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씨의 스타일 제안

 세무서에서 꽤 세련되고 어여쁜 여자가 왔길래 J씨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말했다.
- 저기 여자분 예뻐요.
 J씨는 무심하게
- 그래서?
한다.
- 아니, 예쁜 여자 보면 좋고, 보고 싶지 않아요? J씨가 자꾸 나를 보려고 하는 것처럼.
이라고 했더니 한참 생각하더니,(정말 심각했다.) 아치는 머리 올리는게 괜찮다고 한다. 그게 더 이쁘냐고 하니까 역시 한참 더 생각하더니, 머리 내리면 아줌마 같다고 조언해줬다. J씨는 참 멋진 사람이야.

* Ch의 못된 남자론

 밥을 먹고 있는데 다른 나라에서 온 B가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도 않고선 고개를 끄덕이자 J가
- 못알아들은 말은 다시 물어봐도 돼. 그런데 고개만 끄덕이면 상대방은 알아들은줄 착각하잖아.
 등등의 얘기를 하자, 옆에서 Ch씨
- 나한텐 다시 물어보지마. 졸라 짜증나.
한다. 내가 Ch보고 못된 남자라고 하자, J씨도 거들고, 본인 스스로도 자기는 못된 자식이라고 신이 나서 얘기를 하는거다. 못된 남자는 나쁜 남자(이 말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와 달라서 정말 못되고, 못나고 이런건데도 좋댄다. 이 사람은 자학도 꽤 거만하게 잘 한다.
 그랬던 Ch가 내 옆자리로 와서 프린터에 이면지를 넣어서 출력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건성으로 알려주자, 건성으로 집어넣더니 안 된다고 투덜거린다. 그러면서 그가 수그리는데, 그의 바지와 허리 사이로 보이는 팬티는 어찌나 헐렁하던지. Ch, 팬티 보인다라고 알려줄 수 밖에 없었다.
- 왜요. 섹시해서?
- 아니 더러워서.
아, 더러워서, 더러워서. 아치 혼자 웃겨 죽겠단다.

* J씨의 귀여움

 관리팀장을 졸졸 쫓으며 사장 언제 나가냐고 물어보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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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9-2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웃겨. 나는 아무래도 J씨의 팬이 될 것만 같아. ㅎㅎ

Arch 2009-09-21 17:15   좋아요 0 | URL
^^ J씨는 꽃무늬를 좋아하고, 멜로와 슬픈 영화를 좋아해요. 다락방님의 그 뭐냐~ 비린내 남성상과는 좀 안 맞죠? 그런데 전 좋아요. 무척

Forgettable. 2009-09-22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삐지지 않았죠? ㅋㅋㅋㅋ

머큐리 2009-09-22 19:10   좋아요 0 | URL
ㅎㅎ 심약하신 뽀님...
아치님은 그리 약하지 않아요...(맞나??)

Arch 2009-09-22 23:22   좋아요 0 | URL
아휴, 삐진줄은 어떻게 알았을꼬^^

난 뭐 추접하니까~ 뽀님 더 도발할라. 워워~ 안 삐졌어요. 그냥 좀 궁금해서.

머큐리님, 그럼요. 내가 당신들 찜질방에 버린(이 말 해놓고 조마조마) 사람이야.

2009-09-23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9-23 11:43   좋아요 0 | URL
버려진 기억이 새록새록 한데 ^^+

