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하지만 나는 여행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지를 돌아다니는 탐험가의 용기도 없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큼 그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서 알차게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부지런함도 없다. ...... 다닌 곳의 면면을 꼼꼼히 적고 분류해서 기록에 남기는 철저함도 없다.

 내가 하는 여행은 게으른 자의 어슬렁거림에 가깝다.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그러나 체계적인 계획과는 거리가 멀고 달랑 방랑벽 하나만 있는 게으른 자의 여행 말이다. ......일주일, 보름, 혹은 한 달, 길게는 석 달 동안 한 곳에 짐을 부려 놓고 마치 그곳에서 계속 살 것처럼 뭉개다가 심심하면 주위를 둘러보는 그런 식이다. 떠나기 전에 여행기를 읽거나 여행 정보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는 일도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그건 순전히 게으름의 결과인 듯 싶지만 마음 고쳐먹고 부지런 떨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런 게으른 자의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는 근사한 건물과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친절하고도 멋진 사람들, 일정 없이 슬렁슬렁 다니다가 들어간 예쁜 까페,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긴장감과 호기심...... 그건 나처럼 여행하는 사람들이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즐거움이다. 물론 놓치는 것도 많다. 기껏 돈 들여 다녀왔는데 정말 중요한 것을 지나쳤다든가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하도 많이 읽거나 보아서 이미 익숙해진 눈으로 해당 장소에 가서 남들의 감상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일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로 재미없다. 산에 올라가도 정상을 정복한 일이 한번도 없고 길 찾기에는 젬병이어서 간혹 자기 집도 못 찾아 헤매는 믿을 수 없는 방향치인 내가 여행기를 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중략)...... 

  베를린, 젊은예술가들의 천국 서문 중 

  내 맘을 쏙 빼닮은 여행'관'을 만났다. 누군가의 여행책을 볼 때마다 왜 나는 이렇게 바지런하지 못하지, 왜 나는 이렇게 열정이 없지하며 한탄을 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이 도시를 어슬렁거리는건 '돈 많이 드는 여행'을 하기보다 두 다리면 되는 동네 여행이 더 적성에 맞아서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지금은 새벽부터 노려온 아침잠 없는 부지런한 잡범이 자전거를 훔쳐가 그나마 해오던 어슬렁질도 못하고 있지만. 생각해보니 여행 노래를 부르면서도 막상 떠나지 못한건 귀찮음 때문이었다. 훌쩍 떠나기엔 배시간을 맞추고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짜는게 번거로웠다. 그래도 여행을 꿈꾼다. 특히 말보다 제스처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시칠리아로 떠나는 꿈을. 

 시칠리아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상상해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러스 그리고 유쾌하고 친절한 사내들, 거대한 유적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들,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와 그것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올리브나무, 싸고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검은 머리의 처녀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 예전에 나는 로마와 피렌체, 베니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장사치들, 약삭빠른 도시인들과 척박한 삶, 테마파크를 닮은 번드르르한 대리적 건물들만 보았던 것이다. 내가 꿈구던 이탈리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저 영화나 관광엽서, 여행사의 팸플릿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 그것들은 모두 시칠리아에 있었다.

<김영하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중>

 시칠리아는 먼 꿈 같아 맘 먹으면 차표 하나로 다다를 수 있는 곳도 생각해놨다. 청산도, 유치, 증도, 창평... 슬로시티란 타이틀로 어느 지명의 성격을 고정시킨 것 같지만 사진으로나마 접한 청산도 청보리 밭은 참 아름다웠다. 지도를 검색하고 차편을 알아보면서 가벼운 차림으로 청산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는 상상을 했다. 이 책의 이 구절을 만나기 전까지는

 노인과 나란히 들판을 걷는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고 달아난다. 노인은 호미가 든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
"근디, 왜 혼자 댕겨? 일행을 놓쳤어?'
노인이 묻는다. 혼자 왔다고 하자,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을 텐디, 왜 혼자 다니냐며 나무란다.
"같이 다녀. 어차피 난중에 혼자 될 텐디......"


