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웃음과 망치와 열정의 책 책 읽는 고래 : 고전 5
진은영 글, 김정진 그림 / 웅진주니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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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대충 읽었지만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던 것 같다. 당연히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니체가 어떤 시대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다 해도 그의 작품들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너무 심오해서일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대중화에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하긴 철학자들이 대중의 이해를 구하지는 않더라만). 절박함에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새삼 예수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심오하든 신비롭든, 비이성적이든 그는 대중을 이해시킬 수 있는 이야기꾼이다는 것. 니체의 모호함은 어쩌면 유럽의 문화전 전통 혹은 기원일 수는 있겠지만 예수같은 설득력은 갖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지금 전 지구적 삶의 근원이 된 유럽 정신에서 매우 중요한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 아니, 이해고 나발이고를 떠나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헛소리를 지껄인 병약하고 사회성 없었던, 자의식 과잉의(그래, 내가 그의 저서를 온전히 읽기 이전에 칼 융이 쓴 <칼 융, 차라투스트라를 분석하다>를 먼저 읽은 게 잘못일 수도 있다. 융은 니체를 인정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분석심리학적으로 그가 자의식 과잉이라고 보았다), 글빨은 좀 있는 그런 관종....은 아닌가 싶었던 사람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데 중요한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지 않은가.

 

요즘 한참 잘 팔리는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의 주인공인 시인 진은영. 베스트셀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나는 예외 없이 이 책을 구입해 읽고 있다. 좋은 시들이 많다. 세월호를 놓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사랑스러운 시집. 그러나 한국에서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 시집의 선방이 과연 작품만의 힘일까 의심스럽긴 하다.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명성과 인기를 누리는 그이가 철학해설서를 썼().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니체를, 그것도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서? 오래 전에 상담실에 구입해둔 책을 왜 이제 읽게 되었는지 나 자신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책은 운명처럼 자주 나를 부르곤 하는데 이번에도 상담실 서가를 정리하다 이 책이 나를 부르는 바람에 다시 손에 넣고 읽게 되었다. 너 요즘 니체를 뒤적인다며? 니체 원서는 난해하지만 남들이 해석해놓은 니체를 더러 찾아 보았다며? 그리고 진은영도 읽는다며? 그럼 이 책은 어때? 너의 천둥벌거숭이 남중딩 제자들이 이 책을 읽을 일은 별로 없을 거야. 대신, 네 수준에 딱 맞을 것 같지 않아? 그러니까 함 읽어보렴. 이러면서.

 

그리고 결론. 이 책은 놀랍다! 나는 진은영이란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니체가 이토록 쉽게 이해가 되며 심지어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니!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니체를 읽을 일 없을지라도 이 책을 나의 제자들에게, 아니 어린이들에게도 읽히고 싶어졌다, 그저 이 책을 읽는 일만으로도 어린 그들에게 뭔가 깊이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어린 자녀와 제자에게 삶의 자세와 방향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싶은 어른들, 그리고 자신의 호기심과 성찰을 위한 독서가 필요한 어른들도 이 책을 읽으시라.

 

그간 오해했던 니체에 호감이 생기게 된 대목이 여럿 있다. 가령, 우리 사는 세상의 요란법석함을 니체는 매우 사랑했단다. 살아 있는 것들은 서로 다투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고 갈라서기도 한다(세상은 아이들의 놀이터 같은 것). 사람들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내며 대립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니체는 말했단다. 그가 현대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사람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 기질과 그가 주장한 아모르 파티는 일맥상통한다. 니체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요즘의 잣대로 평가할 사람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현실을 즐기는 발랄한 진보의 가치관과 접점이 있어 보인다.

