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 대중가요를 통해 바라본 우리 시대 이야기
이영미 지음 / 황금가지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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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씨는 글과 말이 거의 비슷한 사람이다. 라디오에서 그를 몇 번 들었다. 그의 조금 빠른 말투, 쉽고도 정곡을 콕 찌르는 말발과 시선이 글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대중문화는 아주 중요한 사회현상이다. 지금에야 우리 모두, 그렇지, 라고 동의하겠지만, 대중문화평론가가 명함에 찍혀 부끄럽지 않은 세상이 되었지만 한 10년 전쯤에야 어디 그랬나. 세상 모든 일이 한 번 하고 두 번, 세 번을 거듭하면 어떤 경향을 띄고 문화가 되는 것 아닌가. 하물며 노래야.

가령, (이영미 씨는 많이 폄하하였지만) 대학가요제에 나오는 노래 가사들은 떠나간 님만 말고 바다도 연극 무대도, 옛시도 노래하건만 그냥 가요, 특히 트로트들은 왜 울고짜는 이별과 버림받음만 노래할까, 그런 게 나 고등학생 때도 궁금했었다. 거기에 어떤 구조적인 이유나 음모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조용필이 좋지만, 그야말로 마음으로 귀로 '땡기는' 것 말고 조목조목 그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과 설명을 듣고 싶었다. 특히나 우리가 20대 때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노래들이 이제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채로 그냥 사라져 버리지 않게 그 노래들의 뿌리를 찾아 누군가가 뭐라 말좀 해 주었으면 좋겠더라. 그 모든 이야기를 이영미가 했다.

아니, 사실은 다 한 것 같지는 않다. 좀더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다. 그의 거론 중에 내가 좋아하던 노래가 더 많이 나오면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난 다 읽은 이 책에 나온 노래제목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볼 생각이 있고 그토록 가사에 진정성이 있었음을 몰랐던 '전선야곡' 같은 노래들을 애창곡으로 연습하며 가슴에 새겨볼 의향도 있다. 21세기의 입장에서 80년대 민중가요를 이 책보다 조금만 더 깊게 다루어 준다면 기꺼이 사서 읽을 뜻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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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길벗어린이 작가앨범 4
이주홍 글, 김동성 그림 / 길벗어린이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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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가슴이 턱 막힌다. 저 푸름, 저걸 난 알고 있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초록이 있나. 그 중 아련하고 슬픈 초록이 있다. 산은 때론 얼마나 비장한가. 이 책에 나오는 산은 근엄하진 않지만 아련하구나. 이야기는, 그래, 나도 그렇고 내 아이들도 공감할 이야기는 아니다. 그만큼 먼 오랜 이야기다. 다만 혼자 남겨진 돌이의 외로움은 두 페이지를 차지하는 산 그림자만큼이다. 그만큼 적막하다. 산등성이에 올라 한 낮에 산 저쪽을 바라보면 그 적요함이 단지 편화롭기만한 것이 아닌, 사람을 한없이 맑고도 허랑하게 하는 그 무엇이지 않은가. 그게 있다. 그림에 있다.

돌이가 누나의 때묻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누나 냄새를 맡으면서 운다. 그 상실감을 어쩌랴. 이미 어머니도 잃었는데 돌이는 아직 어린데... 게다가 산 속인데...그래서 그런지 갓 태어난 송아지 얼굴은 더 고와보인다. 그래도 누나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갑자기 슬슬하던 집안이 복닥이는 느낌에 더 좋았을텐데. 누나, 시집가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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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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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노자 선생의 팬이다. 그가 매력적인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언젠가 우연히 신문에서 그의 칼럼을 읽은 게 계기가 되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 하나는 ARS로 수재의연금을 순식간에 억 단위로 모으는 한국인의 온정에 찬사를 보내며,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본인들은 왜 모르냐고 환기시켰던 글. 진정한 칭찬은 칭찬받는 사람을 오히려 겸손하게 만들면서 저 안 깊은 곳으로부터 고무시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 마력을 교육적으로 잘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박노자 선생의 목소리가 나를 그렇게 고무시켰었다. 우리가 스스로를 깎아내리기 바쁜 세월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뜬구름 위에 올려놓는 칭찬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냉철하고 정확해서 피해갈 수 없는, 그래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선은 또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칼럼에서도 읽었다. 설왕설래는 많았어도 논지조차 잡히지 않았던, 그래서 반대를 할지라도 어설프기 그지없던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명쾌한 정리가 기억에 남는다. 영어공용화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닌 그 논의 자체가 품고 있는 혐의를 간파한 넓은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일품이다. 정말 누구 말대로 그가 한국에서 나고 자라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구사할 수 있는 명쾌한 문장이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부끄럽게도 나는 대한민국의 중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말이다.