Arch 2009-09-23 14:06   좋아요 0 | URL
뽀님, 그런 귀여움은 어디서 배우는거에요. 아아, 간지러워라~

휘모리님, 다음에 저를 버릴 기회를 드릴게요. 남김없이 버려주세요.^^
 

 * 잡문이 아니라 잡탕의 도가니

 리뷰를 쓸까말까 망설이다 관두기로 했다. 혼자 있는거 없는거 죄다 끌어다 설레발을 쳐놓고, 읽어보니 어쩌네 저쩌네 하자니 낯뜨거워서 원.
 책을 읽기 전에 막연하게나마 그녀가 제대로 썼을줄 알았다. 조금쯤은 엉터리 같은 '내 연애'도 지지받을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를 하기도 했다. 서문까진 괜찮았다. 인터뷰 하듯이 진행한 '이태원 걸'에 대한 내용도 나쁘지 않았다. 그 뒤로 방향을 잃었다. 사랑에 대한 경험을 써내려간 에세이인지, 스펙만 따지지 말고 제대로 연애를 하자는건지, 십대들에게 해주는 '언니의 충고'인지, 상담 코너인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김현진이니까' 다른 뭔가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책을 끝낼 수는 없는거라고, 나가는 말에서 왜 이랬는지를 얘기해줄거라고 믿었다.
 그녀가 할말은 다 했다는 듯이, 그래도 연애가 남는거라며 이상, 이상(종례 시간도 아니고)을 외치자 난 실망했다. 약간 실망스러웠던 부분들이 그녀 약력과 함께 배치가 되자 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쩌면 내가 지지하고 싶고, 좋아하고 존경하는 부분들은 치열하게 사는 그녀, 자기 모순을 긍정하고 껴안는 그녀였지 '그녀의 글'은 아닌가?
 아냐, '불량소녀백서'도 괜찮았고, 시사인과 한겨레에 쓴 칼럼도 좋았단 말야. 그럼 역시 이 책이 아니란 말인가? 내가 익히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내용들에 그녀 나름대로 살을 붙여 '김현진표' 이야기로 가공해주길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실패하는 연애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을 깊숙히 캐주길 바랐다. 어쩌면 내 바람이 너무 컸는지도 모르겠다. 얘기를 하려다 말고 딴청을 피우거나, 시대가 불우하단 얘기로 그을음을 내는건 약과, 이것저것 하려는 얘기가 많은건지 할말이 없어 짧게 끝내는건지 모를 난삽함은 '헤픈 여자'나 '토이남', '그녀 자신의 연애 이야기'까지 빛을 바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이 책이 맘에 들지 않았노라고 말하는 수 밖에.

* 알라디너의 추천

레이시즌님(간접)과 프레이야님(직접) 추천으로 읽은 책이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차라리 연극으로 봤으면 더 좋았을텐데란 아쉬움이 남는다. 책에 강렬하게 찍힌 '보지'란 문구를 책 제목에도 썼다면 판매율만큼이나 약간의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책은 과도하게 의욕한 여성 성기로서 보지를 말하지 않는다. 양다리 사이에 있는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보지가 아니라, 남성 성기가 지칭하는 상징적인 힘과 별로 다를게 없는 보지. 있는 그대로의 보지. 섹스할때만 살아나는 보지가 아니라, 질과 클리토리스 등등의 분절된 보지가 아니라 그냥 보지, 보지 이야기.
 입밖으로 보지란 말을 꺼낸 순간, 달콤한 쾌감이 느껴진다.

<여성주의 학교 간다>는 성적 자기 결정권과 한국 여성주의 운동이 '성매매특별법'을 계기로 담론이 와해되는 과정을 다룬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부분이 좋았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자신이 성적인 상황에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게 아니다. 자기 선택이 강제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그런 권리 자체가 무의미하니까. 새로운 인식이다. 좀 더 정리가 되는대로 리뷰를 써보도록 해,야,겠,다란 다짐만.
 하지만 유전자 복제의 윤리성과 근대/탈근대와 페미니즘 내용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전자는 평이했고, 후자는 전문적이었지만 두서가 없었다. 책에 대한 얘기를 할때면 조심하게 되는 부분이 내가 이해 못하거나 오독한걸 갖고 저자가 횡설수설한다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한번 더 재독 후 리뷰를 쓰면서 찬찬히 정리한다면 다른 부분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판단유보.

