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법정 지음 / 샘터사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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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 뒤에 붙어있는 딱지를 보니 10년 전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마음이 마냥 허망할 때 유일하게 마음붙였던 서점에서 샀다는 걸 알겠다. 경전이란 절실할 때 찾게 되고 마음이 허망할 때마다 일게 되지만 읽을 때마다 느낌은 다 다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경전은 곧 시이기도 하구나.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앞으로 태어날 것'들에까지 미치는 그 넓은 품이라니! 아마도 이 우주의 필연적 질서를 헤아리는 까닭이겠지. 허나 나는 이 귀절을 멀리 있으며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존재들에 대한 비원으로 읽었더랬다.

가장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귀절은 다음 것이었다.

온갖 삿된 소견에 팔리지 말고,
계행을 지키고 지견을 갖추어
모든 욕망에 대한 탐착을 버린 사람음
결코 다시는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로구나. 그러나 '계행을 지키고 지견을 갖추기'는커녕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들끓는 나는 다음 세상도 기약하긴 틀렸구나. 다시 한 번 태어나 뜨겁게 사랑하다 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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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 칸딘스키의 예술론 열화당 미술책방 10
바실리 칸딘스키 지음, 권영필 옮김 / 열화당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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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미술은 문학과 매우 닮은 예술이라 생각해 왔다. 음악이 감각적인 것이라면, 문학과 미술은 읽어내는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나의 편협한 고정관념 때문이었다면 아마 칸딘스키의 추상화가 잘 다가오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리라. 칸딘스키 화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오히려 그의 초기 구상화들이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음악을 듣고 형상화했다는 추상화들이 유독 많은데 그 그림들의 비논리성에 대해 의아했던 것 같다. 음악은 소설과 달리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의 감각으로 다가갈 것인데... 칸딘스키는 어떻게 자신의 그림이 바로 그 음악에 대한 적확한 느낌을 나타냈다고 감상객들을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을까? 그 비논리를.

그런데 그런 칸딘스키가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논리적이고 음악적인 '글'을 쓰다니! 그것도 색채에 대해! 아직도 나는 칸딘스키의 구상화를 더 좋아하지만, 그의 글을 읽고 나서는 그를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붓을 휘둘러대는 오만한 예술가라는 오해는 절대로 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의 아름다운 글솜씨에 반해 더더욱 총체적으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탁월한 색깔과 심리와 감각의 분석! 노란색의 광조(狂躁), 푸른색의 심화능력,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라 비유된 흰색, 그리고 슬픔의 배음으로서의 검은색. 색깔분석을 통한 싸구려 심리분석이 아니다. 도처에서 색깔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이러저러한 감각과 해석들을 만날 수 있다. 뭐, 그래도 아직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복잡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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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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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가장 힘들 때가 시를 가르칠 때이다. 이제는 '자유시, 서정시, 내재율' 이런 것은 안 가르치지만 아직도 표현법이나 작가의 연보, 행적, 무슨주의 따위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다양한 시도로써, 대중가요에서 시적인 부분들을 가지고 접근한 시수업도 있었고 아이들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 끝에 주옥같은 시들을 얻어낸 수업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수업에서도 우리가 정말 읽어보아야 할 아름다운 시들을 만날 기회를 주지 못하는 게 아닌가 아타까웠다.

교과서에 실리는 시들은 무슨 죄가 있나. 정작 아름다운 시들도(실지로 6차교육과정 이후, 교과서에도 괜찮은 시들이 많이 실리고 있다) 단지 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에, 말하자면 스무 살에 만났더라면 감동적일 수 있었던 시가 중3 국어책에 실리는 바람에 지겨운 무엇이 되어버리는 슬픈 운명의 시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교과서적'이란 말을 결코 긍정적인 단어로 쓰진 않지 않는가!

