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문이 아니라 잡탕의 도가니

 리뷰를 쓸까말까 망설이다 관두기로 했다. 혼자 있는거 없는거 죄다 끌어다 설레발을 쳐놓고, 읽어보니 어쩌네 저쩌네 하자니 낯뜨거워서 원.
 책을 읽기 전에 막연하게나마 그녀가 제대로 썼을줄 알았다. 조금쯤은 엉터리 같은 '내 연애'도 지지받을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를 하기도 했다. 서문까진 괜찮았다. 인터뷰 하듯이 진행한 '이태원 걸'에 대한 내용도 나쁘지 않았다. 그 뒤로 방향을 잃었다. 사랑에 대한 경험을 써내려간 에세이인지, 스펙만 따지지 말고 제대로 연애를 하자는건지, 십대들에게 해주는 '언니의 충고'인지, 상담 코너인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김현진이니까' 다른 뭔가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책을 끝낼 수는 없는거라고, 나가는 말에서 왜 이랬는지를 얘기해줄거라고 믿었다.
 그녀가 할말은 다 했다는 듯이, 그래도 연애가 남는거라며 이상, 이상(종례 시간도 아니고)을 외치자 난 실망했다. 약간 실망스러웠던 부분들이 그녀 약력과 함께 배치가 되자 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쩌면 내가 지지하고 싶고, 좋아하고 존경하는 부분들은 치열하게 사는 그녀, 자기 모순을 긍정하고 껴안는 그녀였지 '그녀의 글'은 아닌가?
 아냐, '불량소녀백서'도 괜찮았고, 시사인과 한겨레에 쓴 칼럼도 좋았단 말야. 그럼 역시 이 책이 아니란 말인가? 내가 익히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내용들에 그녀 나름대로 살을 붙여 '김현진표' 이야기로 가공해주길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실패하는 연애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을 깊숙히 캐주길 바랐다. 어쩌면 내 바람이 너무 컸는지도 모르겠다. 얘기를 하려다 말고 딴청을 피우거나, 시대가 불우하단 얘기로 그을음을 내는건 약과, 이것저것 하려는 얘기가 많은건지 할말이 없어 짧게 끝내는건지 모를 난삽함은 '헤픈 여자'나 '토이남', '그녀 자신의 연애 이야기'까지 빛을 바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이 책이 맘에 들지 않았노라고 말하는 수 밖에.

* 알라디너의 추천

레이시즌님(간접)과 프레이야님(직접) 추천으로 읽은 책이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차라리 연극으로 봤으면 더 좋았을텐데란 아쉬움이 남는다. 책에 강렬하게 찍힌 '보지'란 문구를 책 제목에도 썼다면 판매율만큼이나 약간의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책은 과도하게 의욕한 여성 성기로서 보지를 말하지 않는다. 양다리 사이에 있는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보지가 아니라, 남성 성기가 지칭하는 상징적인 힘과 별로 다를게 없는 보지. 있는 그대로의 보지. 섹스할때만 살아나는 보지가 아니라, 질과 클리토리스 등등의 분절된 보지가 아니라 그냥 보지, 보지 이야기.
 입밖으로 보지란 말을 꺼낸 순간, 달콤한 쾌감이 느껴진다.

<여성주의 학교 간다>는 성적 자기 결정권과 한국 여성주의 운동이 '성매매특별법'을 계기로 담론이 와해되는 과정을 다룬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부분이 좋았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자신이 성적인 상황에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게 아니다. 자기 선택이 강제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그런 권리 자체가 무의미하니까. 새로운 인식이다. 좀 더 정리가 되는대로 리뷰를 써보도록 해,야,겠,다란 다짐만.
 하지만 유전자 복제의 윤리성과 근대/탈근대와 페미니즘 내용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전자는 평이했고, 후자는 전문적이었지만 두서가 없었다. 책에 대한 얘기를 할때면 조심하게 되는 부분이 내가 이해 못하거나 오독한걸 갖고 저자가 횡설수설한다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한번 더 재독 후 리뷰를 쓰면서 찬찬히 정리한다면 다른 부분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판단유보.

* 보물, 책세상 만세
 
<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 그냥 집어든 책인데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춘향전 이야기에서부터 근대의 하녀와 여귀, 양공주까지. 이건 다시 읽은 다음에 꼭 리뷰를 쓰고 싶다.
 <여성의 정체성>은 여성철학에 대해 알 수 있는데다 낯선 자들과의 연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하니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 해야만 하는 독서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을 슬퍼하는건 그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슬픈 본능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그러니까 난 잘 몰랐다. 그래서 <인물과 사상, 김대중 신드롬>을 읽기 시작했는데 정리가 잘 안 된다. 강준만 선생님이 하는 얘기를 쭉 읽어나가면서 생각을 정리하다가도 맥락이 툭툭 끊어지기 일쑤다. 반DJ 정서가 그토록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던 것조차 몰랐던 무지렁쟁이 아치. 꾸준히 긴호흡으로 읽어나가야지.