* 보물, 책세상 만세
 
<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 그냥 집어든 책인데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춘향전 이야기에서부터 근대의 하녀와 여귀, 양공주까지. 이건 다시 읽은 다음에 꼭 리뷰를 쓰고 싶다.
 <여성의 정체성>은 여성철학에 대해 알 수 있는데다 낯선 자들과의 연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하니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 해야만 하는 독서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을 슬퍼하는건 그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슬픈 본능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그러니까 난 잘 몰랐다. 그래서 <인물과 사상, 김대중 신드롬>을 읽기 시작했는데 정리가 잘 안 된다. 강준만 선생님이 하는 얘기를 쭉 읽어나가면서 생각을 정리하다가도 맥락이 툭툭 끊어지기 일쑤다. 반DJ 정서가 그토록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던 것조차 몰랐던 무지렁쟁이 아치. 꾸준히 긴호흡으로 읽어나가야지.


  회사 카메라(애석하게도 삼성꺼다)를 갖고 사진을 찍으면서 똑딱이로 찍을때보다 궁금한게 많아졌다. 그래서 사진학의 고전인 <사진학 강의>를 보려고 하는데 검정색은 글씨고, 흰색은 종이인지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무려 3년 전에 사놓고선 구겨진 뭔가를 고정시키는데 써먹고 앉았는 아치다. 꾹 참고 읽어서 옥찌들도 더 예쁘게 찍고, 카메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싶다.

 전에 지하철에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는 여자분을 봤을 때 집에서 태평하게 자고 있는 내 책에게 미안했던적이 있었다. 책의 무게도 무게지만 지하철에서 깨알같은 글씨를 읽는 그녀의 정성도 정말 대단했다. 난 종이가 코팅되어 번들거려서 글씨가 안 보인다고 몇년째 이 책을 방치해뒀는데. 읽어야지, 막연하게 그림이 좋다 말고 그 속에 있는 이야기들도 들여다봐야지.

* 소설과 시


 이스마일 카다레의 작품은 처음이다.  호메로스를 공부하는 연구원이 알바니아의 작은 마을로 오면서 그들을 스파이로 착각하는 군수와의 일들을 그렸다. 뒤틀린 유머와 어긋나는 상징, 자기만 모르고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직 이 작가의 매력이 분명하게 와닿지는 않지만 과도하지 않은 디테일과 자연스러운 전개가 맘에 든다.

 왜 심보선의 시집 대신 김경주의 시집을 샀을까. 벌써 세번째 도서관에서 그의 시집을 대출했다. 내 책이 되는 순간 헐렁하게 읽어댈게 분명하기 때문에 소유하려는 욕심을 꾹 참고 있다. 심보선의 시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과도한 키치적 잡다함. 페이퍼를 쓰다보니 벌써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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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9-20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도한 키치적 잡다함보다 느낌은 훨씬 좋다고 판단되는데요..ㅎㅎ

Arch 2009-09-20 19: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머큐리님^^

프레이야 2009-09-2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진 책, 뒤로 갈수록 아쉬웠던 점 저랑 같아요.^^
첫장은 그런대로 좋았는데 말에요.
그래도 살아남아라, 이말이 제일 기억나요.

Arch 2009-09-20 19:5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그렇죠?
그럼 어떻게 살아남으라는거야라고 혼자 궁시렁거렸던 느낌이 떠올라요.

2009-09-20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0 1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0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9-09-20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스마일 카다레는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인데,
Arch님도 읽으셨다니 반가운데요.^^

Arch 2009-09-20 19:54   좋아요 0 | URL
전 람혼님 댓글이 더 반가운데요! 마지막장을 덮은 순간 호불호가 정해지겠지만 지금도 꽤 괜찮아요.
'너무나 좋아해요'란 느낌 좋아요^^

비로그인 2009-09-20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잡탕의 도가니가 정말 좋아요. 뭐랄까, 책들이 냄비 속에 보여서 `우리는 즐거운 해물 잡탕 가족이랍니다. 맛있게 끓여주셔요!' 하고 노래를 부를 것 같아요.

Arch 2009-09-20 19:56   좋아요 0 | URL
크~ 아, 쥬드님. 전 좀 걱정했어요. 이렇게 값싼 페이퍼를 써대면 누가 리뷰나 제대로 쓰고 좀! 이렇게 생각할 것 같고 그랬거든요. 해물 잡탕 가족을 먹으면 아프지 않을까요, 란 개떡같은 유머만 생각나고. 정말 좋다니, 저도 정말 정말(몇배는 더 많이) 좋고 감사해요.

