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면접을 봤다. ‘꺽’할만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횡설수설대다 시원섭섭하게 끝낸 면접이었다. 이런 질문에 답변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을까 싶은 생각은 찰나, 열정 있고(보고 있나 면접관들) 성실한데다 능력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런 사람인지 나조차 알 수 없는데 면접관들이라고 알 수 있을까. 게다가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그런’ 노력을 한다고 ‘그렇게’ 볼 수 있을지는 또 별개의 문제.

 


그럼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m과 김경,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방 이론’을 촘촘히 적어내려간 이 책-방을 통해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시도며 몇가지 방법론은 재미있다.-에선 바람둥이 얘기가 나온다. 상대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하려는 바람둥이가 원래의 자기 모습이 아니라 좀 더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꾸며 상대를 대하는데 이 지점이 좀 웃기다. 이럴 경우 우리가 예상하는건 바람둥이가 부리는 수법에 상대방이 홀딱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책에선 상대방이 바람둥이의 어설픔을 알아챈다거나 꾸민 모습에 반감을 갖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다른 사람에게 나를 알릴 수 있는 묘안은 따로 없는걸까.

  스눕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과 다른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 얘기도 나온다. 예컨대 ‘나는 이러하다’란 개념이 있을 경우 좀 더 긍정적이거나 나은 평가를 받더라도 쉽게 수긍할 수 없다고 한다. 이유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와 다르기 때문. 아마 면접에서 천지개벽할 일이 생겨 그들이 나를 뽑았다면 나 역시 이럴 수는 없는거라며 나도 모르는 뒷거래가 있다거나 조건이 생각보다 안 좋을 수도 있을거라며 의심 했을 것이다. 

 결국, 그런 것이다.



   새로운 사람이 왔다. 나는 선배가 됐다. 이제야 나의 어떤 점을 사람들이 그렇게 마뜩치 않았는지 짐작이 간다. 물론 짐작 간다고 해서 내가 확 변하거나 큰 깨달음을 얻어 같은 시행착오를 저지르지 않으리란 법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어쩌면 그보다 쉽게 변하기 마련이니까. 대신 짐작으로만 알고 있던 나의 문제점이 뭔지를 힐링캠프에서 이경규가 ‘눈치없는 편이죠’라고 옥주현에게 직접적으로 묻듯 주위 사람에게 물어봤다.


 J는 자기만 느꼈을 게 분명하지만 딱 한 가지 있다면서 말을 꺼냈다. 타부서의 업무를 도와주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좀 효율적일 것 같아 내가 건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담당자 표정이 소위 말하는대로 ‘썩었다’고 한다. 이 말을 하고선 J는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아치, 아까 내 얘기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마요. 난 아치가 그런 말한 게 나쁘단 게 아니라 상대가 그걸 받아 주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어요. ‘아치 잘못했어요.’ 라고 한 게 아닌걸 알아줬음 해요. 난 아치가 자기 의견 말하는거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한텐 언제든지 말해요. 난 아치가 상대방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고 자기 일처럼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와, 정말 예쁘지 않나요? (막 자랑하고 싶음.) 그 말에 그렇게 신경 쓴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겠다(나도 단련됐다) 싶었는데 J 말을 들으니까 괜히 힘이 솟는다. 얼마 전에 오랜 친구는 언젠가에 대한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그때 아치도 힘들었을텐데 자기를 위로해줘서 고마웠다고. 분위기도 못 읽고 눈치도 없지만 어느 순간에 발휘되는 아치력 같은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a의 모임에 갔더니 다들 나보고 형수님이라고 한다. 괜찮은 호칭이 아니다. 남자들의 모임에서 그들이 서로를 호명하는 명칭의 여자형이라서, 독자적인 개인은 지우고 누구의 여자친구로 있는건 별로라, 형수라는 호칭 안에 박혀서 남자들의 다른 여자친구와 맺는 관계도 여러모로 불편하단 얘기는 안 하고 ‘그냥 좀 그래요’ 했다. 나는 아치씨란 말이 좋다고. 그래서 비로소 나는 아치가 됐다.



 

    나보다 내 취향을 잘 아는 친구는 내게 이 책을 선물해줬다. 그리곤 부탄에 가고, 부탄 남자랑 결혼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평소에 이 친구의 똑똑하고(헤헤) 사려 깊은 면을 좋아했는데 가끔씩 이렇게 엉뚱한 면도 있다니 ‘아주 놀랍다’까지는 아니고 누군가를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지어선 <절대> 안 되겠구나 싶다. 요즘 들어 사무실 사람들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실실 웃고 환하게 인사하는 나를 보면서 더더욱 그렇단 생각이 든다.




