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강준만은 ‘여름 휴가 때 읽고 싶은 책’ 같은 기획이 좀 웃기다고 했다.(강준만이 웃기다고 하진 않았을테고 그 비슷한 뉘앙스였겠지만)굳이 평소에도 안 읽는 책을 휴가 때 챙겨가서 읽을 수 있냐는 것이다. 절반 정도 공감한다. 진득한 책을 읽기에 휴가는 너무 짧고 책 바깥의 유혹은 노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휴 첫날(묵은내가 나는 페이퍼) 옥찌들과 영화를 보고 곧바로 향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지금 있는 곳에선 비치할 의향이 없어 보이는 책을 읽으러. 그래서 뭔가를 읽기는 했다.






박상미가 옮긴 책은 놀랍게도 대부분 괜찮다(저자가 아니라 번역가의 책이 괜찮은건 우연이다. 번역하고 싶은 책을 기획한건지도.) 그녀가 쓴 <뉴요커>나 <취향>은 좋지만 그렇다고 아주 좋지 않다고 봤을 때 <사토리얼리스트>나 줌파 라히리, 예술에 관한 번역 책은 썩 괜찮았다. 번역을 잘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가 번역하는 책만 골라 봐도 재미있는 것이다. 그 중 <빈방의 빛>은 호퍼의 그림을 시적으로 해석했다는 마크 스트랜드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나는 아직 애기라 (요새 a랑 ‘아치 아직 애기라 배 나와있는거지’, 등등의 애기 놀이를 하고 있다. 남 부끄러워라. 연애할 때 여성의 애칭을 아이나 동물에 비유하는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없는건 아니지만 재미있는걸 어떡해.) 그림을 보는 눈이나 감성이 부족하다.
예컨대 김혜리 기자의 말처럼 내가 감독은 아니지만 감상하는 입장에서도 기적 같은 일(나만의 감식안을 갖고 뭔가를 발견하거나 내 시각이 살아있는 것)은 더디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서 나보다 좀 더 잘 보고 잘 읽고 잘 쓰는 사람의 글을 보는 건 즐겁다. 마크 스트랜드가 바로 그 사람인지는 두고봐야겠지만.
더 나은 화질이 범용한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좋은 영화의 위대한 모멘트 위에 덮인 더께를 걷어낼 수는 있다. 대만에서 디지털 복원한 허우샤오시엔의 <연연풍진>을 보러 갔다. 자, 그래서 기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돌려주었는가. 첫 장면의 기차가 터널로 들어갈 때 객차 안에 수묵처럼 번지는 어둠, 그것이 걷혔을 때 드러난 소녀의 얼굴에 눈물이 만들어놓은 얼룩, 소년 소녀들의 몸무게를 실은 구름다리의 미세한 출렁임. 때로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이 전부다. 거장들의 영화를 볼 때 종종 나는 혼란에 빠진다. 저런 이미지는 우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옳은 방향을 알고 있다면 기적조차 그 감독을 돕는 것일까. 아마 기적은 모두에게 공평히 만연돼 있으나 그것을 볼 수 있는 밝은 눈과 찍을 수 있는 유연한 손, 찍힌 것 중 중요한 것과 불요한 것을 가려내는 지성은 선택된 자만의 몫이리라. - 씨네21 중에서
김혜리 기자가 글을 잘 쓰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인터뷰집에서 느꼈던 어떤 갈증 같은게 그녀의 일기에선 보이지 않는 점이, 이렇게 어느 순간 마법처럼 그녀에게 반하는 구절을 만나는게 좋다.

골목의 글을 읽고 싶은데 황인숙의 책은 자리에 없었다. 그러다 연휴 끝나고 서재를 돌아다니다 빔 밴더스의 사진집에서 추천 마법사가 소개한 이 책을 발견했다. 정말 이 골목을! 여기엔 또 어떤 골목들이 있을까. 그리고보니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의 사진을 김기찬씨가 찍었다. 오, (비틀즈 코드에서처럼 오, 춥다)

홍대의 골목 이야기는 지금 읽고 있다. 이태원 주민일기에서 모자랐던 점을 보완한 기획도 아닐텐데 건축가며 음악하는 사람들이 털어놓는 홍대 이야기는 홍대가 아닌 '홍대 앞'의 공간을 차고 넘치는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결국 재미있고 잘 쓴 글이란 애정을 느끼는 대상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데에서 시작하는게 아닐까.
너무 좋아서 넘침을 표현했다가는 과잉의 맛만 볼 수 있고 의무적으로 짓는 글은 읽는 사람도 재미없다. 이건 글의 맛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진작 알아채고 있었겠지. 역시 뒷북?
http://10.asiae.co.kr/Articles/new_view.htm?sec=news3&a_id=2011071304103072701
혹시 이 기사를 본 사람이 있을까. 10아시아 김희주 기자의 글맛도 글맛이지만 정재형이란 사람을 새침하고 사랑스럽게 보여주는 행간의 느낌은 여간 간지러운게 아니다. 내처 그 유명하다는 유희열의 라천 정재형편까지 듣는데, 아 나는 라디오를 건성으로 들으며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프로그램은 전파를 공공의 목적으로 쓴다기보다는(말로만 그런다는거 다 안다만) 오로지 정재형을 위한 정재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방송이었다. 그것도 무척 이기적인 방식으로. 쿵짝을 맞추는 유희열이며 새침한 재형씨가 어쩜 그렇게 재미있던지. 적극 추천!
이 기세를 몰아 정재형이 유영석이랑 피아노 배틀을 연-자신들도 쑥쓰러운 듯 자꾸 웃으며 대결한다고 막막 그러는-유투브 영상을 봤다. 거기서 소개된 정재형의 책. 김치 소포 얘기로 설렁설렁 이어지는 책에서 정재형의 어떤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다시 읽을 기회를 만들어야할 것 같다.
연휴는 짧았고, 세 자매끼리 부침개를 부치는건 정다...ㅂ기보다 난장판-금지어를 만들고 농땡이 피우는 사람에게 벌금을 매기고 그랬다- 반가움과 시샘과 기깔난 우월감 같은게 뒤죽박죽 섞이는 느낌이었다. 모처럼 보는 친척들 목소리는 너무 컸고 나는 며느리도 아닌데 괜히 좀이 쑤셨다. 그러게, 연휴 때 무슨 책이란 말인가.
연휴가 끝나고 내 책을 반납해준 옥찌는 이 한마디를 남겼다.
“이모 내가 그 책 갖다주느라 힘들어 죽는줄 알았어.”
옥찌들 페이퍼를 일년도 넘게 못썼지만, 나는 옥찌들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