 

그가 말하는 위버멘쉬, 강한 자는 니체에 대한 흔한 오해처럼 강인하고 초인적이고 뛰어난 어떤 영웅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자면 하루하루 삶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 돈이든 명예든 이념에든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현대는 개인의 자유가 극강에 이른 듯 보이나 자본주의라는 사슬에 스스로 노예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거짓 자유의 시대이기도 하다. 하긴 어느 시대나 신이든 신념이든 돈이든 인간은 어딘가에 매여 살았지 진정한 자유를 누린 적이 있던가. 아니 앞으로는 있을 것인가. 자유롭지 못해야 평화로운 게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내가 누군지 고민하고 자유로워지려 몸부림치는 존재가 인간이기도 하다(귀엽지 않은가). 그 선봉에는 늘 철학자들이 서 있었다. 니체처럼 목소리 높여 외쳤던 연사는 실제 사람들을 자유로 이끌었든 아니든 사랑받고 존경받고 염두에 두어졌던 거다. 매력적인 인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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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힘 - 녹색 교실이 이룬 기적
스티븐 리츠 지음, 오숙은 옮김 / 여문책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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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지은이 자신이 테드(TED)에서 강연한 이야기가 나와서 영상을 찾아보았다. 지은이처럼 열정적인 사람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지는데 심지어 그의 목소리와 몸짓도 볼 수 있다니 더욱 궁금할 수밖에. 기립박수까지 받았다고 저자가 은근히(?) 자랑을 하는데도 그 영상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그의 이름 스티븐이라고 한국어로 치면 찾지 못한다. stephen이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열정적인 스티븐 선생님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열정적이다 못해 부잡스럽게까지 보였기 때문이다. 천진한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열정과 기쁨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싶다. 어른이 된다는 건 여러가지 좋은 의미도 있겠지만 열정과 순수한 호기심, 진정한 기쁨을 잃거나, 적어도 표현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티븐 선생님에게는 아이들과 하는 모든 일이 즐겁다는, 기대가 된다고 믿는 순수한 열정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과 학생들이 함께 하는 일들이 어떤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천진하기만 한 열정 덩어리가 아니더라는 말이다.

 

저자의 열정을 짐작케하는 대목 중에는 본인이 학교를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괜찮은 지도자를 따라 학교를 옮겨 다녔다는 부분이 있다. 관리자와 교사는 다르다. 각자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교사로서는 별로지만 관리자로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한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리고 학교 행정은 분명 중요하다. 좋은 교사와 좋은 활동 프로그램이 있어도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행정과 예산은 꼭 필요하니까. 다만 우리의 현실은 프로그램이 좋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이롭다고 해서 거기에 설득될 만큼 교육철학이 훌륭한 관리자가 많지 않다는 것, 아니, 관리자들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보통 이런 책을 읽으면 조금이라도 따라 할 구석이 있을까 생각하지만 그의 행동을 따라하기엔 그는 너무 많은 일을 했고 너무 열정적으로 살았다. 나도 뭔가 다른 선생님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많이 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리츠 선생님처럼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했던가, 돌아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가지고 학업에 다가가는 기술을 지녔던가 돌아보아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의 제자들은 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꼈기에 나의 다가감에 고마운 마음으로 호응했지만 그 모든 다가감이 아이들을 즐겁게 했거나 아이들이 변화시켰던 건 아니었다. 그게 당시에는 기술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도 모르게 학생들과 나 사이에 거리두기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들 삶에 깊이 들어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꼭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라는 말로 표현해왔다. 그게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며, 어쩌면 결과적으로 더 바람직한 것일 수는 있어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스티븐 선생은 이것저것 잘 해냈고 열심히 했지만 그보다 더욱 그가 훌륭한 것은 학생들을 사랑했다는 점이다. , 그리고 하나 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는 점도 칭찬해야겠다. 다음은 스티븐이 학생들과 한 약속이다. 이런 약속을 먼저 정해놓고 새학기를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 우리나라 학교에서처럼 수업 종 치기 전 자리에 앉아 있자. 친구를 놀리지 말라, 이런 것 말고-물론 그런 약속도 필요하긴 하다. ^^-)

 

교사의 교실 속 합의안

일일 활동 주제, 입구 활동, 출구 티켓을 제공하겠다.

어떤 학생이 묻는 어떤 질문에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답하겠다.

여러분을 품위 있게 대하고 존중하겠다.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고 언제든 여기서 여러분을 돕겠다.

 

학생들의 합의안

언제나 우리 생각이 눈에 보이도록 하겠다.

