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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평점 :
주인공인 스카웃은 씩씩한 여자아이다. 오빠인 젬과 함께 변호사로서 흑인 톰의 사건을 변호하는 아버지를 지켜본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19세기 말 미국, 보수적이고 고즈넉한, 그저 그들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적당히 선량하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한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인종차별 사건을 다룬다. 주제의 묵직함에 다가가기 전까지 나는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기분으로 책을 즐길 수 있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 시절만의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정서가 있다. 생활은 자연과 가깝고 사람들은 완고하면서도 인간적이던.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큰 줄기는 흑인 톰 브라운의 백인 소녀에 대한 강간 사건을 다루는 법정의 치열한 공방이다. 그것을 스카웃과 젬의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게 참 독특하다. 왜 아이들 시선으로 사건을 보게 했을까. 톰은 무조건 흑인을 죄악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억울하게 감옥으로 가야 했지만 시대적 편견이 아니더라도 사건이 가지고 있는 복잡함 때문에도 발목을 잡힌다. 어떤 사회적 명분이나 욕심의 렌즈를 끼지 않고 그 사건을 보려면 어린아이의 시선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한편은,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이기에 더더욱 올바른 가치를 마음에 담으라는 작가의 뜻이기도 할 터이다.
이 책이 미국 학교의 필독서 중 하나라고 들었다. 만만치 않은 분량을 읽어내면서 미국 청소년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두 아이의 아버지, 변호사 애티커스의 언행과 철학은 어쩌면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페르소나로 삼고 싶은 모습이 아닐까. 점잖고 지적이면서도 강인한, 강하지만 자신의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정의롭고 멋진 백인 남자. 그리고 그 슬하에서 바르게 커나가는 두 아이들의 위상 역시 미국적 ‘지향’이 담겨있다.
이 소설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면서 미국아이들은 어떻게 커나갈까. 안으로는 인종차별이 극심하다고는 하나 적어도 그런 언행이 나쁘다는 것을 닳도록 듣고 배우며 크겠지. 정의와 공정에 대해 고민하고 논쟁하겠지. 우리에게는 어떤 소설이 <앵무새 죽이기>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좋은 작품이 많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 교육과 토론에 적합한 장대한 작품이 있을까 싶다. 아무리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역사가 채 100년이 안 된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문학적 자산이, 특히 청소년에게 읽힐 문학적 자산이 너무 적은 건 아닌지 씁쓸한 마음이 든다.
애티커스가 아이들에게 한 말 중 이런 것이 있다. “무지개 색깔 중 어떤 피부색을 하고 있건 한 인간이 평등하게 대접받을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있다면 거긴 바로 법정일 거야.” 법조인이라면 저런 자부심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법이란 것도 완전무결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일반인에게 저런 최소한의 신뢰는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앵무새 죽이기>는 책의 문학적 가치와 상관없이 나를 여러모로 착잡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