  회사 카메라(애석하게도 삼성꺼다)를 갖고 사진을 찍으면서 똑딱이로 찍을때보다 궁금한게 많아졌다. 그래서 사진학의 고전인 <사진학 강의>를 보려고 하는데 검정색은 글씨고, 흰색은 종이인지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무려 3년 전에 사놓고선 구겨진 뭔가를 고정시키는데 써먹고 앉았는 아치다. 꾹 참고 읽어서 옥찌들도 더 예쁘게 찍고, 카메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싶다.

 전에 지하철에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는 여자분을 봤을 때 집에서 태평하게 자고 있는 내 책에게 미안했던적이 있었다. 책의 무게도 무게지만 지하철에서 깨알같은 글씨를 읽는 그녀의 정성도 정말 대단했다. 난 종이가 코팅되어 번들거려서 글씨가 안 보인다고 몇년째 이 책을 방치해뒀는데. 읽어야지, 막연하게 그림이 좋다 말고 그 속에 있는 이야기들도 들여다봐야지.

* 소설과 시


 이스마일 카다레의 작품은 처음이다.  호메로스를 공부하는 연구원이 알바니아의 작은 마을로 오면서 그들을 스파이로 착각하는 군수와의 일들을 그렸다. 뒤틀린 유머와 어긋나는 상징, 자기만 모르고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직 이 작가의 매력이 분명하게 와닿지는 않지만 과도하지 않은 디테일과 자연스러운 전개가 맘에 든다.

 왜 심보선의 시집 대신 김경주의 시집을 샀을까. 벌써 세번째 도서관에서 그의 시집을 대출했다. 내 책이 되는 순간 헐렁하게 읽어댈게 분명하기 때문에 소유하려는 욕심을 꾹 참고 있다. 심보선의 시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과도한 키치적 잡다함. 페이퍼를 쓰다보니 벌써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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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9-20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도한 키치적 잡다함보다 느낌은 훨씬 좋다고 판단되는데요..ㅎㅎ

Arch 2009-09-20 19: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머큐리님^^

프레이야 2009-09-2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진 책, 뒤로 갈수록 아쉬웠던 점 저랑 같아요.^^
첫장은 그런대로 좋았는데 말에요.
그래도 살아남아라, 이말이 제일 기억나요.

Arch 2009-09-20 19:5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그렇죠?
그럼 어떻게 살아남으라는거야라고 혼자 궁시렁거렸던 느낌이 떠올라요.

2009-09-20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0 1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0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9-09-20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스마일 카다레는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인데,
Arch님도 읽으셨다니 반가운데요.^^

Arch 2009-09-20 19:54   좋아요 0 | URL
전 람혼님 댓글이 더 반가운데요! 마지막장을 덮은 순간 호불호가 정해지겠지만 지금도 꽤 괜찮아요.
'너무나 좋아해요'란 느낌 좋아요^^

비로그인 2009-09-20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잡탕의 도가니가 정말 좋아요. 뭐랄까, 책들이 냄비 속에 보여서 `우리는 즐거운 해물 잡탕 가족이랍니다. 맛있게 끓여주셔요!' 하고 노래를 부를 것 같아요.

Arch 2009-09-20 19:56   좋아요 0 | URL
크~ 아, 쥬드님. 전 좀 걱정했어요. 이렇게 값싼 페이퍼를 써대면 누가 리뷰나 제대로 쓰고 좀! 이렇게 생각할 것 같고 그랬거든요. 해물 잡탕 가족을 먹으면 아프지 않을까요, 란 개떡같은 유머만 생각나고. 정말 좋다니, 저도 정말 정말(몇배는 더 많이) 좋고 감사해요.

다락방 2009-09-2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김현진의 시사인 칼럼이 좋아서 무언가 기대를 많이 했던가봐요. 그녀가 쓴 연애서라면 뭔가 다를줄 알았거든요. 신선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특별하진 않았던 연애서에요. 그런데 이런 느낌을 Arch님도 가졌다니 윽, 막 반갑지 뭡니까!!

Arch 2009-09-20 19:58   좋아요 0 | URL
히~
'좋아요'에서 맘이 동하는 것도 좋지만, 별로에요에서 이어지는 느낌이 비슷한 것도 은밀한 공모자 같고 그래서 괜찮아요. 반가워요, (다락방님) 와락!

무해한모리군 2009-09-2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서 라주미힌님이 억지로 그 시집을 가져갈때 심보선 시집을 가져가 주지 않은거야 흑흑..
아 멋진 연애서(그것도 에세이류로)는 만나기 쉽지 않은듯해요. 연애지상주의가 신물나면서도 너무 쿨한 놈도 인조인간 같아서 별로고, 좀 질척이는 스스로에 대해 솔직하게 쓰면서도 인간관계 중 하나로 잘 정리해주는 사람 없을까?

Arch 2009-09-21 11:50   좋아요 0 | URL
내것이 되는 순간 여유가 생기거든요. 안 읽는다는 소리에요. 난 자꾸 보고 싶은데.
맞아요, 맞아! 아, 막 쓰고 싶은 의욕이, 질척이기만 했던 연애에 대해 쓰고 싶은 열의가 생기는데요? 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