우리는 모두를 비록 괴로울 때도 존중하고 사랑하겠다.

과제 내용을 확실히 주지하겠다.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겠다.

이해되지 않을 때는 질문을 하겠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발견한 문구 중에 꼭 되새기고 싶은 것이 있다. '포용력이 판도를 바꾼다'. 품이 넓은 사람만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품을 수 있고 해보게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관리자이거나 책임자, 선생, 어른이라면 더더욱 그의 포용력이 아이들을 달라지게 하고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진짜 어른은 호통치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지는 사람,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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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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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가 이토록 무서운 이야기를 이렇게 아름답게 쓸 수 있었던 사람은...

살충제로 예쁜 새들이 죽고 풀들이 사라지며 결국 사람의 목숨도 위협한다, 라는 이 간결한 주제를 이렇게 길게, 이렇게 자세하게, 이토록 세밀하고 치밀하게 이야기하다니......

 

레이철 카슨은 때로는 가차 없는 팩트가 가장 서늘하고 진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널리스트로서 그걸 입증한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레이철 카슨은 과학으로 그걸 해냈다. 게다가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이라니...... 우리에게도 글 잘 쓰는 과학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마리아 포포바나 칼 세이건, 레이철 카슨처럼 뛰어난 문장력으로 과학을 말하는 이들이 부러운 게 사실이다. 한국에는 이과생들이 문과생을 무시하는 문화가 있다. 과학의 위대한 업적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과학 공부하는 이들이 인문학적 소양과 문학적 능력을 갖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갖출 필요가 없다는 태도, 문학을 비논리적인 영역으로 치부하는 태도... 뭐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나는 문학의 위대함을 가슴 깊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과학은 과학대로 자기 역할이 있음을 존중한다. 그것은 각자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또한 서로 기본을 갖추려는 노력도 필요한 영역이라 생각한다. 과학에 무지한 인문학도가 그걸 자랑으로 여길 수 없듯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과학도들도 그게 하찮은 학문이라 소홀히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과학은 위대하고 꼭 필요하다. 서구의 많은 과학자들이 가슴에 사랑과 감성을 품고 사는 일을 자랑스러워했으며 때로는 자신의 문학적 지식, 소양을 과학의 대중화에 잘 활용하며 살았던 일을 생각하면 그런 풍토가 한없이 부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토양을 바탕으로 레이철 카슨 같은 이가 탄생할 수 있었으리라.

 

살충제가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것의 무한한 연대책임에 대해서는 솔직히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 현실에서 살충제를 피하며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도, 머리로만 대충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책이 쓰인 1950, 60년대의 미국과 지금의 한국은 많이 달라졌을 터이고 이 책에 쓰인 내용이 지금에도 여전히 다 진실 혹은 과학적 사실이라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터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살충제가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시키고 교란시킨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 중심으로 지구의 생태가 돌아가는 게 맞느냐는 근원적인 질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는 공존의 방법은 모색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책 속에는 많은 새들과 물고기, 식물들이 등장한다. 내가 모르는 생물들이 있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어떤 동식물은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르겠구나, 잠시 상상을 해본다. 지금도 많은 동식물이 영영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다 하고 그 대부분의 원인을 인간들이 저 살자고, 아니 몇몇 인간들이 저만 잘살자고 하다가 제공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참 안타깝고 허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몇 돈 많은 이들을 위한, 그 근방 어딘가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뭔가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소수의 인간들이 그 혜택을 누리고 살고 있다. 그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인간들은 그 피해에 시달리고 그보다 더 많은 동식물들이 생명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몇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겠노라고 뿌려대는 살충제 때문에. 아니, 이렇게 말하면 공범인 주제에 책임을 회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인간은 이에 책임이 없지는 않으므로. 더 싱싱하고 더 큰 채소와 과일을 탐했던 나, 벌레를 혐오하고 좋아하는 동식물만으로 이루어진 자연을 즐기고자 했던 사람이라면 모두 공범일 수 있으니.