 여행을 떠나고 싶은건 혼자 있는 시간,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아침에 혼자 눈을 뜨며 내 몸과 느낌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누군가의 찬사가 섞인 장소를 내 나름대로 느끼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로 여행을 가려고한 것 같진 않다. 그런데 할머니 말씀을 들어보니 (내가 귀가 한참이나 얇아서겠지만) 혼자 되고 싶은 막연한 동경을 재고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 좋았던건 우루루 몰려다니며 소란했던 여행객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날이 따뜻해지면 같이 또는 혼자 여행 다녀야지. 낯선 사람들에게 괜히 말을 걸어보고, 꼬마들에게 인사를 건네야지. 동네 개들에게 멍멍 짖는 장난을 치고 봄이 피어나는 소리를 온몸으로 느껴야지. 선술집에서 대접에 따른 막걸리를 쭉 들이켜야지. 그렇게 여행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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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2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아아, 떠나고 싶어요.

요즘 너무 추워서, 정말 코 끝도 집 밖에 내놓기 싫은, 그런 날들에..
어쩐지 해맑은 햇님을 찾아 정처없이 떠나고픈, 최소한의 계획만 세우고 나머지는 인연에 맡기는 그런.
동네 빙빙 돌기........ 하고 싶어요, 아치님. 그런데 너어어무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

Arch 2011-01-29 09:24   좋아요 0 | URL
날이 좀 따뜻해지면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계획없이 훌쩍 떠나 발길 닳는대로 걷고 말이죠~ 마녀고양이님도 감기 조심해요!

치니 2011-01-2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겨울엔 유독 따뜻한 봄을 만날 기다리게 되네요.
따로 또 같이, 여행할 아치님의 봄날도 덩달아 기다립니다. :)

Arch 2011-01-29 09:2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너무 추워요. 봄은 소리 소문없이 왔다 갈 것 같지만 그래도 봄이 기다려져요.
봄날의 치니님에겐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해요.

섬사이 2011-01-28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동네 개 앞에 마주 앉아
같이 '멍멍멍!' 짖으며 대화한 추억이~~ ^^
요즘은 혼자 영화보러 다니는 재미에 맛들이고 있는 중이에요.

Arch 2011-01-29 09:35   좋아요 0 | URL
'멍멍'은 대화라고 우기지만 자족적인 혼잣말 같아요. 가끔 개가 짖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를 쳐다볼 때는 그런 느낌이 더 들고 말이죠.
취해서 멍멍이라니, 섬사이님 귀여우셨을 것 같아요.
 

 텔레비전을 안 본다고 전력공사에 전화를 했다. 수신료를 청구하지 않도록 하겠단다. 혹여 나중에 방문했을 때 텔레비전이 있으면 그날부터 수신료를 내야한다고 말한다. 네네.
 새로 사는 집엔 텔레비전이 없다. 이젠 몇달 됐으니 새로 사는 집 운운하면 헌집은 자기 얘기 하는줄 모르고 딴청을 부릴지 모르겠다. A는 텔레비전을 좋아하지만 텔레비전보다 나를 더 좋아하니까 TV 대신 나와 같이 살기로 짠짜 한거다. A와 텔레비전 보기 대신 다양한 놀이를 개발했다는건 좀 어마어마하고 어쩌다 보니 몇 가지 놀이를 하게 됐다. 모월모시, 할 일 없는 아치는 페이퍼에 뭔 놀이를 했는지 적어보려 한다.

 * 표정 알아맞추기

 자주 짓는 표정이 있다. 아치는 울면서 거울 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울 때는 물론 화내고 짜증내고 즐거워할 때의 표정을 모른다. 어느 날 아치의 표정을 따라하는 A를 보고 표정짓기 놀이를 제안한건 여러모로 지략과 문무를 겸비하여 머리가 큰 아치 생각이었다. 먼저 A가 시작했다.
 입은 대발로 나오고 몸을 좌우로 비튼다.
- 띠, 아치가 오리 흉내내며 뛰뚱거리는거?
- 땡!
- 띠, 아치가 배고프다며 밥 달라는거?
- 딩동댕
 에~ 뭔 표정이 그래, 그리고 난 저렇게 귀여운 표정 지으며 밥 달라고 한적 없단 말야 등등의 대응을 했으나 A는 가차없이 다음 표정으로 넘어갔다.
 이마에 삼자를 세우고, 입으로 험악한 말을 하는 듯 얼굴이 엄하다. 오른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삿대질을 한다.
- 띠, 너 혼자 뭐 먹고 있을 때 나도 좀 달라는 표정?
- 땡!
- 혹시 지민이한테?
- 딩동댕
 그러니까 그 표정은 지민이가 장난을 치거나 누나를 괴롭힐 때 짓는 표정이라는건데, 애들이 무서워할만 했다.