다락방 2009-09-2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김현진의 시사인 칼럼이 좋아서 무언가 기대를 많이 했던가봐요. 그녀가 쓴 연애서라면 뭔가 다를줄 알았거든요. 신선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특별하진 않았던 연애서에요. 그런데 이런 느낌을 Arch님도 가졌다니 윽, 막 반갑지 뭡니까!!

Arch 2009-09-20 19:58   좋아요 0 | URL
히~
'좋아요'에서 맘이 동하는 것도 좋지만, 별로에요에서 이어지는 느낌이 비슷한 것도 은밀한 공모자 같고 그래서 괜찮아요. 반가워요, (다락방님) 와락!

무해한모리군 2009-09-2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서 라주미힌님이 억지로 그 시집을 가져갈때 심보선 시집을 가져가 주지 않은거야 흑흑..
아 멋진 연애서(그것도 에세이류로)는 만나기 쉽지 않은듯해요. 연애지상주의가 신물나면서도 너무 쿨한 놈도 인조인간 같아서 별로고, 좀 질척이는 스스로에 대해 솔직하게 쓰면서도 인간관계 중 하나로 잘 정리해주는 사람 없을까?

Arch 2009-09-21 11:50   좋아요 0 | URL
내것이 되는 순간 여유가 생기거든요. 안 읽는다는 소리에요. 난 자꾸 보고 싶은데.
맞아요, 맞아! 아, 막 쓰고 싶은 의욕이, 질척이기만 했던 연애에 대해 쓰고 싶은 열의가 생기는데요? 히~
 



이걸 다 먹을거냐고 물으면, 예.
다 먹고 바로 잘거냐고 물으면, 예.

금요일이잖아. 금요일이니까 요구르트도 먹고, 황태도 먹고 약과까지 다 먹는거야.
차리고보니 차림이 좀 그렇다.
스타우트보다 첫맛이 약간 미지근하게 톡 쏘는 맥스. 아, 맥스. 남자 이름이야. (벌써 취한게냐) 스타우트를 먹을걸 그랬나. 뭘 먹든 취하기만 하면 되지 뭐. 맥스, 난 아치야. 히~

음주 후에는 잠 올 때까지 영화를 보려고 한다. 금요일 밤, 어디 시끄러운데라도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누군가의 푸념이라도 들어주고 싶은 날이다.

잘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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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9-2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잤어요? :)

Arch 2009-09-20 20:01   좋아요 0 | URL
으응^^

무해한모리군 2009-09-2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왜 이제사 봤지. 금요일날 난 떡뽁이랑 맥주 먹고, 이 뺀데 덧나서 고생중 ㅎㅎㅎ

Arch 2009-09-22 11:25   좋아요 0 | URL
못살아, 조금만 참지! 많이 아프지 않아요? 호~ (내가 닭살 돋아서 원^^)

무해한모리군 2009-09-22 13:04   좋아요 0 | URL
난 덧날줄 몰랐지 히~
덧난 보람이 있는데요, 아치가 호~도 해주고 으흐흐흐

Arch 2009-09-22 14:52   좋아요 0 | URL
히*_*;;

봉선화연정 2009-10-04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금요일밤에 혼자 맥주먹으면서 영화보는걸 즐겼더니
남은것 한움큼의 똥배뿐이였어요

Arch 2009-10-05 00:36   좋아요 0 | URL
으응, 그러니까요^^ 이런 살가운 작명이란!
 

 월요일쯤 써야하는 페이퍼를 이제야 쓴다. 바빠선 아니고, (바쁠 리가 없잖아.) 약간의 신비주의 전략? 히~

 |   

 책을 읽는다길래 무릎 시려울까봐 담요를 덮어줬다. 책 놓고 보라고 베개도 놔주고. 옥찌가 두번이나 고맙다고 하면서 '아치도 쓸만하네'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책 장판떼기
 책으로 바벨탑을 세울 셈인지. 어떻게 키보다 한참 놓은걸 세웠냐고 물었더니 의자에다 소꼽놀이 상자를 받쳤단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다. 다음엔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그래도 멋있지 않냐고 물어본다. 멋지네.

