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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 - 최승자의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2월
평점 :
최승자의 60여 년 인생 중 어쩌면 가장 활발하고 빛나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작가 회의에 초청받아 가서 석 달 넘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날들을 일기장에 적었다. 나중에야 노트북에 적었겠지만 처음에는 수기로. 그게 1994년이란다. 1994년. 강원도에서 근무하던 사립학교를 그만두고 아기와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새로운 직장에 다니며 생애 가장 힘든 나날을 보내던 나는 그 무렵을 최승자의 시들로 버텼더랬다. 나와 함께 나달나달해진 최승자의 시집 속 시들은 당연히 그이가 아이오와에 가기 전 피눈물 흘리듯 쓰던 시들이었겠지. 그이가 시를 쓸 나이와 비슷한 나이를 지나고 있던 나 역시 삶의 피눈물을 흘리며 그이의 시를 읽었던 것이다. 그렇게, 단 한 번 면식도 없는 그의 삶과 나의 삶을 이어본다.
일기가 뭐 재미있을까 싶었다. 그저 사랑하는 시인의 사생활이 궁금했을 뿐이고, 그 안에 시를 쓴 과정이나 심정 이야기를 좀 담았으려나 싶었던 게다. 그런데 참 재미있게 읽었다. 미주알고주알 재미난 문체로 구체적이고 서사적으로 드라마틱하게... 이야기를 엮는 이가 아니다, 최승자는. 그저 오늘은 어디서 리딩이 있었고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서 이웃 작가들을 초대해 먹였고, 이런 소소한 나날들의 기록일 뿐이다. 그리고 시인은 파티를 즐기는 이도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이도 아니기에 꼭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나 세미나 같은 거에나 나가고 관광도 거의 하지 않고, 그래서 특별한 사건도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그이가 룸메이트 쇼나와 교감을 나누고 결국 그를 신뢰하게 되는 과정, 특이하고 진중한 마틴과 어쩌면 영적인 끌림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은 그 사귐에 설레며 책을 읽었다.
사실 이 책 이전에 최근에 나온 <어느 게으른 시인 이야기>를 먼저 읽었다. 그 책 말미에 아이오와 작가 회의가 끝날 무렵 신비주의에 천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나무들은>에서도 미국에서 좋아하는 책을 많이 사 모으는 가운데 점성술 관련 책에 흥미를 보이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시인은 영혼이 맑고 직관이 뛰어나다 보니 아마도 그 맑은 기운으로 ‘영빨’을 경험했을 것이다. 칼 융 역시 그런 경험을 많이 했고 그런 측면을 분석심리학에 잘 활용했다 하는데 세상에 과학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영역에 심리학이나 시, 예술이 다가간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고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칫 그 경계가 애매하면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실제로 최승자는 이 이후 정신적으로 한동안 앓았다 한다. 그게 그 무렵 빠져들던 신비주의의 문제이기만 할까 싶기는 하다. 그의 기질은 언제라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그래서 시가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고 그 아주 얇은 경계에서 그는 늘 아슬아슬한 사람이었을 터이니.
하지만 그에게 이제는 세속적인 건강과 맛있는 밥, 따뜻한 사람과의 기댐, 소위 행복이라고 부르는 그 무언가가 다가가면 좋겠다. 평생 외로웠다 해도 노년은 더 이상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령 더 이상 내 젊은 날에 나와 함께 피흘려주던 그런 시,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의 책 세일즈 포인트가 높은 걸 보면서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십수 년의 침잠을 마치고 복간이든 어쨌든 다시 책이 나오고 주목을 받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의 시를 사랑했는지 고백을 들으며 그이가 조금은 덜 외롭겠다 싶어 기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