 

적어도 이제는 비행기로 사람들이 사는 농가와 숲에 DDT를 뿌려대는 시대는 아니라 안도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한국에서도 점점 덜 위험한 제초제, 살충제, 영양제를 사용해 농사를 짓는다고는 한다.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나마 여기까지 오는 데 레이철 카슨이 엄청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 문학은 힘이 세다라는 말은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이리라. 가장 위대한 과학과 문학의 만남이었다고 말해 보리라. 그리고 그녀의 위대함에 감사를 표한다. 아니, 그보다 더 큰 감사를 그녀의 용기에 바치는 바이다. 책에서 읽은 내용 중 기억해야 할 것들만 아래에 추려본다.

 

살충제 등을 뿌린 후 그 성분이 사라진 후에도 폐기된 화학물질이 햇빛 공기 물 등과 함께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냄.

호수 자체에 뿌린 DDD성분이 사라져 버려도 그 주변 물고기, , 개구리 등 동물들 몸에는 그 살충제 성문이 농축됨.

살충제를 쓰면 미생물, 지렁이, 진드기, 톡토기 등도 죽게 됨.

제초제 2,4-D 등은 뿌리는 사람들을 심각한 신경염이나 마비로 고생하게 만듦.

제초제가 뿌려진 직후 가축들은 독성이 있는 목초에 이끌리는 이상한 식욕 때문에 죽음에 이르기도 함.

제초제를 뿌리면 또 다른 잡초가 갑자기 늘어남.

지렁이도 체내에 살충제가 축적되고 농축됨. 살충제를 뿌리면 이 과정에서 많은 지렁이가 죽지만 살아남은 지렁이는 생물학적 증폭기구실을 함.

새는 해충 억제에 중요함. 그런데 살충제는 해충뿐 아니라 새들도 함께 죽임.

살충제 살포 2주 후 소, 염소, , , 새 등 야생돌물들까지 신경계에 치명적 문제가 발생함.

우유에도 잔류농약이 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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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왜 잘하는가 - 성숙하고 부강한 나라의 비밀
존 캠프너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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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 그런 나라는 없다(-토피아). 우리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 말이다. 혹은 거꾸로, 돌고 돌아와 보니 내가 사는 곳이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찾아 헤매던 파랑새처럼.

 

한때는 혁명에 성공한 나라 프랑스가 가장 이상적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 이지적인 문화적 바탕. 빅토르 위고와 파스칼 키냐르의 나라, 톨레랑스의 나라. 개인을 존중하면서 공동체적 가치관과 이상을 놓지 않는 나라. 독재와 거리가 먼 나라, 자본주의 사회라기엔 너무나 사회주의적인 나라...

그리고 또 한때는 프랑스의 식민과 침략의 역사, 피의 혁명의 역사가 싫어 눈을 돌려보니 북유럽이 있었다. 품위와 배려가 사회문화에 기저에 자리 잡은 나라. 복지가 훌륭한 나라, 교육으로 모든 문제의 근원부터 다시 시작하는 나라, 그 역시 구악을 이겨낸 역사들을 간직한 북유럽의 나라들이 부러웠다.

그렇게 내가 부러워한 나라 중 독일은 없었다. 아마도 독일, 하면 양차대전과 딱딱한 이성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떠올라 그랬나 보다. 그런데 이 책 <독일은 왜 잘하는가>를 읽으니 내가 미처 못 본 부분들이 보인다.

 

독일은 시스템이나 공동체 문화에 체계와 철저함이 돋보이는 나라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바탕이 될 그것들을 잘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인들의 기질적인 면도 작용했을 것이다. 물건을 잘 만들고 근대 철학의 발판을 마련한 나라, 음악에서 뛰어난 이들 대부분이 그 나라 출신이고 지금도 유럽에서 가장 중심을 잡고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그런 면 때문에 독일이 부러운 건 아니다. 한때 가해자였지만 철저한 반성을 통해 과오를 딛고 일어난다는 것, 한 개인으로도 힘든 일이지만 국가가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반성과 성찰이 사회 전반에 문화로써 사람들의 가치와 인성과 공동체 문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오늘날 독일이 경제도 잘하고 코로나 대비도 잘하고 좋은 사회를 유지하면서 유럽의 중심국가가 된 근원의 샘을 하나 찾아간다면 그 지독한 자기반성이 바로 그것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독일은 마치 자기관리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인품 훌륭한 동네 형 같은 느낌의 나라다. 어느덧 그의 저력은 유럽에서 리더십을 획득하였다. 물론 심정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도 포함하겠지만 엄혹한 현실에서 인품만이 리더십의 조건이 되진 않는다. 돈과 실력을 겸비하였기에 그 품성은 더욱 빛나는 것이리라.

