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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질 수 있는 생각 - 소프트커버 보급판
이수지 지음 / 비룡소 / 2024년 4월
평점 :
모든 일상의 책무를 다하고 나서 진정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게 무얼까. 수를 놓고 뜨개질을 하고 인형이나 옷을 만들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동화를 쓰고 마당에 호박을 심고... 물론 내 안에는 그런 ‘놀이’의 결과물들이 누군가에게 기쁜 선물이 되거나 돈이 되거나 명성이 되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다.
이수지 작가의 성취가 부러운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누구나 성공을 꿈꿀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고단할 것이다. 만약 그 과정 자체가 열정에 사로잡혀 ‘하고 싶어 근질근질하고 미치겠는 열망’의 결과물을 냈는데 그게 대단한 것이라면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만질 수 있는 생각>은 작가가 그림책을 만든 과정들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그림책 작가를 꿈꾸는 이에게는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책을 만드는 과정이나 편집자들을 만나는 과정이 잘 담겨 있으니 실용적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재미있는지가 담겨있다. 독자가 읽고 아, 이런 열정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 같다. 그가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든 다른 창작자가 되고 싶든 말이다.
나도 최근에 쓰고 싶은 글이 있어 밑작업을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야기가 자기 안에서 퐁퐁 솟아난다는데, 나는 그것들을 짜맞추고 쥐어짜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열정에 휩싸여 휘몰아치듯이 그 일만 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행복한데, 아무래도 글쓰기는 내게 그런 영역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수지는, 그랬단다.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일의 흐름이 끊길 때마다 아이들이 잠들면 얼른 그림책 작업을 하고 싶었더랬다. 머릿속에 발상이 들끓고 손은 그림을 그리거나 작업을 할 준비가 다 되었는데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 것도 괴롭겠지만 일을 할 시간과 공간이 마련되었어도 열정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렇게 어떤 노작을 이루어냈을 때에는 이것의 성공 여부를 떠나 일단 기쁘다. 그러다가 그것의 성공이 미약할 때 오는 현타가 있다. 좌절, 열등감, 분노, 무기력감으로 이어지는. 혹여 약간의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다음 작품이 이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따라온다. 무언가 성취를 해본 사람들은 공감할 이런 과정을 작가 이수지도 겪어 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그림책 작가 중 손에 꼽히게 성공을 경험한 이 사람도 그랬을 것이다. 다만 그이는 자신의 작품이 계속 생명을 유지하도록 열심히 발로 뛰었다. 출판사나 편집자와 연락하고 글작가와 소통하는 노력 와중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을 어필한다. 그 모두의 조화가 오늘날 이수지라는 작가를 만들었다.
그림책 작가라는, 내 관심 영역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이 분야 이야기를 열심히 읽을 수 있었던 것에는 그의 삶의 태도 – 자기 작업을 즐기는 – 와 더불어 ‘어린이’를 대하는 그의 태도와 철학도 한몫했다. 자기 작품 중 하나에 대해 언급하면서 헤엄치는 아이 곁에 항상 드러나는 듯 드러나지 않는 바다사자를 그렸단다. “바다사자도 말없이 아이 곁을 지킨다. 어른은 그런 존재다.”
“많은 그림책 작가들이 자기 어깨 위에 보이지 않는 아이를 앉혀 놓고 책과 함께 놀곤 했지요.”라는 말에서는 그가 어떻게 그림책 작업이라는 노동을 놀이로 승화시킬 수 있었으며 자신의 주 독자인 어린이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가 드러난다. 책에서 눈에 띈 매우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이 있다. 나도 처음 그의 명성 때문에 그림책을 보고 ‘어? 일반적인 아이들 그림책 느낌이 아닌데? 이건 뭐지?’ 싶었던 것처럼 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귀엽고 따뜻한 내용과 거리가 있는 그림을 그리는지 자주 질문을 받는가 보다. 그에 대해 작가는 “‘귀여워’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귀여움의 대상보다 항상 우위에 있다.... 귀여움의 대상은 자기 의견이 없어야 귀엽다. 의견이 있더라도 ‘귀여운 정도’의 의견이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아이들을 위에서 내려다 보고 ‘귀여운 -’ 존재라 생각하며 ‘그러니까 너희는 이렇게 쉽고 귀여운 내용이나 읽어야 해,’ 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수지라는 작가는. 이런 사람이어야 그림책 작가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 땅의 교사들, 청소년 소설을 쓰는 작가들,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 애쓰는 어른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