   

  그런 다음, 만들기를 했다. 종이컵 전화기!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종이컵에 붙인 후 실과 성냥개비로 연결하면 끝. 옥찌들이 뭔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 예쁘다는 생각만.

 

 색칠을 해서 오린 다음에 풀칠로 종이컵에 붙이면 완료. 종이컵 전화기 성능은 좋지 않았지만 둘이서 아주 신이 났다. 방을 자꾸 돌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동 중에 전화를 받는다'는 것이다. 손전화를 아는거야?


 옥찌들이 노는 사이 난 방정리를 했다. 예전에 선물 받았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 핸드폰줄, 오래 전에 받았지만 아직도 보지 못한 영화 CD, 몽당연필, 쓸일이 없을 것만 같은 콘돔(얜 할인할 때 사놔서 꽤 많다. 혹시 필, 요, 하, 신 분. 알아서 사서 쓰세요.) 온갖 잡동사니들이 숨어있다가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아무것도 버릴 수가 없다. 필요할 때 눈에 띄기만을 바랄 수 밖에. 방정리라기보다는 물건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오늘 학원 갔다가 집에 오니 지희가 엎드려서 책을 보고 있었다. 옆에 수첩이 있길래 봐도 되냐니까 흔쾌히 허락해줬다.
- 어어 옥찌 이거 일기야?
- 아냐, 내가 그냥 쓴거야.
- 아......
 그런데 일기 같다. 특히 좋습니다, 부분은 꼭 어른들이 '누구네 거참 좋습디다.'투로 읽힌다. 그 투로 읽히든 말든 상관없이 옥찌는 막내 이모에게 저 편지를 전해주라는 당부를 남기고 책 속으로 빠져 들었다. 나한테도 편지 써주라고 졸랐더니 귀찮은 표정으로 알았다고 했다. 엄마가 '헨델과 그레텔'-우리 엄마식이다.-을 읽어주니까 누구한테도 방해받기 싫은건 알겠는데, 정말 '아치 하는거봐서'가 똑똑 묻어나는 표정은 치~

 자야겠다. 이번주만 벌써 두번이나 내려야할 곳을 지나서 헐레벌떡거린데다 잠 안 잔다고 뾰루지까지 알차게 생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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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9-18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잘 지냈꾼요. 난 이번 주말에 인천가요~ 30년만의 여고동창회!^^

Arch 2009-09-18 10:25   좋아요 0 | URL
네네.여고 동창이라~ 노래 생각나는데요. 아주아주 예쁘고 근사하게 꾸미고 나가요.
-이봐, 내가 순오기야.
이렇게^^

다락방 2009-09-18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콘돔 남은거 달라고 하고 싶다. 그렇지만 저..쓸 일이 없어요..히잉 ㅜㅡ

Arch 2009-09-18 12:51   좋아요 0 | URL
저 문구는 '누구'를 표적으로 한 내용입니다^^ 지속적으로 섹스할 상대가 없는 싱글들 만세!
 

  온갖 잡다한 일을 한 연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난 무덤 속에 들어갔다가 다 늙은 후에 기어나오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러웠다. 내가 할줄 아는건 아무 것도 없었고, 나이는 먹었고, 남들이 알아줄만한 경력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조금 느긋하게 살자, 다르게 보자라고 생각을 먹어도 난 루저일 뿐이었다. 게다가 집에 얹혀살기까지 하는 루저. 