독일이라고 해서 자국 이익만 생각하는 이들, 주변국의 고혈을 빨아들이려는 이들, 약자에 배타적인 자들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고 역사적으로 과오를 돌아보고 나서 앞으로 나아가며 애를 쓰는 이들이 더 많고, 그들이 정치적 주류를 형성해 왔기에 그런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독일의 연대세(졸리)가 그 증거다. 통일 당시 독일은 동독의 재건을 위해 소득세 외 5.5%를 추가 납부하기로 하였다. 2021년에는 상위 10%를 제외하고 그 세금을 폐지할 계획이란다. 그런 세금을 걷은 것도 대단하지만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이성으로써 그 세금의 존재에 동의한 독일 국민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난민들이 들어왔을 때 그들을 위한 기부자가 너무 많아 경찰이 중단을 요청해야 했다고 한다. 그런 문화가 사회 전반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혹여 독재 세력이 권력을 잡더라도 언제든 끌어내릴 수 있어야 민주국가라 했다고 칼 포퍼가 말했단다. 독일은 그런 과정을 해왔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만약 독일이 본받을 만한 나라라면 우리는 그걸 어떻게 닮을 수 있을까, 혹은 우리는 왜 독일처럼 하지 못할까를 끊임없이 생각해 보았다. 역사가 다르고 국민의 기질이 다르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과오를 확실히 딛고 일어선 청산의 역사가 없었다. 친일 세력을 제대로 씻어내지 못했고 일본에게 단호하게 책임을 묻지도 못했다. 그나마 80년대 독재 세력을 딛고 일어난 것이 하나의 단계라면 아직도 남아 있는 적폐 세력을 딛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과제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해내고 나면 분단의 역사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또 남을 것이고. 그 단계를 하나씩 밟아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나라도 꽤 괜찮은 나라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국가의 테두리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더 자유로운 어떤 세계를 꿈꾸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나 독재 세력에 의해 인권이 산산이 무너져버리는 나라들을 보면 한계가 있을지라도 국가라는 테두리가 건전하고 건강해야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지켜질 수 있음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독일 사회는 상호 책임과 공동의 노력, 규칙 기반의 질서가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은 약자가 강자에 맞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균형을 새롭게 맞추는 것이어야 한다.

 

독일은 두 번의 전쟁, 두 번의 독재 정권을 겪었고 청산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잊어버리려는 시도는 한 번도 없었다.

 

서독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의 1/5을 동독 지역 재건 사업(안정하지 않은 핵 시설 패쇄, 석탄 발전 의존도 낮추기 등등)에 투자하며 노력했다(우리는 통일이 되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금융위기 발생 때에도 독일기업들은 근로자 해고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근무시간 단축하고 연차나 무급휴가를 씀으로써 고통을 분담하였다. 나중에 해고시킨 만큼 다시 고용하여 재교육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주식 시장에 열광하지 않으며 저축을 열심히 하고 그 저축은 연금과 생명보험으로 들어간다. 독일인은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연대 사이에서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자본주의자들이 돈을 탐하는 것을 인간의 본성인 양 주장하지만 돈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이토록 다양하다.

 

독일은 2015년에야 최저임금제를 도입했다. 다른 나라의 경우 노동자들이 기댈 장치들이 없기 때문에 최저임금제가 필수지만 독일은 공동경영 제도에 의해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필요를 덜 느껴서 그렇단다.

