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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왜 잘하는가 - 성숙하고 부강한 나라의 비밀
존 캠프너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평점 :
이 지구상에 그런 나라는 없다(유-토피아). 우리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 말이다. 혹은 거꾸로, 돌고 돌아와 보니 내가 사는 곳이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찾아 헤매던 파랑새처럼.
한때는 혁명에 성공한 나라 프랑스가 가장 이상적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 이지적인 문화적 바탕. 빅토르 위고와 파스칼 키냐르의 나라, 톨레랑스의 나라. 개인을 존중하면서 공동체적 가치관과 이상을 놓지 않는 나라. 독재와 거리가 먼 나라, 자본주의 사회라기엔 너무나 사회주의적인 나라...
그리고 또 한때는 프랑스의 식민과 침략의 역사, 피의 혁명의 역사가 싫어 눈을 돌려보니 북유럽이 있었다. 품위와 배려가 사회문화에 기저에 자리 잡은 나라. 복지가 훌륭한 나라, 교육으로 모든 문제의 근원부터 다시 시작하는 나라, 그 역시 구악을 이겨낸 역사들을 간직한 북유럽의 나라들이 부러웠다.
그렇게 내가 부러워한 나라 중 독일은 없었다. 아마도 독일, 하면 양차대전과 딱딱한 이성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떠올라 그랬나 보다. 그런데 이 책 <독일은 왜 잘하는가>를 읽으니 내가 미처 못 본 부분들이 보인다.
독일은 시스템이나 공동체 문화에 체계와 철저함이 돋보이는 나라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바탕이 될 그것들을 잘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인들의 기질적인 면도 작용했을 것이다. 물건을 잘 만들고 근대 철학의 발판을 마련한 나라, 음악에서 뛰어난 이들 대부분이 그 나라 출신이고 지금도 유럽에서 가장 중심을 잡고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그런 면 때문에 독일이 부러운 건 아니다. 한때 가해자였지만 철저한 반성을 통해 과오를 딛고 일어난다는 것, 한 개인으로도 힘든 일이지만 국가가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반성과 성찰이 사회 전반에 문화로써 사람들의 가치와 인성과 공동체 문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오늘날 독일이 경제도 잘하고 코로나 대비도 잘하고 좋은 사회를 유지하면서 유럽의 중심국가가 된 근원의 샘을 하나 찾아간다면 그 지독한 자기반성이 바로 그것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독일은 마치 자기관리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인품 훌륭한 동네 형 같은 느낌의 나라다. 어느덧 그의 저력은 유럽에서 리더십을 획득하였다. 물론 심정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도 포함하겠지만 엄혹한 현실에서 인품만이 리더십의 조건이 되진 않는다. 돈과 실력을 겸비하였기에 그 품성은 더욱 빛나는 것이리라.
독일이라고 해서 자국 이익만 생각하는 이들, 주변국의 고혈을 빨아들이려는 이들, 약자에 배타적인 자들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고 역사적으로 과오를 돌아보고 나서 앞으로 나아가며 애를 쓰는 이들이 더 많고, 그들이 정치적 주류를 형성해 왔기에 그런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독일의 연대세(졸리)가 그 증거다. 통일 당시 독일은 동독의 재건을 위해 소득세 외 5.5%를 추가 납부하기로 하였다. 2021년에는 상위 10%를 제외하고 그 세금을 폐지할 계획이란다. 그런 세금을 걷은 것도 대단하지만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이성으로써 그 세금의 존재에 동의한 독일 국민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난민들이 들어왔을 때 그들을 위한 기부자가 너무 많아 경찰이 중단을 요청해야 했다고 한다. 그런 문화가 사회 전반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혹여 독재 세력이 권력을 잡더라도 언제든 끌어내릴 수 있어야 민주국가라 했다고 칼 포퍼가 말했단다. 독일은 그런 과정을 해왔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만약 독일이 본받을 만한 나라라면 우리는 그걸 어떻게 닮을 수 있을까, 혹은 우리는 왜 독일처럼 하지 못할까를 끊임없이 생각해 보았다. 역사가 다르고 국민의 기질이 다르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과오를 확실히 딛고 일어선 청산의 역사가 없었다. 친일 세력을 제대로 씻어내지 못했고 일본에게 단호하게 책임을 묻지도 못했다. 그나마 80년대 독재 세력을 딛고 일어난 것이 하나의 단계라면 아직도 남아 있는 적폐 세력을 딛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과제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해내고 나면 분단의 역사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또 남을 것이고. 그 단계를 하나씩 밟아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나라도 꽤 괜찮은 나라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내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국가의 테두리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더 자유로운 어떤 세계를 꿈꾸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나 독재 세력에 의해 인권이 산산이 무너져버리는 나라들을 보면 한계가 있을지라도 국가라는 테두리가 건전하고 건강해야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지켜질 수 있음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독일 사회는 상호 책임과 공동의 노력, 규칙 기반의 질서가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은 약자가 강자에 맞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균형을 새롭게 맞추는 것이어야 한다.
독일은 두 번의 전쟁, 두 번의 독재 정권을 겪었고 청산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잊어버리려는 시도는 한 번도 없었다.
서독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의 1/5을 동독 지역 재건 사업(안정하지 않은 핵 시설 패쇄, 석탄 발전 의존도 낮추기 등등)에 투자하며 노력했다(우리는 통일이 되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금융위기 발생 때에도 독일기업들은 근로자 해고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근무시간 단축하고 연차나 무급휴가를 씀으로써 고통을 분담하였다. 나중에 해고시킨 만큼 다시 고용하여 재교육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주식 시장에 열광하지 않으며 저축을 열심히 하고 그 저축은 연금과 생명보험으로 들어간다. 독일인은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연대 사이에서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자본주의자들이 돈을 탐하는 것을 인간의 본성인 양 주장하지만 돈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이토록 다양하다.
독일은 2015년에야 최저임금제를 도입했다. 다른 나라의 경우 노동자들이 기댈 장치들이 없기 때문에 최저임금제가 필수지만 독일은 공동경영 제도에 의해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필요를 덜 느껴서 그렇단다.
독일 중소도시에서는 공연장이나 미술관을 따라 걷다가 그 지역의 자부심인 책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건을 계기로 독일의 원전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독일은 직접 영향권에 있었기에 비상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농작물을 불태우고 넘어오는 차량을 세척하거나 학교 운동장 모래도 모두 교체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이후 새로운 핵 시설 구축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해졌단다(물론 재해나 참사를 겪고 나서 정책을 바꾸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참사가 일어나야만 정책을 바꾼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당신의 차는 너무 크다. 당신의 자아는 이렇게 화려한 차를 필요로 하는가? - 독일에서는 큰 차를 타면 사람들이 이런 쪽지를 붙여놓기도 한단다.
2000년 독일은 풍력, 태양력 대규모 경제 시스템으로 거듭났다. 현재 재생에너지 비율은 40%를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