이 책이 나온 지도 오래 되었고 내가 읽은 것도 오래 전이지만 이 책을 수업 시간에 활용할 엄두를 내진 못했다. 중3 학생들에게 보편적인 교재로 쓸만큼 쉬운 편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매스큼을 탄 후( 이 책이 TV에서 거론되던 그 즈음, 얼마나 시 가르치기가 쉽던지,)이 책을 아주 쉽게 교재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육사, 한용운, 정지용 부분을 진지하게 읽어내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새겨보게 된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칭송하되 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과서에 실리는 시인들은 다 아름답고 훌륭해져 버리는 것이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것이라면 그것들은 대개 어딘가 관변행사장의 축사처럼 발이 땅에 닿아있지 아니한 공허하고 민망한 칭찬같은 것이리라.그러나 신경림 선생님 자신의 마음으로 시인을 고르고 자신의 발길로써 시인들의 흔적을 만나 결코 지나침이 없이 칭찬하였고, 그리하여, 칭찬하고도 부끄러워지는 일따위는 생기지 않게 하였다. 가령 이런 것. 육사의 시정신을 드높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시가 달콤하게 여겨지지 않아서 송구했던 마음에 대해 신경림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위대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시가 전부 위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 시는 좋은데 시인의 삶이 미진하거나 시정신은 좋은데 문학적 완성도가 부족할 때 느끼는 마음의 안타까움에 대해, 그 어느 쪽에만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루 헤아려 읽어야 할 그 무엇이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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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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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의 '가족의 기원'을 읽었을 때, 너무나 명료해서 정신에 얼음 조각을 떨구듯 선듯했던 기억과, 우연이 아닌 논리적 과정들(물론 대안까지도 제시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로 여성의 불평등을 해설하는 그 논지가 너무 선명해서 먹먹했던 기억이 난다. 뒤집어 말하면 이것(남녀불평등이란 것)은 부당한 만큼이나 필연이었단 말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면 완벽한 짜임이 무릎을 치게 만든다. 정말 그럴 수도 있었을 것만 같다. 가령 이 세계에서, 제1의 성인 '움'이 우월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흔히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남성이 생물학적으로 우세하여 여성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얼마나 많은 여성들도 그러한 논리에 동조하며 남성의 우월과 지배를 달게 받아들이는데!) 논리에 견주어 조금도 부족할 게 없어보인다.

임신할 수 있는 천혜의 능력이 갖는 우월성이여, 생물학적으로 폭력적이지 않기에 지혜로울 수 있다는, 그리하여 지배의 性이 되기 부족함이 없다는 논리의 필연적 귀결이여! 말하자면, 이것은 너희들의 논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를 반증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것은 결코, 한 번쯤, 혹은 소설에서나마 여자가 남자를 지배해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결혼 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당한 여성의 지위에 대한 갈증을 온갖 자료와 책들을 찾아 읽으며 풀어보려고 몸부림친 시기가 있었다. 갈증만 더할 뿐이었다. 읽는 것으로 끝내고 지쳐 떨어져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평소에 작은 권리들은 찾되 굵은 사안에서는 남편에게 져주고 시댁에 대해 얌전히 순응함으로써 갈등에 대한 비겁하게 대처하기로 답을 내린 나에 비해, 남편이야말로 적극적으로 자기를 반성하고 끊임없이 거듭나는 양성평등, 나와 자기자신의 평등을 위해 몸부림쳐주었다. 그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의 나는 무지 얌전한 수퍼맞벌이주부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남편은 냉소적이었던 나보다 더 충격적으로, 감동적으로 이 책을 읽었다. 그 이의 이 책에 대한 감상은 '몸서리침'이었지만 이것은 또한 끊임없이 남성적 권위에 기대려는 자신의 모습에 반성의 칼날을 들이대주는 한 뿌리가 되었음이 틀림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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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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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오염된 하늘과 모자라는 흙과 초록에 대한 갈증을 심하게 겪지만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아직도 우리 산천이 초록으로 그득하고 물과 산이 풍부한 곳임을 발견하면 조금 안심이 된다. 사실은 그 산하마저 오염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라, 아직은 내 눈에 띄지 않을 뿐 맑고 아름다운 것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음을 믿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남아있어서 세상을 아직도 맑게 한다는 믿음. 라다크가 그런 곳이라면, 바늘하나로 톡톡 터트려 없애버려도 되는 그런 쉬운 세상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답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라다크가 주는 문제제기, 문제제기들은 문제해결이 아니므로.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면서 서서히 나아가면 달라질 수 있겠지. 멈추게 할 수 있겠지. 아니, 최소한 늦추기라도 하겠지. 너무 늦지 않길 바랄 뿐이다. 라다크, 20세기에 남아있는 희소한 과거, 사실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대안인, 그곳이 '오래된 미래'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꿈 속의 미래'가 될까봐 한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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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나 2004-04-1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고 살을 부비고 산 그 때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산 때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