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잡다한 일을 한 연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난 무덤 속에 들어갔다가 다 늙은 후에 기어나오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러웠다. 내가 할줄 아는건 아무 것도 없었고, 나이는 먹었고, 남들이 알아줄만한 경력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조금 느긋하게 살자, 다르게 보자라고 생각을 먹어도 난 루저일 뿐이었다. 게다가 집에 얹혀살기까지 하는 루저.
졸업하기 전까지 난 평생 알바를 하면서 책보고 글쓰면서 살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노후나 미래를 준비하는건 터무니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인생은 장기전인걸 그때의 아치가 알리가 있어야지.) 전에도 말했지만 남들이 공무원 공부하는걸 보고선 콧방귀를 뀌기도 했다. 새파랗게 젊은데 대체 왜 그토록 안정에 목을 메는지 한심하기까지 했다. 친구들이 하나둘 공무원이 되고, 내가 배척한 영역에서 자질구레하지만 달콤한 일상들이 펼쳐지는걸 보고 뜨끔했다. 난 공무원이 되어버리면, 회사에 다니면 그 다음엔 늙는 일 밖에 없는줄 알았으니까. 그것을 무척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일하는걸 지겨워하는 것만 봤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선 알리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때 한 선배는 술 먹을 때면 날 붙잡고 자신에게 해야할 질문인게 분명한 얘기를 내게 묻곤 했다. 나중에 뭐가 될거냐고. 초등학생도 아닌데 뭐가 될거라니, 피식 웃고 말면 될 것을 정말 뭔가 되고 싶은게 없었던 난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대신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겠는데, 누가 하라는대로 하면 좋겠는데, 그것대로 아니란 것도 아는데...... 아무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선배가 그렇게 태연한 낯으로 물어보는게 잔인했다. 난 비겁하게 울면서 그 질문을 피했다.
막연하게 산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까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농사를 한번도 지어본적이 없고, 내가 정말 농사를 지을 수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모든건 공상일 뿐이었다. 모든건 가능성만을 꿈꾸는 시도일 때가 많았다. 물론 항상 우울했던건 아니었다. 20대 초반의 알바로 색다른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돈이 생기면 구두쇠처럼 모으기도 했고, 잡다한 일처럼 잡다하게 남자를 만나기도 했다. 집안 사정을 이유로 뭔가를 해야한다는 당위를 회피하기도 했다. 여행 다닐 엄두도 못낼 정도로 답답하고 바보같은 시간. 나즈막하게 언젠가는 잘 될거야라고 속삭였지만, 난 잘 알고 있었다. 잘 될 일이였으면 진즉 잘 됐을거란걸. 이유들이 많아졌고, 변명이 많아졌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의 명함이 정말 부러웠으며, 알바로 살기엔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에 염증이 날대로 나있었다.
그즈음에 난 누가 뭐하냐고 묻기만 해도 날을 세우며 뻔한 질문만 한다고 질책했다. 자유롭고 싶다며 무직을 '선택'했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뭘 할지 몰라서 답답했고, 걔중에 잘하는걸 생각했다가 한숨이 나와 먹먹해지기 일쑤였다. 안다. 이게 다는 아니라는걸. 잉여 시간에 뒹글거리며 잘 놀았고, 해놓은건 없지만 하고 싶은 것들을 찔러보느라 불안하면서 떨렸던 순간들도 많았다는걸. 청개구리 같아서 안정적인게 싫었던거지, 어쩌면 안정을 바탕으로 좀 더 넓게 팔을 벌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내가 뭘 잘하고,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애초에 갖은 맘을 헌신짝처럼 내팽겨치고, 직장 열심히 다니고 돈 많이 모아서 어떻게 어떻게 살아봐야겠다란 생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직장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살고, 뭔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게 좋은건지, 예전처럼 순간을 즐기겠다면서(그 순간의 눈꼽만큼도 맘껏 느끼지 못했으면서) 무리수를 두는게 나은건지.
분명한건, 조금씩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겠다는 것이다.
난 버스 앞좌석에 앉아 노을이 지거나 아침 해가 창문에 부딪히는걸 보길 좋아하고(자는 경우가 더 많지만) 저녁 무렵에 자전거로 바람을 타고 다니는걸 좋아한다. 옥찌가 내게 와서 몸을 부비는걸 좋아하고, 골목길과 사람들의 뒷모습, 간판, 나이들어 오래된 것들, 하늘, 나무, 초록, 빨강, 나를 사진으로 찍는걸 좋아한다. 술술 넘어가는 책도 좋아하고, 끙끙대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아치 장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책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의 스타일을 좋아하고, 자의식 따위는 없지만 보기에 그저 예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 S와 통화하는걸 좋아하고, M과는 문자하는걸 좋아하며, 가끔 M과 통화를 할때면 후회할거 뻔히 알면서 온갖 얘기를 다 털어놓는 나를 좋아한다. 물론 이 둘을 모두 만나서 쿵짝맞는 대화를 나누는게 더 좋다. 인터코스보다는 침대 위에서 하는 행위들을 좋아하며, 누군가 노래를 부르거나 뭔가를 읽어주는걸 좋아한다. 노래 부르는걸 좋아하고, 얼굴이 빨개질때까지 춤추는 것도 좋아하고, 나만 맛있는 요리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아직 미각이 덜 발달한 옥찌들이 가끔 잘한다고 칭찬 해주긴 하지만)
그리고, 일기장이 아니라 누군가는 내 글을 읽어볼 수 있는 이 공간이 좋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 참 좋다. 이 순간만큼은 진짜다.
치열하게 살지 않았고, 열정과 젊음을 불태울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좌충우돌 뒤죽박죽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조금씩 알 수 있으니까, 밥 먹고 배 부르면 끝이라고 하는게 아니라 살도 찌고, 피도 돌고, 일어나 걸을 힘도 나니까. 그럼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