 나도 A의 표정을 흉내냈다. 얼굴 근육을 잔뜩 긴장 시켰다 풀었다 하면서 과장을 했다. 그렇지만 A만큼 세밀하게 하진 못하겠더라. 표정 놀이의 급수는 평소에 상대방을 유심히 보며 쌓아놓은 관찰력과 거울을 자주 보는 습관에 따라 갈린다. 거울 잘 보는 남자-사람에게 당할 수가 있어야지. 

* 상상 스피드 퀴즈

 말 대신 온 몸으로 설명하는거다. 상상력과 지구력, 인내심과 (저렇게 쉽게 설명하는데 못맞추면 어쩌나 하는)불안감을 숨기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버스랑 병아리, 방귀를 설명하는데 방귀는 엉덩이를 들자마자 A가 맞춰버렸다. 병아리는 닭을 먼저 흉내낸 다음에 손을 오므려서 그게 이렇게 작은거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A가 못알아들었다. 결국 패쓰. 버스도 네모난 모양에 운전하는 흉내랑 버스 카드 찍는걸 보여줬는데 아무리해도 A가 못맞추는거다. 나중에 너라면 어떻게 할거냐니까 손잡이 모양을 제시한 다음에 그걸 잡고 이리 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흉내내는거다. 아 그렇게 하는거지! A는 상상해서 설명을 잘 하고, 나는 말로 풀어내는걸 잘 한다. 괜찮은 조합이다.
 요즘 한약을 먹는다고 장이 좋아졌는지 연신 방귀를 뀐다. A는 아치 방귀 때문에 식욕이 감퇴되고 두통이 심해졌다는 말 대신 이 그림을 붙여줬다.

 * 화투치기
 
 지난번에 동생이 놀러와서 남기고 간 건 '다시다를 넣고 맛있게 떡국 만들기' 비법만은 아니었다. 텔레비전이 없어 심심해하는 동생과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는데 그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평소에 사행성 노름을 멀리하고자하는 소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고스톱을 못쳐서 고스톱을 멀리 해온 아치로선 지난 시간이 아까워질 정도로 화투치기는 재미 있었다. 동생이 간 뒤 남은 화투로 아치랑 A는 밤마다 허리 끊어지는줄 모르고 맞고를 쳐댔다.
 순진하게 생겨서 화투짝 하나 못맞출 것 같던 A가 현란한 짝짝 소리를 내며 처음부터 기선제압을 했지만 지고 있을 아치가 아니었다. 직장에서도 머릿 속에서 패맞추기, 팔목 근력 강화 운동을 거듭한 끝에 지금은 실력이 거즘 비슷해졌다. 가끔 A가 구사하는 '판을 꿰뚫어 다음패를 알아맞추기' 비법까지는 터득하지 못했지만.
 다음 사진은 옥찌들이 놀러왔다 남긴 그림. 저기 긴머리 애벌레는 아치란다. 쳇

* 지적질 놀이

 손바닥만한 살림살이지만 뭐 그리 치울게 많고 신경 써야할게 많은지 모르겠다. 부엌에 피어나기 시작하는 곰팡이는 주인집에서 '전에 살던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에서 번번히 원래 그런갑다로 내버려둬야 했고, 환풍기에서 물 떨어지는건 비나 눈이 안 오길 바라는 수 말고는 도리가 없어 보였다. A와도 생활 습관이 다르다보니 여러가지로 신경 쓰일게 많았다. 아치는 A가 세제 뚜껑을 안 닫거나 불을 켜놓고 돌아다니는 것, 방바닥에 머리카락 있는걸 지나치는걸 못견뎌한다. A도 아치가 벗은 옷 그대로 방바닥에 굴러다니게 놔두는거나 설겆이를 드럽게 하는걸 안 좋아한다. 둘 다 깨끗함에 대한 기준도 달랐다. 아치는 물 아낀다며 안 씻고, A는 물을 아껴가며 씻는거라고 했다. 

