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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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케스의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건 마술적인 상상력이나 모래시계로는 어림도 없는 끊임없는 연대기적 시간 배열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빨갛게 달아오를 것만 같은 관능과 열정을 잠재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 문장 사이에서 팔팔 튀어오르는 인물들. 백년동안의 고독이 좋았던건 그 모든 것이 각자 노는게 아니라 훌륭하게 어울려지는 점이었다.  

 어느 항구를 빗대어 '한국의 나폴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그만큼 아름답다란 의미로 읽힌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굳이 나폴리까지 끌어들여야 할 정도로 퍽퍽한 감상은 별로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나는 후자쪽의 입장이었는데 감상이 단조롭다기보다는 서구주의자의 바득거림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싶은 맘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굳이 고래를 보고선 마르케스의 작품을 떠올렸다고 한국의 뭐뭐라고 운운하기는 싫지만 의식을 하지 않았는데도 바로 떠오른 생각은 바로 앞서 말한 마르케스의 작품에서 받은 느낌 그대로였다.  

 노파에서 금복, 춘희에 이르는 세 여인의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책장 넘기는 약을 삼킨듯이 거침없이 책을 읽어나가게 만들었다. 약간의 비약과 우연은 별로 문제될게 없었다. 모처럼 소설 읽는 재미, 그러니까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이야기를 듣는 재미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아이들을 빨리 자게 하려고 이야기를 하다가 멈추고선 내일 들려준다고 약올리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이 작위적으로 설정된 것 같다거나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노파의 저주 운운으로 발생하고 마무리지어지 것 역시 책을 읽는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래도 읽을거야, 이래도?'란 작가의 어깃장마저 흥분됐다. 작가는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주위에서 아직도 '고래'를 읽지 않았냐고 쿡쿡 찔러댈 때, 건성으로 넘기고 말았다. 빈수레가 요란하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게 없다란 생각을 했으니까. 하지만 수레는 가득 차 있고, 먹을건 지천이었다. 책을 집어든 독자는 그저 부지런히 이야기를 '먹으면' 된다. 

 책 중간중간에 작가가 개입해서 이야기를 설명하는 부분을 읽다가 무언극을 설명하는 변사(士)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변사는 관객을 제대로 알고 있었고, 관객을 들었다 놨다 웃겼다 한숨 짓게 만들줄 알았다. 게다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에는 이미지나 느낌이 제깍 떠오르지 않았다. 변사의 목소리도 처음부터 귀에 쏙 들어온건 아니었다. 금복이 여장부에서 사내로 변해가면서, 노파가 자신의 남자를 물 속으로 밀어넣으면서, 춘희가 점보를 읽고 다시 아이를 잃은 후부터 세 여인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 관객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소설은 많은 사람들이 두루 추천할 정도로 재미 있었고, 나 역시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다. 성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작가 인터뷰며 작품 해설, 책 뒷부분의 추천사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개지고 말았다. 예상은 했다. 문학동네상을 받았고,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니 이것저것 맛있는 격려사며 축하를 하고 싶은걸 모르는건 아니다. 하지만 창대니, 근대사를 관통한다느니, 역사상 어쩌고, 전대미문까지 나오는걸 보면서 칭찬받는 사람도 참 무안하지 않았을까란 생각까지 들었다. 분명히 재미있고 의미있는 소설이지만 근대 소설 가운데에서도 이에 필적할만한 이야기들이 존재해왔고, 지금이야 '읽는 재미'보다는 분석하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탐탁치않게 만드는 소설 위주라 그렇지 분명히 '고래'만한 작품은 있어왔다. 인터뷰어가 어떤 부분은 근대사를 상징하는 내용이냐고 질문을 던지자 작가가 그렇게 보면 너무 딱딱하지 않냐고 반문을 했다. 내가 느끼는 지점도 딱 그 정도였다.

 백민석의 그로테스크하고 낯선 상황의 작품을 두고 체제 전복적이라며 치켜세워 독자들과 공감할 수 없게 만들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더 초점을 둬야할 신인들을 갖가지 콩고물을 떼먹는 것으로 재능을 소진시키는 행태. 메타 비평이 일정 정도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괜한 트집잡기'로 몰아세워 건전한 비평의 통로를 막는 태도. 서로 감싸주고, 핥아주고, 서로를 위해 판벌리기에 혈안인 한국 문학. 무게뿐 아니라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그들만의 리그는 독자들의 외면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자장 밖에선 여전히 다른 이야기꾼들이 판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거나 판을 벌리고 있으며 매체에 보도되거나 줄서기에 능숙치 않아 그렇지 조금씩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고래'는 자장 안밖으로 진동하는 멋진 이야기이다. 그러한 점은 부러 치켜세우는 비평이 아니어도 독자들이 능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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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8-04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잘 읽히죠? 외근 다니면서 길에서도 걸으며 읽을 정도로 흠뻑 빠져 읽었던 책이에요.