 의례적인 관계에서 보여줄건 진심이나 서툰 표현이 아니라 형식에 맞는 표정과 호응이다. (이분법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좀 더 얘기하자면) 그렇게 힘을 빼가며 형식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관계라면 상대가 어떤 사람일거란 예상 대신 모호한 어떤 느낌이 표현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와 관계를 맺는 상대방을 나름대로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에 관계가 갖는 특별한 힘 같은게 (아치력 이런거 말고) 발휘되지 않을까. 물론 오랜만에 책 선물을 받았다고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는 없지만.

 고마워요, 똑똑한 여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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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9-0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원래 제목이 더 좋다. 요래지내요 ㅋㅋㅋㅋㅋ 아치력에서 빵 터졌어요. 아치력이래. ㅋㅋㅋㅋㅋ

부탄 남자랑, 그래서, 결혼할 겁니까?

J의 장문메세지, 좋은데요. 사는데 매시간 매분 매초 의미를 부여할 순 없겠지만, 또 의미를 찾을수도 없겠지만, 가끔 어떤 사람들 때문에 살맛나는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나를 나로 봐주거나 혹은 내가 모르는 나를 일깨워주는 그런 사람들이요.

직장에서 후배로 지내는 것 만큼이나 선배로 지내는 것도 어려워요, 아치. 어떻게 해야 현명한 선배가 되는지는 시간이 흘러도 잘 모르겠어요. 잘해봐요, 우리.

Arch 2011-09-08 11:49   좋아요 0 | URL
진짜? 역시 유머란 의도하지 않을 때 더 재미있나봐요.

우선, 부탄을 가야겠죠? 책을 읽다보니 자꾸 <오래된 미래>가 떠올라요.

맞아요. 나도 그런 사람 되고 싶어요. 음... 그리고 정말 혼나고 배우는게 낫지 선배가 되어서 뭔가를 알려주고 충고하는건 체질상 안 맞는 것 같아요. 혹은 한번도 해본적 없어서 낯선건지도 모르겠고.^^ 암튼 우리 잘해봐요

nada 2011-09-07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치력, 빵 터졌어요.ㅋㅋ

부탄 남자 말고, a님이랑 결혼해요!
(결혼이 뭐 좋다고, 남들한텐 이리 떠밀고 싶은지.ㅋㅋ 그래도 결혼이란 단어, 예쁘고 설레요.)

아치님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네요.
J씨도 있고, 책 보내주는 똑똑한 여자 사람도 있고.
괜찮은 여자예요, 당신!

Arch 2011-09-08 13:10   좋아요 0 | URL
아치력이 웃겨서 기분 좋아요^^

저도 그런 생각해봤어요. a를 닮은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 어떨까. 아냐, 코는 내가 더 오똑하니까 나를 닮고 어쩌고. 이런 생각을 하다가 혼자 깜짝 놀라요. 맙소사, 저는 결혼할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는데 결혼이란 말은, 어쩌면 약간 낭만적인 분위기는 사람을 이렇게 훅가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동안은 결혼 일찍 안 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요샌 내가 누군가와 오랫동안 같이 산다면 정말 이것저것 다 봐서 서로 타협하고 양보할 수 있는지, 나는 어디까지 포기가 되는지 잘 봐야겠다란, 그러니까 결혼에 대해 좀 호의적이 됐달까. 그런 상태예요.

꽃양배추님, 고마워요. 오늘 누군가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서 기분이 별로였는데 꽃양배추님 덕분에 좀 나아졌어요.

pjy 2011-09-07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력! 괜찮은데요^^ 요래 선물받고 지내시는군요~

Arch 2011-09-08 13:11   좋아요 0 | URL
요래 지내고 있어, 에 방점이 찍혀야했는데 결국 제 자랑만 했나요~^^

비로그인 2011-09-0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력, 유행 예감인데요? ㅎㅎ

저도 놀러와봤어요 Arch님! 여기저기서 [부탄과 결혼하다]가 눈에 띄니까 막 읽어버리고 싶네요. 지금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만 7권이고, 문학동네에서 온 책도 있는데 말이에요. 어제는 새벽 3시까지 날밤 새다가 곯아 떨어지고... 독서도 체력으로 하는 건가... 요새 그런 생각이 드네요 ( '')~

Arch 2011-09-08 13:14   좋아요 0 | URL
히~

저도 10권 넘게 빌렸어요. 반납만 하고 올거라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이것저것 빌리고 싶은게 너무 많아요. 다 읽으면 문제없겠지만 또 그렇지도 않고. 히잉~ 맞아요, 독서는 체력이죠. 요새 눈이 자꾸 침침해져서 저도 이 말 절감하고 있어요. 누워있으면 책이 휘리릭 넘어가는 독서대가 있으면 좋겠어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