 다툼이 생기면 맘씨 좋은 A가 먼저 양보를 한다. 아치는 그럴 때마다 좀탱이 속 같은 자신을 탓해보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건 아니었다.

 그렇게 지내길 며칠, 무슨 말 끝엔가 A가 눈짓으로 뭔가를 가리키는데 내가 벗어서 정리 안 한 옷이 눈에 띄는거다. 그래서 나도 A의 눈과 멀티탭에 여전히 꽂혀있는 전기밥통의 콘센트에 각을 맞췄다. 안 맞는게 당연한데 그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뺐다. 그래서 우린 싸울까봐 피하는 대신 막 지적질 하기로 했다. 길 난다고, 그렇게 하다보면 서로가 원하는게 습관처럼 맞는 날도 오겠지. 그동안은 싸우는데 에너지를 다 쓰는 대신 웃으면서 지적질-놀이를 해야겠다.

 다니기 싫은 직장에서 보기 싫은 사람들과 존재감 없이 지내는 대신 놀이를 한다. 사실 이건 몰래 카메라다, 몰래 카메라가 '몰래 카메라였습니다.'라고 밝히는 날은 내가 퇴직하는 날일거야라는 놀이, 뭐 이런걸 자주 떠올리고 상상을 자주 하다보면 현실과 상상을 구분 못하고 정신이 요래 이상해질 수 있을 위험이 다분하다. 친구가 일러준 미친척 하기, 힘을 기르기 등등의 실전 테크닉도 도움이 안 되는 날이다. 농사 지을거라고 했더니 친구는 현실 도피 밖에 안 될거란 대꾸를 한다. 딸꾹질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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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네
유동훈 글.사진 / 낮은산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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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하나 뿐인 어떤 동네, 어떤 관계, 어떤 사람들 이야기

혜정이가 간다.
정식이가 간다.
혜정이가 아픈 엄마 아빠를 대신해
정식이 손을 꼭 잡고 간다.
유월의 지는 햇살 속으로
빛나는 한때를 간다.
오누이가 간다.
아프게 간다.
당당한 걸음으로
아주 먼 길을 간다.

낮은 담에 기대어 꿈을 꾸듯 앉아 있다.

해바라기

새봄에 중학생이 되는 명호는 부두 노동자이던 아버지를
하늘 나라로 보낸 뒤 늘 이렇게 혼자 동생 명숙이를 업고 있다.
명호의 마른 어깨에는 아버지 대신 지켜야 할 엄마와
집안 살림까지 얹혀 있다.
명호는 어깨의 짐을 누군가와 나눠 지고 싶었고,
이제 큰 짐 하나를 내려놓게 되었다.
2000년 봄이면 초등학생이 되는 명숙이가 동자승으로 절에 보내지기 때문이다.
명호는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 버겁던 짐 하나를 부처님께 내려놓는다.
어깨의 짐은 덜지만 명호는 혼자 남는다.
봄이 오면 명호는 동네 공장 담벼락에 혼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할 것이다.
갈래갈래 찢긴 아버지 주검 앞에서 울음을 참아 냈듯이
엄마 없는 캄캄한 밤을 함께 견뎌 낸 동생에 대한 그리움도 그렇게 참아 내면서 봄볕 아래 서 있을 것이다.

자꾸 잠이 와요
잠이 와요. 자꾸 잠이 와요. 집을 생각하면, 학교를 생각하면 자꾸 잠이 와요.
아무리 애를 써도 눈꺼풀이 너무 무겁고, 어깨가 굳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잠 속에서 나는 아기가 돼요. 엄마 뱃속에서 웅크린 아기의 몸이 되어, 그냥 내 모습 그대로 감싸져 보살핌을 받아요.
비 개인 하늘, 햇빛이 이렇게 좋아도 나는 자꾸 달팽이처럼 몸을 웅크려요. 너무 아프고, 너무 잠이 와요.

