살 수 있다고 보여준 소로도, 가장 낮은 곳, 가장 고통받는 인간으로 살며 자기 고통을 찍어 철학을 논했던 쇼펜하우어나 에피쿠로스도, 그리고 허허실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흘끗, 어깨 너머 쓱 쳐다보고 떠난 소크라테스, 그 자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유 속에서 철학을 구현했던 몽테뉴나 가장 아픈 사람이면서 삶을 무겁게도 우습게도 들었다 놨다 관조하던 니체도 다 그런 사람들 아닌가.
이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나, 아니면 어디선가 들은 말이었나, 결국 철학자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 철학을 한다는 말. 이 책이 관통하고 있는 죽음과 노화에 대한 사유가 이 책의 주제가 아닌 모든 철학의 궁극적인 주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늘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이가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 꼭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내 머리와 마음에서 죽음이라는 화두가 떠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도 나쁜 일도 아니라는 위안이 든다.
저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은 “타고난 비관주의를 억누르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이라 평했다. 아우렐리우스는 고귀한 인간이었지만 사실은 비관주의자였다. 그럼에도 약자에게 관대하고 늘 자신의 품격있게 행동했는지 돌아보려 애쓴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품성을 지닌 뛰어난 사람을 보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극히 드물지만,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얼마나 따뜻해지는가.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고 말했단다. 너무나 공감하는 바이다. ‘행복하다’라는 말은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자기 평가일 것이다. 어떤 이는 즐거워서 행복하고 어떤 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행복하며 어떤 이는 뭔가를 도모할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적당한 슬픔이나 외로움이 있어야만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저 유형은 다 다르겠지만 저마다의 즐김, 몰입이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줄지언정 행복의 ‘조건’을 규정하기란 힘든 일이지 싶다.
이 책을 통해 시몬 베유의 존재를 알게 된 것에 기쁨을 느꼈다. 저자는 그이의 ‘몰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깊이 몰입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몰입할 자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라고 쓴다. 공감. 베유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꼈다고 한다. 베유처럼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자기 고통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내 살과 영혼 속을 파고 들어온다.’고 했다니. 뉴스를 보는 일, 학교에서 아픈 사연을 가진 학생들 이야기에 공감하는 일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베유는 그런 일반적인 공감의 차원을 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지에 가까이 가는 이만이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약자와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은 진정으로 공감능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베유처럼 아프도록 실천하는 이로 살기는 어렵다. 게으르고 이기적인 삶을 추구하는 나는 다만 내 고통을 어떻게 들여다볼까, 라는 과제만으로도 벅차다. 니체처럼 ‘저녁 7시에서 9시 사이에는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어 보고 싶다.
그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원회귀’라는 개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작가의 말대로 그것을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준으로 삼으며 이 소소한 삶의 어설픈 오류들을 짚어보고 나는 지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돌아보련다.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니체가 한 말, ‘고통은 청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답해야 하는 부름이다.’을 떠올려 보련다. 그는 정작 신이 죽었다고 외쳤지만(그걸 깨달았을 때 그는 분명 몹시 괴로웠을 거다) 고통이 부름이라면 그 부름을 던진 존재는 누구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 우주적 질문은 무신론자인 내게 오히려 다시 종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먼 우주를 바라보며 초거시적 안목으로 세상을 살다간 칼 세이건처럼 거대하고 허무한 이 생과 여기서 겪었던 고통에 대해 피식 한 번 웃어주며 삶을 마칠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
저자는 결국 자신이 스토아 철학자임을, 혹은 그런 지향을 지니고 있음을 밝힌 것 같다. 쉽게 말하면 현실을 즐기라고 말하는 것도 같다. 자본주의적 욕망이 아닌 유연한 삶의 태도와 여유로.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저자의 정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 30대에 저 말을 접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위안을 받았다. 내 고통의 많은 부분은 뭔가를 바라고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그런데 그러기도 싫고 그러기도 힘들다는 마음의 투정 그 둘 사이의 갈등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카잔차키스의 말은, 그 태도는 나를 얼마나 가볍게 했던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생명이란 없겠지만 그나마 무심한 듯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의 오연한 매력은 늘 세속적 욕심에 목매지 않을 때 나오더라.
몽테뉴 왈,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현재가 아니며, 죽음이 현재일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몽테뉴 왈, ‘오늘과 다른 빛도, 오늘과 다른 밤도 없다. 저 태양과 저 달, 저 별, 저들이 뜨고 지는 방식,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조상이 즐겼던 것과 똑같으며, 똑같은 것이 우리의 후손을 즐겁게 할 것이다.’ 이 얼마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말인가?
그렇다면 정녕 철학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에서 비롯된 학문이 맞는 것 같다.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레너드 코헨의 음악을 찾아 들었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구입했다. 그리고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이 대목에 격하게 공감하며 쇼펜하우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물론 나는 나의 얕은 지식을 지혜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그저 데이터, 그저 지식에 불과한 것들도 삶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것들을 모으고 잘 운용하다보면 지혜로운 인간으로 ‘되어갈 수도’ 있으리라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보긴 한다. 내가 나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면 철학을 읽는 보람이 있는 게 아닐까? 아니, ‘철학에 관한 책’이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