그런데 뭔가 탁 걸리는게 있었어요. 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다시 말해, 이 모든 기이한 이야기들이 이미 세상에 존재해왔고, 어디선가 한번 들어봤을 법하고, 어디선가 만들어졌을 그 모든 이야기들이라고 생각이 든다는 거죠. 그런것들을 작가가 한데 뭉뜽그려 놨다는 느낌. 순수한 문학적 창작과 상상력이 아닌 것 같은, 그래서 결코 그 안으로 풍덩 빠질 수는 없는 그런식의 느낌을 저는 받았거든요.

Arch 2009-08-04 14:36   좋아요 0 | URL
으음. 그럴 수 있어요. 독자들을 흠뻑 빠져들게 하는데는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만 새롭다거나 독창적이기까지 한건 아닌 것 같아요. 아, 예민한 다락방님.

2009-08-04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5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민이 좋아하는 치즈 돈까스를 먹은 후에 근처 공원에 가서 같이 자전거를 탔다. 민은 뒷자리에서 내 옷을 잡거나 가끔 내 몸을 꼭 껴안아주었다. 뒤쪽에서 종알대는 참새가 탄 것 같았다. 

- 지민아, 달 떴다. 
- 우와!
- 지민아 달은 누가 만든거야?
- 하나님이야?
- 그런가? 하나님은 뭘로 달을 만들었을까.
- 돌멩이.
-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돌멩이가 빛난다 그렇지? 
- 해가 조금 줬거든.
- 해가 빛을 달님한테 나눠줬나보네.
- 어 그런데 해님이랑 달님이랑 가까이 있어.
- 둘이 친한가보지. 그런데 해님은 안 보이네.
- 자러 들어갔거든.(아)
- 그런데 민! 우리 지민인 뭘로 만들었을까.
- (한참 생각하더니) 뼈(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내 몸을 꽉 잡아주었다. 그러니까 이모도 뼈로 만들어졌다는 얘기)
- 뼈 하나로 우리 지민이를 다 만들 수 있나?
- 연결을 해야지.
- 연결은 어떻게 해?
- 그러니까 총으로 쏴서 팡팡 터트린 다음에 스티커로 붙이는거야. (대체 왜, 접착면을 울퉁불퉁하게라도 해야한단 말인가?)
- 아, 그렇구나. 그런데 이모도 그렇게 만들어진거야?
- 응,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누나 다 그래.

 민과 인라인 스케이트장을 몇번 돌다가 자꾸 집에 가자고 보채길래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말했다.

- 민이랑 데이트 더 하고 싶었는데 민이가 자꾸 가자고 하니까 아쉬웠어.
- 어, 그럼 해. 그거.
- 그거 뭐?
- 아, 그거(여기서 억양이 높아졌다.) 이모가 방금 말한거!!(내가 말귀도 못알아듣는 사람 같았다. 어찌나 야단인지. 흑)
- 데이트? 
- 응, 베이트.  
- 민이가 집에 가자고 했잖아.
- 그게 뭔데.
- 뭐?
- 베이트.
- 그냥 같이 얘기하고 밥 먹고 차 마시는거지. 같이 있고 싶고, 조금 만지고 싶고, 자꾸 몸을 부딪히고 싶은거지.

민, 데이트가 뭔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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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9-08-04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이에게 벌써 데이트를 가르치려고 하다니! 이모는 너무 독점욕이 강해! =3=3=3

Arch 2009-08-04 00:20   좋아요 0 | URL
그런거 아니에요. ^^ 독점욕은 맞지만 본 페이퍼의 취지는 '민이가 스티커를 붙여서 사람을 만든다'에 있다구요~ =3=3=3 어디로 가신거에요. 조선인님~

hnine 2009-08-04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동화를 쓰시라니까요 동화를.
옥찌, 민과 Arch님과의 대화 내용을 읽고 있노라면 동화가 따로 없다고 매번 생각한단말예요.

Arch 2009-08-04 14:38   좋아요 0 | URL
hnine님이 쓰시면 되죠~ 히. 더 잘 쓰셨잖아요~

다락방 2009-08-04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ㅑ ~

달 사진, 기막히게 좋으네요!