골목을 지나다 만만치 않은 놈을 하나 맞닥뜨렸다.
‘씁~ 알 만하나 사람이 남의 구역에서 뭐하는 짓이야’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꼬나본다.
그 당당한 기세에 눌려 골목을 되돌아 나가다 괘씸한 생각이 든다.
사실 그 골목에 있는 개집이 녀석의 집은 아니다. 본 주인도 얌전히 자기 집 안에 있구만
저도 나처럼 어슬렁거리며 친구 집에 놀러 온 주제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 장 박았다.
그놈도 역시 못마땅한 표정이다.

용기

뒷집 대인호 할아버지 할머니는 60년 넘게 바다에서 일을 하셨다. 이제 폐선을 하고 집에만 계시려니 오죽 답답했을까. 할아버지가 식사도 잘 안 하신다며 할머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개를 한 마리 데려다 키우기도 하고, 비둘기들 모이도 주면서 적적함을 달래려 하셨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마 전 할머니의 빨랫줄에는 할아버지 생일상에 올릴 민어가 널렸다. 할머니는 “돈을 주고 생선을 다 샀다.”며 그게 참 웃기시단다.
빨랫줄에 민어가 걷히고 며칠 뒤 외출복 차림의 할아버지를 뵈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어, 경로당.” 헐~ 대인호 할아버지가 경로당을. 나는 그게 참 웃겼다. 재빨리 골목을 돌아 할아버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의 용기를 축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꼬마 눈사람을 만들 만큼만 희끗희끗 깜빡이며 첫눈발이 날렸다.
아이들이 만든 꼬마 눈사람.
어디서 주워 왔는지 싱크대 거름망을 멋스럽게 비껴 쓰고 담벼락 한구석에서 사그라지는 동네 집들을 배경으로 웃음 띤 얼굴을 하고 제 몸을 녹이며 슬프게 서 있다.
우리 동네가 그러하리라.
겨울이 되면 이곳은 한동안 홍역을 앓는다. 방송국 헬기가 동네 하늘을 돌며 구경거리를 찍어 대고 무슨무슨 기업의 직원들은 ‘사회봉사’라며 기업 로고가 선명한 울긋불긋한 형광색 조끼를 입고 동네를 누빈다. 동네 골목을 막고 한 줄로 서서 연탄을 나르고, 한 집을 골라 전시용 페이트칠을 하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어떤 이들은 이곳의 삶을 박제화해 박물관을 만들자는 정신없는 소리를 해 대기도 한다.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사람을, 그 삶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은 폭력이다.
웃음 띤 얼굴로 햇볕 아래 자연스레 사라지는 첫눈은 슬플지라도 의연하다.

오리야

나는 어떤 동네를 떠나던 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어.
난 그때 너무 아프고 무섭고 힘들었거든.
낯선 이곳에서 외롭지 않냐구?
응, 조금.
하지만 괜찮아, 네가 있잖아.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어떤 동네 공부방 사람들이
내 옆에서 계속 날 지켜 줄 거야.

이제 내려 달라구
그래, 알았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안고...


치니님 소개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저 골목길을 조심스럽게 찍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건줄 알았다. 아주 오랫동안 골목에서 살고, 그 골목이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떠나버린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골목에 남은 사람의 이야기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책엔 르포르타주류의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잣대보다는 따스한 시선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으로 웅얼거리는 것도 아니다. 잘 아는 사람을 그려낼 때 부딪히는 적당한 거리에 대한 고민을 저자는 간결한 문장으로 메우고 있다.
이 책 속엔 누군가 대안이 없다고 가차없이 잘라냈을 파릇파릇한 삶이 살아 있다. '세상 사람들은 찌질하다고 하지만 우린 괜찮아요'가 아니라 사실 괜찮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죽겠는 것도 아니라며 담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세찬 바람에 옷가지가 다 날라가버려 몸보다 맘이 더 시렵지만 바람이 그친 후 지붕을 수리하러 올라가야하는 고단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 말이다.