 졸업하기 전까지 난 평생 알바를 하면서 책보고 글쓰면서 살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노후나 미래를 준비하는건 터무니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인생은 장기전인걸 그때의 아치가 알리가 있어야지.) 전에도 말했지만 남들이 공무원 공부하는걸 보고선 콧방귀를 뀌기도 했다. 새파랗게 젊은데 대체 왜 그토록 안정에 목을 메는지 한심하기까지 했다. 친구들이 하나둘 공무원이 되고, 내가 배척한 영역에서 자질구레하지만 달콤한 일상들이 펼쳐지는걸 보고 뜨끔했다. 난 공무원이 되어버리면, 회사에 다니면 그 다음엔 늙는 일 밖에 없는줄 알았으니까. 그것을 무척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일하는걸 지겨워하는 것만 봤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선 알리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때 한 선배는 술 먹을 때면 날 붙잡고 자신에게 해야할 질문인게 분명한 얘기를 내게 묻곤 했다. 나중에 뭐가 될거냐고. 초등학생도 아닌데 뭐가 될거라니, 피식 웃고 말면 될 것을 정말 뭔가 되고 싶은게 없었던 난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대신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겠는데, 누가 하라는대로 하면 좋겠는데, 그것대로 아니란 것도 아는데...... 아무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선배가 그렇게 태연한 낯으로 물어보는게 잔인했다. 난 비겁하게 울면서 그 질문을 피했다.

 막연하게 산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까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농사를 한번도 지어본적이 없고, 내가 정말 농사를 지을 수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모든건 공상일 뿐이었다. 모든건 가능성만을 꿈꾸는 시도일 때가 많았다. 물론  항상 우울했던건 아니었다. 20대 초반의 알바로 색다른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돈이 생기면 구두쇠처럼 모으기도 했고, 잡다한 일처럼 잡다하게 남자를 만나기도 했다. 집안 사정을 이유로 뭔가를 해야한다는 당위를 회피하기도 했다. 여행 다닐 엄두도 못낼 정도로 답답하고 바보같은 시간. 나즈막하게 언젠가는 잘 될거야라고 속삭였지만, 난 잘 알고 있었다. 잘 될 일이였으면 진즉 잘 됐을거란걸. 이유들이 많아졌고, 변명이 많아졌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의 명함이 정말 부러웠으며, 알바로 살기엔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에 염증이 날대로 나있었다.

 그즈음에 난 누가 뭐하냐고 묻기만 해도 날을 세우며 뻔한 질문만 한다고 질책했다. 자유롭고 싶다며 무직을 '선택'했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뭘 할지 몰라서 답답했고, 걔중에 잘하는걸 생각했다가 한숨이 나와 먹먹해지기 일쑤였다. 안다. 이게 다는 아니라는걸. 잉여 시간에 뒹글거리며 잘 놀았고, 해놓은건 없지만 하고 싶은 것들을 찔러보느라 불안하면서 떨렸던 순간들도 많았다는걸. 청개구리 같아서 안정적인게 싫었던거지, 어쩌면 안정을 바탕으로 좀 더 넓게 팔을 벌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내가 뭘 잘하고,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애초에 갖은 맘을 헌신짝처럼 내팽겨치고, 직장 열심히 다니고 돈 많이 모아서 어떻게 어떻게 살아봐야겠다란 생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직장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살고, 뭔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게 좋은건지, 예전처럼 순간을 즐기겠다면서(그 순간의 눈꼽만큼도 맘껏 느끼지 못했으면서) 무리수를 두는게 나은건지.

 분명한건, 조금씩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겠다는 것이다.