하하. 데이트가 그런 뜻이었어요? 조금 만지고 싶고 자꾸 부딪치고 싶은, 그런? 하하
좋으네요.
:)

Arch 2009-08-04 14:37   좋아요 0 | URL
그렇죠? 데이트가 좀 좋아요. 다락방님과도 언제 데이트해요~
그런데 달 사진은 옥찌들 말대로 좀 추접시럽지 않아요? ㅋㅋ

무해한모리군 2009-08-04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자근자근 길게 대화하는 이모와 조카라니 ^^
세상에 아치님처럼 예쁘고 정확하게 데이트를 설명할 사람은 없을꺼야.

민이 휘모리 이모 다치면 민이가 와서 스티커로 붙여주면 안될까?

Arch 2009-08-04 14:38   좋아요 0 | URL
하하. 휘모리님 그 전에 민에게 점수를 좀 따셔야죠~ 민이가 아니어도 내가 스티커 붙여줄게!

무해한모리군 2009-08-04 20:06   좋아요 0 | URL
아하 한번 놀러가야겠구만.. ㅎㅎㅎ

Arch 2009-08-05 10:47   좋아요 0 | URL
뭐 말리진 않겠습니다.^^

전호인 2009-08-04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밤의 멋진 데이트로군요.
^*^

Arch 2009-08-04 14:39   좋아요 0 | URL
히~ 감사합니다.^^

웽스북스 2009-08-0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가 조금 줬거든. 아. 예뻐.
지민이는 정말. 제 사랑을 듬뿍 줘도 아깝지 않아요. 아아아아. 총으로 쏴서 스티커로 붙여서 만든 우리 지민이.

Arch 2009-08-05 23:09   좋아요 0 | URL
히~ 듬뿍 좀 주세요. 민은 늘 사랑이 고픈 아이랍니다.^^
 
교수들
데이비드 로지 지음, 공진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에코가 100년동안 나온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책이라고 평한 책. 권위에의 호소인가? 책을 읽어본다면 그런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일테니. 

 '교수들'은 문예이론가인 킹피셔를 중심으로 학술 대회라는 성배를 찾아나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남의 논문을 베껴쓰는건 물론, 일부러 경쟁자의 학술 논문을 폄하하기, 학술 대회에서 외도하거나 난교 파티를 벌일 상대를 물색하기, 학술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연구 분야가 아닌 것까지 소화하는 교수, 컴퓨터랑 자신이 시기하는 교수를 험담하는 사람, 소설 속에는 다양한 에피소드와 등장인물이 나온다. 이름 덕분에 교수가 된 퍼스 맥개리글이 안젤리카라를 찾아서 세계 학술대회를 쫓아다니고,  사랑을 하고 출세를 하려고 아등바등 댄다. 그들은 때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교수들이면서 내면에는 누군가 불씨만 당겨주면 화르르 타버릴 수 있을 정도로 욕망에 가득찬 '교수들'이기도 하다.  

 물론 이 얘기가 다라면 어쩌면 그다지 새로울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풍자소설에 퍼스와 안젤리카의 연애를 접목시켜 말미에 자신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에 대해 살짝 힌트를 준다. 제대로 된 연애소설이라면 섹스처럼 기복이 있어야 한다는 코멘트도 빼놓지 않고. 다양한 문예이론과 더불어 한국에 대한 짤막한 인상 정도는 덤이다. 한국 사람과 한국에 대한 인상이 그다지 유쾌한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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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9-08-03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킹피셔는 영화 <피셔킹>과 관련있어 보입니다.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영화도 성배를 쫒는 미치광이의 이야기가 서브 플롯으로 있거든요. 영화 참 좋았는데...

서재 소개글이 재밌네요. 버나드 쇼의 글귀에 대한 변주 아닌가요?
전 요즘 버나드 쇼가 말은 참 잘했다 싶어요.^^

Arch 2009-08-03 15:10   좋아요 0 | URL
작가 말로는 여러가지 것에서 모티브를 찾았다고 하더라구요. 영화는 처음 들어봤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책도 정말 끝내줬거든요.
맞아요, 맞아^^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죠? 아마도.

스텔라님 반가워요.

머큐리 2009-08-0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아니 우리나라 교수 얘기를 왜 외국인이 소설로 썼을까???

Arch 2009-08-03 15:11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교수만 국한된 문제는 아닌가봐요. 물론 작가는 착한 사람이라 결말이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다락방 2009-08-03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거 소설이에요?

Arch 2009-08-03 23:15   좋아요 0 | URL
네! 굳이 장르를 가리자면 풍자소설.