동생을 업어주는 명호를 보며 금세 녹아내릴 눈사람을 바라보며 얼마나 맘이 시큰했던지. 어떤 동네를 보고 나서 이제 더 이상 나 좋다고 골목을 찍어대는 일을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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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1-2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자승으로 절에 보내지는 아이라니, 나는 왜 가슴이 아플까요.

사진으로는 저 담벼락에 기대어 앉은 소녀사진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정말 뭔가를 꿈꾸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일어날 어떤 행복을.

Arch 2011-01-26 14:4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난 모든 사진이 다 좋았어요. 그중에서 좀 더 좋은걸 리뷰로 올렸지만, 모든 사진이 하나도 빠짐없이 괜찮았어요. 다락방은 그 사진이 좋구나,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자꾸 잠이 와요'란 사진도 좋아할 것 같았는데.


다락방 2011-01-26 16:44   좋아요 0 | URL
자꾸 잠이 와요는 좀 부자연스러워 보여요. 그래서 별로. ㅎㅎ

Arch 2011-01-27 14:53   좋아요 0 | URL
음... 다락방님 느낌이나 감상이 좀 더 세밀해져요. 난 그건 못봤네. 봤어도 좋다고 했겠지만.
그건 일테면, '페이퍼 쓰려면 다락방만큼은 써라'에서 생기는 자질인가요?

차좋아 2011-01-2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있는데 아치님의 리뷰를 보고는 (읽던중에)다시 처음부터 읽었어요.글을 읽고 그림을 보고 아치님이 올린 사진 나오면 한번 더 보고... 혼자 볼 때는 고개 삐뚜름한 멍멍이가 이쁜지 몰랐는데 지금은 너무 이뻐요. 같이 같은 때에 같은 책 읽고 있어서 좀 즐거워요^^

Arch 2011-01-27 14:55   좋아요 0 | URL
차좋아님도 읽고 있어요? 와~ 제가 신간을 바로 못읽어서 누군가랑 책 읽기가 잘 안 맞던데, 이번엔 도서관에서 일찍 사주더라구요. 반가워요! 저는 동네 개들이 참 좋아요. 저 녀석도 예뻤구요. 음... 같은 시간에 같은 책을 읽어서 저도 좋은데요~

비로그인 2011-01-2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의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작가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렌즈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Arch님!
마음이 보고, 기록한 장면들. 옆에 놓여 있는 책에는 그런 장면들이 가득하더라고요.

건강한 삶과 희망이 담겨, 닮을 것 같아 더욱 마음에 담아 두고 싶더라고요 ^^

Arch 2011-01-30 20:18   좋아요 0 | URL
골목이 말을 걸다를 읽고 있는데, 두 책 다 골목을 얘기하고 있지만 서 있는 지점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살짝 감상적이기도 했지만, 그게 이 책의 미덕을 헤치진 않았어요. .

바람결님도 좋았다니 기분 좋아요! 그러고보니 이 책은 서재인들이 읽고 있거나 읽으신 것 같아요
 

  대부분의 여행 에세이는 천편일률적이다. 포맷은 몇 가지로 압축된다. 싸이월드에 올릴법한 사진과 '후'하고 불면 날아가버릴 듯한 감상적인 글이 가득한 책, 정말 지독할 정도로 여행을 하고 또 해서 잠결에도 다음날의 일정을 줄줄 외울 정도로 빡쎈 형식의 책, 순전히 먹거리와 볼거리를 즐기기 위한 정보만을 실은 관광 책. 다종다량의 여행서가 쏟아져나오고 있지만 어느 것도 내 구미에 맞는게 없었다. 내가 여행 에세이를 읽는 것은 대리만족을 위함일까. 아니면 에세이 가운데 뭔가 읽을거리가 있는건 여행책 뿐이란 생각 때문일까. 여행 에세이를 읽을수록 갈증만 더해갔다.