그의 매력은그가 이방인, 그것도 서구나 북미 사람이 아니란 데에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한국인이라는 것도, 그가 무척 젊다는 것도(젊은데도 그토록 정연하다니!), 그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왔다는 것도, 그가 사랑하는 문화적 정신적 영역이 동양적이고 유교적이고 한국적(이라기보다 조선적)이라는 것도(사실은, 그가 사랑하는 정신적 세계는 어디에도 없고,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그의 논점은 날카롭지만 꼬이지 않았다는 것도, 그의 비수같은 문장에는 어딘가 슬픔이 묻어있다는 것도(연민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종교적인 냄새도 난다. 그의 이성을 보완하는 감성이랄지...), 다 매력이다. 그것들은 부수적인 것이라 말하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이 박노자의 글을 이루고 말해준다. 글로써 만나지만 실제로도 한 번 만나 술 한 잔 하고 싶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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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를 위한 불꽃놀이 - 핀두스의 두번째 특별한 이야기 핀두스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 2
스벤 누르드크비스트 글.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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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렇게가 아니었더라면 절대로 이 책을 만나지 못했을텐데... 등골이 시릴 만큼 고맙다. 우연히 출판사로부터 이 책을 받을 일이 아니었더라면 서점에서 고르지는 않았을 듯 싶다. 그림의 선도 요즘 그림책같지 않고 글씨도 너무 많고. 솔직히 배달을 받고 나서도 그리 탐탁치 않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아이를 위해 잠자리에서 읽어주다 보니 아이보다도 내가 더 매료될 만큼 첫째, 그림이 좋았다. 정말 어딘가 페테르손의 마을이 있을 것 같다. 그의 마을과 집, 헛간, 그 안의 이런저런 살림들이 머릿속에서만 나온 것 같지 않다.

스벤 누르드크비스트의 그림이 그리 모던한 편은 아니라지만 새벽, 아침, 흐린 저녁 등등 시간대별로 그 느낌을 살린 그림에 작가의 감성이 그대로 녹아 있다. 여우 쫒기를 하다가 꼬박 새벽을 맞아 버리는 창가에서 창밖으로는 동트는 새벽하늘이 보이고 집안에서는 날밤을 새버린 적당히 피곤하고 적당히 들뜨고 또 안도하는 아늑한, 식구들(그래봐야 페테르손 할아버지와 닭들과 고양이 핀두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페테르손은 어떤 사람일까.

고양이 한 마리를 손주처럼 데리고 사는 그는 어쩌면 무지하게 외로운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가치로 마냥 행복한 사람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살짝 미치고 적당히 일반적 가치를 초월한데다 꼬인데 없이 여유있고 너그러운 사람이다. 자기네 닭 잡아먹으러 온 여우가 너무 마르고 절뚝거린다고, 폭죽을 터뜨리면 심장마비를 일으킬지도 모르니 관두겠단다. 천천히 사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상의 미세하고 따뜻한 아름다움이 그에게는 보이나보다. 아, 그리고, 핀두스, 너무 귀엽다. 고양이들 특유의 비아냥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양이치고 참 순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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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야기 - 찔레꽃 울타리 찔레꽃 울타리
질 바클렘 지음, 이연향 옮김 / 마루벌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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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머위와 댕이네 집과 마을이 너무 예뻐서이다. 어렸을 때 걸스카웃이었는데, 스카웃 교본 비슷한 책에 캠핑에 대한 부분이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한 숲에 작은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는 장면이었다. 실제로 그런 캠핑은 한 번인가 두 번밖에는 못 해보았고, 우리나라에는 그런 아름드리 숲도 없었다(캠핑할 수 있는). 하지만 두고두고 그 그림은, 숲의 어두운 저 쪽이 주는 신비감과 더불어 그림 속으로 쏙 들어가 살아보고 싶은 이상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내 전생의 몇 번째쯤인가의 생에 그런 숲속 삶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질 바클렘의 그림은 그런 숲의 '삶'을 정말 예쁘게 그린다. 나무 둥치가 통채로 머위네 집인데(부자다!) 그걸 단면도로 보여준다. 그루터기 밑에 작은 삐걱문과 창문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온다. 방마다 키가 작은 창문이 있어 작은 쥐들은 창가에 매달려 눈 오는 걸 구경한다. 집 내부는 또 얼마나 예쁜데! 그야말로 사납지 않은 것들로 집안을 꾸며 놓았다. 벽에서는 참나무 냄새가 날 거다. 찬장 꼭대기에는 두고 먹을 돌능금열매가 사람으로 치면 호박만 한 게 얹혀 있고 그 밑엔 아주 작은 잼이며 마말레이드 병 따위가 헝겊 뚜껑에 덮여 있다. 이 조선 땅에서는 100년 전에도 볼 수 없는, 그야말로 18,9세기 유럽식 인테리어다.

내가 유럽 취향이라서가 아니라, 나무로 집을 꾸민 것, 금속성이 없는 것, 자로 재어 반듯하게 잘라내고 잇댄 것이 아닌 것이어서 좋은 것이다. 촌스럽고 따스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너무 예쁘니 현실감이 없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은 머위와 댕이처럼 평화롭기 살긴 어렵다. 아니, 실지로 머위와 댕위가 정말 살고 있다면 그들의 현실도 그림책에서처럼 행복하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아름답게 하기도 하지만 이 책의 한계이기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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