2009-08-03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3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8-04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길고 긴 녀석을 다 읽다니..
헛웃음이 좀 나긴했지만, 난 재미없더라 ㅎㅎ

Arch 2009-08-04 14:34   좋아요 0 | URL
어허, 난 재미있던데^^ 나도 길고 긴 녀석은 잘 못읽었지만 이건 괜찮던데요. 리뷰를 잘 쓴다면 말이죠, 왜 재미있는지 알려줄텐데. 어흑

무해한모리군 2009-08-05 07:54   좋아요 0 | URL
내가 한번 리뷰를 써볼까 ~
왠지 그닥이었던 책은 짧게 코멘트만 하고 넘어가게 되는 거 같아요.

Arch 2009-08-05 10:48   좋아요 0 | URL
몇편 안 되는 리뷰지만 전 별로인 책은 막 욕하고 그랬거든요. 꿈에 나올까 무서^^

2011-08-19 0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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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생은 선덕여왕을 볼때면 맥주를 꼭 마셔야 한단다. 긴장감 때문에 목이 탄다나 뭐라나. 술 먹는 핑계도 가지가지라고 했지만 한 캔 남은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 먹으면서 나도 선덕여왕 덕을 보는거라고, 선덕여왕은 후세의 아치까지 즐겁게 해주는구나란 생각을 잠깐 했다.  
  

* 김영하의 도쿄 여행자에 보면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생맥주의 거품층을 만드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에게 맥주 거품이 술이 아닌 술을 사칭하는 '거품'에 불과하다면 일본에서는 맛의 풍미를 높여주는 하나의 잉여라는데, 그 잉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의 충만한 자의식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한 숙련, 무가치한 초과, 장인은 그 모든 것의 '거품' 속에서 위태롭게 존재하는 눈부신 잉여이다.' 멋지다. 내가 마신 거품은 약간 쌉싸름했다.  

* 김영하의 책에서 본대로 사람들에게 생맥주와 일본의 상점에 대해서 그럴싸하게 귓뜸을 해주면 일본에 자주 다녀오냐는 반응을 접한다. 그럴때면 나는 짐짓 모른척 팔짱을 끼고 어떻게 말을 풀어볼까 생각하다 그냥 사실대로 말해준다. 왠지 상대방이 다녀온 일본과 내가 다른 누군가의 감각을 통해 접한 일본이 다르다면 그 간극에 대해서 설명해줘야할 것 같으니까. 거짓말을 잘 하지만 이어나가지는 못하고, 이어나간다고 하더라도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로 재미있지 않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게 재미있다. 나를 콘텐츠화하는 것은 다른 것을 체계적이고 심도있게 풀어낼 재간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나처럼 남도 나를 재미있어 하지 않을까란 가끔씩 발작적으로 생기는 착각도 한몫한다. 

*  한잔의 맥주는 늦은 밤을 풍요롭게 한다. 

* 호가든을 처음 먹어봤을 때 달콤한 오렌지가 목 안쪽에서 퍼득거리면서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이건 뭐냐고 호가든을 권한 사람에게 눈짓으로 묻자, 상대방은 그럴줄 알았다며 어깨를 으쓱하고선 다른 맥주를 골라줬다. 나의 맥주 연대기는 그때 새로 시작했다. 

* 어제는 저녁도 든든히 먹은 주제에 앉은 자리에서 닭날개 다섯개를 먹어치웠다. 그 전날은 속이 더부룩하다면서 자정이 넘어 포장마차에서 사온 갈비와 소면을 양껏 먹었다. 오늘은 삼겹살로 배에 기름칠을 해놓고선(아, 이런 값싼 표현) 감자튀김이 무척 당긴다면서 말끔하게 다 먹어치우고. 그때의 술은 모두 맥주였다. 맥주는 먹을수록 배가 불러야 정상인데 얼음통에 담긴 맥주, 잔을 꽝꽝 얼린 곳에 따라 마시는 맥주, 집에서 간단하게 컬린스에 따라 마시는 맥주, 모두 기분만 좋게 하고 배를 부르게 하진 않았다.
 아, 어쩜 좋니. 배야 그렇다치고 얼굴 윤곽이 제멋대로 되는 것도 그렇다치고 여름이 다 가는데, 맥주가 그다지 맛있을 것 같지 않은 계절이 돌아오는데 어쩌면 좋니.(이건 반전이다라고 우기는 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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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8-03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텨뷰가 너무 재미있던데요... 기대할께요 (이건 반전아님)

Arch 2009-08-03 15:12   좋아요 0 | URL
ㅋㅋ 머큐리님 그런거 좋아하시는구나. 감사합니다. 반전 아니길 바랄게요~
막 댓글 달다가 오늘 바람구두님이 올려놓으신 '착한 블로거'증후군이 떠올랐어요.
오늘만해도 벌써 세번째 알라딘에 들어와서 이러고 있는 아치. 무려 휴간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