 이런 여행책(혹은 에세이)은 없을까, 골목에 오랫동안 서서 찬찬히 누군가의 삶을 기록하는 책.(유동훈의 어떤 동네) 크고 번쩍거리는 곳 대신 작고 낡은 곳에 대해 얘기하는 책.(소도시 여행의 로망-고선영) 혹은 '서재 결혼시키기'에서 소개한 '책을 읽으러 돌아다니는 여행'을 기록한 책은?(여행자의 독서-이희인) 아니면 아예 낯선 곳에 머물며 쓰는 책은? 혹은 기존 여행서와 비슷한 경로의 여행을 하지만 이런 얘기는 어떨까. 아무도 그곳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얘기랄지, 사적인 이야기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면 결국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한 책은?

 그러던 중에 김영하의 여행자 시리즈를 알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쓴 소설과 사진, 짧은 에세이와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 이야기는 성글었지만, 가끔씩 눈에 띄는 구절들은 오로지 작가만이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인지라 그 자체로 생동감이 있었다. 인공적인 공간에 대한 느낌으로 '일본이 꾸는 꿈'이란 표현을 쓴 부분이나 거품이 맥주 그 자체를 대신하는 것에 대한 감상은 재미있었다. 그러고보니 여행책에 바라는바를 이러쿵 저러쿵 떠들긴 했지만 결국 내가 바라는건 단순했다. 책장을 넘기며 여행 장소와 분위기 사이 사이에 작가의 의도나 생각들이 켜켜이 쟁여지는걸 읽고 싶다는 것 정도. 어쩌면 생각보다 과한 주문이었던걸까. 리파리에서 머문 김영하가 쓴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의 시시콜콜한 서술이 따분했던걸 보면.
 
 머릿 속을 맹랑하게 돌아다니는 생각들이 있다. 막연하게 이걸까, 저걸까 하다가 그것을 표현할 말이나 글을 떠올리지 못해 답답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맘을 쏟 빼닮은 가요에 동요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글을 읽기 전엔 나 역시 여행에 대한 모든 서술들이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뭐가 먹고 싶은지 모르겠어 점심 때마다 고민을 하고 고민 끝에 메뉴를 정해놓고도 만족을 못하는 점심 무렵 여느 직장인처럼.

 9시 이후에는 알코올음료를 팔지 않고, 보행자들이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찻길에 뛰어들어도 아무도 경적을 울리지 않고, 길거리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곳.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슬로베니아, 그중에서도 블레드의 모습이다. 기질적으로 쾌락을 음미하는 듯 보였던 파리 사람들과 비교하면, 여기 사람들은 청교도라 해도 과한 말이 아니다. 파리에서는 지구 최후의 날처럼 죽을 힘을 다해 담배를 피워대고, 애첩처럼 귀애하는 레드와인 덕분에 대낮에도 불콰한 낯빛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아마 그런 것이 도시의 스타일이고 규칙일지 모르겠다. 몸 사리지 않고 즐기는 것 말이다. 내가 인상적으로 본 블레드의 모습은 어쩌면 이 작은 호수마을에 국한된 특징일 수 있겠고, 우연적인 관찰을 침소봉대하여 대단한 미덕으로 일반화시키고 싶어 하는 미숙한 여행자의 편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9시 이후에 알코올을 팔지 않는 이 깐깐한 동네가 맘에 든다. 그 시간 이후로는 묽은 위로를 팔지 않으니 책을 읽든 정사를 나누든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는 태도가 미더운 것이다. 허튼 기대를 버리면 인생은 조금 더 수월해진다.

 이런거였다. 어디에 뭐가 있고, 무슨 음식이 맛있으며 어디서 자야할지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실용적인건 중요하고 때론 유용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런 정보는 굳이 여행 에세이란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이 악착같이 소개하지 않아도 된다. 정보는 널려 있고, 낚시 바늘이 아니라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본격 여행 안내서를 뒤적이면 정보는 충분하니까. 그래서 그녀에게 물어봤다. 왜 동유럽에 갔냐고, 정말 그곳은 어땠냐고. 