 

독일 중소도시에서는 공연장이나 미술관을 따라 걷다가 그 지역의 자부심인 책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건을 계기로 독일의 원전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독일은 직접 영향권에 있었기에 비상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농작물을 불태우고 넘어오는 차량을 세척하거나 학교 운동장 모래도 모두 교체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이후 새로운 핵 시설 구축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해졌단다(물론 재해나 참사를 겪고 나서 정책을 바꾸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참사가 일어나야만 정책을 바꾼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당신의 차는 너무 크다. 당신의 자아는 이렇게 화려한 차를 필요로 하는가? - 독일에서는 큰 차를 타면 사람들이 이런 쪽지를 붙여놓기도 한단다.

 

2000년 독일은 풍력, 태양력 대규모 경제 시스템으로 거듭났다. 현재 재생에너지 비율은 40%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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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샵
피넬로피 피츠제럴드 지음, 정회성 옮김 / 북포레스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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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면 문학을 쓰지도, 읽지도 않겠지?’

남의 일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공감의 아픔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 속 편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최근엔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 때문에, 가까이는 학교에서 만난 힘든 가정의 학생들 때문에, 그리고 나의 식구들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늘 마음이 힘들다. 무심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살면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타고난 기질 때문에 그럴 수는 없음을 잘 안다.

심지어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소설 속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는 일이 힘들어서 그런 적도 많다. 이 책 <북샵>을 다 읽고는 주인공 플로렌스의 실패와 상실이 내 일인 양 느껴져서 많이 힘들었다고 여기에 고백하는 바이다.

 

화가 났다. 이런 결말의 소설은 처음 보았다. 이렇게 주인공이 모든 걸 잃고 떠날 때 그래도 곁에 누가 남았다든지, 새로 갈 데가 있다든지, 하여간 숨 쉴 구멍은 남겨놓고 소설을 끝맺지 않나? 그런데 플로렌스는 서점도 책도 다 잃었다, 이렇게 끝나버리니, ... 그래, 현실은 부조리하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불의한 일이나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견딜 수가 없다. 운명이나 신, 업보든 뭐든 그들의 슬픔과 나의 안타까움을 달래줄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외치고 싶다. 그래도 소설은, 어차피 허구니까,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할 의무도 있지만 그래도 문학으로나마 독자를 위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태원 참사 때문에 이 세상에 화를 내고 싶은데 이 소설마저 이렇게 나를 화나게 한다.

 

사서 선생님이 괜찮은 영화를 발견했다고 말씀하시고 얼마 후 또, 그 영화가 책으로 나왔다고(사실은 책이 먼저고 영화가 나중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출간이 그리 됐다는 뜻이다) 내게 권했다. 영화의 결말은 일말의 희망을 보게 해준다면서, 물론 결말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은 채. 내내 그, ‘그래도 남은 희망적인 결말을 기대하고 읽은 내게 책은 허무한 결말을 안겨주었다. 아무래도 영화를 찾아보아야겠다. 그래야 이 섭섭함이 조금은 가시겠지.

영화는 소설과 조금은 다르다. 조금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를 만든 이 역시 나처럼 책의 결말이 너무나 아쉬웠던 게다. 그래서 마지막을 살짝 비틀고 덧댐으로써 독자들의 허무한 가슴을 달래주고 싶었나 보다.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그 이상한, 몰철학적이고 이중적인 태도가 못마땅한 독자를 위해 박종원 감독이 영화로써 극복의 장치를 마련한 것처럼. 아무리 누천년 인류에게 부당한 일이 거듭될지라도, 그리하여 기실은 그 희망이란 녀석이 별 힘은 없는 존재일지라도, 어쨌거나 그게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미친 듯이 사람들은 예술 속에서 희망이라는 사금파리를 찾아 헤매지 않나. 피츠제럴드는 파격적인 결말로 현실과 자신의 삶을 충분히 반영한 멋진 소설을 썼을지는 몰라도 독자들에게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저 당당한 플로렌스란 여인을 초라하게 만들지는 말아달라. 영화에서 크리스틴이 플로렌스의 염원과 혼을 잇듯,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란 희망을 버리게 하지 말아달라, 저자에게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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