 난 버스 앞좌석에 앉아 노을이 지거나 아침 해가 창문에 부딪히는걸 보길 좋아하고(자는 경우가 더 많지만) 저녁 무렵에 자전거로 바람을 타고 다니는걸 좋아한다. 옥찌가 내게 와서 몸을 부비는걸 좋아하고, 골목길과 사람들의 뒷모습, 간판, 나이들어 오래된 것들, 하늘, 나무, 초록, 빨강, 나를 사진으로 찍는걸 좋아한다. 술술 넘어가는 책도 좋아하고, 끙끙대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아치 장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책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의 스타일을 좋아하고, 자의식 따위는 없지만 보기에 그저 예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 S와 통화하는걸 좋아하고, M과는 문자하는걸 좋아하며, 가끔 M과 통화를 할때면 후회할거 뻔히 알면서 온갖 얘기를 다 털어놓는 나를 좋아한다. 물론 이 둘을 모두 만나서 쿵짝맞는 대화를 나누는게 더 좋다.  인터코스보다는 침대 위에서 하는 행위들을 좋아하며, 누군가 노래를 부르거나 뭔가를 읽어주는걸 좋아한다. 노래 부르는걸 좋아하고, 얼굴이 빨개질때까지 춤추는 것도 좋아하고, 나만 맛있는 요리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아직 미각이 덜 발달한 옥찌들이 가끔 잘한다고 칭찬 해주긴 하지만)
 그리고, 일기장이 아니라 누군가는 내 글을 읽어볼 수 있는 이 공간이 좋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 참 좋다. 이 순간만큼은 진짜다.

 치열하게 살지 않았고, 열정과 젊음을 불태울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좌충우돌 뒤죽박죽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조금씩 알 수 있으니까, 밥 먹고 배 부르면 끝이라고 하는게 아니라 살도 찌고, 피도 돌고, 일어나 걸을 힘도 나니까. 그럼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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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9-18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엄쉬엄 살자가 인생 모토인 나같은 인간도 있어요.
아치 회고록도 써주세요 ^^

Arch 2009-09-18 09:24   좋아요 0 | URL
으음... 일년 다녀야해요! 이거 도전인걸요.

무해한모리군 2009-09-18 09:50   좋아요 0 | URL
참 미각이 발달한 내가 먹어본 결과도 맛이 있어요.
그리고 아치님이 오바하는 것도 좋아요.
(담엔 책을 읽어주어야겠어요. 전 책을 읽어주는게 좋아요.
저번에 아치없을때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낭송하는 시를 억지로 들어야 했어요.)

Arch 2009-09-18 10:10   좋아요 0 | URL
ㅋㅋ 뜬금없는 휘모리님~ 제가 한건 부침개밖에 없었는걸요. 오바가 체질인가봐요~
음... 사람들 힘들었겠는걸? ^^ 응, 담에 꼭 '낭송'해줘요.

무해한모리군 2009-09-18 10:32   좋아요 0 | URL
진흙소라가 맛이 있었어요 ㅎㅎㅎ
그리고 아치님 이런건 뜬금이 없다라고 하는게 아니라 다정하다고 하는거예욧 호호

Arch 2009-09-18 11:48   좋아요 0 | URL
뻘소라? ㅋㅋㅋ 진흙소라라는 어감이 참 좋은데요.
그래요, 다정한 휘모리님.

다락방 2009-09-18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응. 왜 Arch님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나는 잘 알것 같아요. 왜냐하면 나는 이 페이퍼를 읽으면서 또 갑자기 Arch님이 막 막 좋아졌거등.

치열하게 살지 않았고, 열정과 젊음을 불태울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좌충우돌 뒤죽박죽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나도 그래요, 나도. 앞으로도 뭔가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뭔가를 찾기 위해 제가 막 또 열심히 살 것 같지는 않아요. 그저 지금처럼 이렇게, 살살 살 것 같아요.

저도 이 공간이 좋아요. 여기서 Arch님의 이런 글을 읽으면서 고개 끄덕이는 순간이 좋아요.

Arch 2009-09-18 12:50   좋아요 0 | URL
무슨 댓글을 페이퍼보다 더 좋게 달아요. 민망하게시리.
뭔가를 잘하지 못한다거나 그렇게 뛰어나게 잘하지 않는 이유들이 내 게으름이나 '막 사는 것'의 핑계로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맘은 있어요.
나도 살살 살래요. 어깨에 힘 좀 빼고, 좀 더 유연하게 살고 싶어요. '그 뭔가'가 작고 반짝이는 것도 될 수 있다면 내가 사는 지금과 나 자신이길 바라는 맘도 있고.

뷰리풀말미잘 2009-09-18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찜.

Arch 2009-09-18 18:08   좋아요 0 | URL
뭐가? 뜬금 미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