 나는 모든 사물이 쓸모 있기를 바라는 완고한 낭만주의자이고 나무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고 느끼는 느슨한 자연주의자이다. 가난한 승려처럼 홀연히 달관한 척하기를 즐기고, 때로는 토끼를 발견한 시라소니마냥 무섭게 삶을 움켜쥐려 하기도 한다. 결과론적인 판단이지만, 나에게 동유럽은 기질적으로 잘 어울리는 곳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물으면 한번에 시원스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었는데, 우연히 N님 덕분에 알게 된 책인 <신을 찾아가는 아이들>에서 단서를 발견했다. 나는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해서 이렇게 장황해야만 했던가보다.

 독수리를 보자마자 너는, 느닷없이, "사람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네가 생식을 뜻했는지, 노아의 방주를 뜻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뜻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 어느 쪽이든 그 당시 나로서는 다소 답하기 힘들었다. - 너는 다시 물었고, 그래서 나는 부모가 그래서는 안 되지만 임시변통으로 네게 대답했다. 나는 사람은 "저 뒤 동쪽에서" 왔다고 말했다. 너는 이 대답에 만족한 것 같았다. 

 사람은 어디서 왔느냐니. 어쩌자고 어린이들은 저런 질문을 하는 거냐. 어린이는 어른을 물 먹이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인가. 혹시 조카 녀석들이 저렇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저 뒤 동쪽에서"보다 더 근사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동쪽이 그냥 동쪽이라서 좋았는데, 사람의 고향이라고 하니까 아늑하게 느껴져서 더 좋다. 그러니까 우린 모두 '동쪽에서 온 사람들'의 자손인 거다. 매일 해가 지고 다시 새로 떠오르듯이 사는 건 끝없는 부침의 연속이고, 매일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살아가라는 말을 저보다 더 간략하고 무책임하게 할 수 있을까. 삶의 의지를 갱신하는 것이 마치 부침개 한 장 뒤집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듯이. 
 
 해갈될 기미가 보이지 않던 갈증이 이 책 하나로 단번에 풀어진건 아니다. 차가운 바람이 몹시 부는 이곳에선 갈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모든 게 휙휙 돌아가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녀라면 이 갈증과 바람에 대해 그녀다운 얘기들을 해주겠지만 난 가당찮은 아치니까 이 정도로 해둬야겠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고, 온풍기는 꺼졌다. 굴라쉬 브런치를 읽으며 아주 많이 흡족, 아니 배불렀다는 얘기로 이 페이퍼를 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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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1-1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드러운 손으로 잘 익은 채소를 골라 조용히 씻어 주시는군요 ^^

Arch 2011-01-18 20:22   좋아요 0 | URL
이 비유는 제것이 아닌걸로 보이는데, 그래도 얹혀가보자면...
바람결님, 좋아요!

2011-01-18 0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8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1-01-18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많이 흡족한채로, 배부른채로 퇴근했던거죠? 잘했어요.
:)

Arch 2011-01-18 20:24   좋아요 0 | URL
헤헤, 다락방님 ♡

토토랑 2011-01-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 멋진 페이퍼인데..
전 우와 굴라쉬!!!! 먹고 싶다, 굴라쉬 드신건가? 사진이라도 하면서 와다닥 클릭질해서 왔답니다.
흙 굴라쉬 먹고 싶은 마음에 아치님의 멋진글이 ㅜ.ㅜ 눈에 안들어와요 우어~~

Arch 2011-01-18 20:29   좋아요 0 | URL
토토랑님, 이 댓글을 보고 말이죠. 제가 아는 그분이 맞나 님 서재에 들렸다 왔어요. 맞네!
말뜻도 못알아먹어서 흙 굴라쉬란게 있나 싶어 찾아보고 그랬지 뭡니까. 그런데 전 너무 감상 위주의 글이라 조마조마했어요. 좋다고 해주셔서 고마워요.

산사춘 2011-01-18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감덩입니다.
체코 가서 굴라쉬랑 맥주 이빠이 먹으려던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면서리... 눈물 한 방울, 뚝!

Arch 2011-01-18 20:30   좋아요 0 | URL
산사춘님 신기해요. 전 중국 한번 간거 말고는 해외를 안 가봤는데 체코에서 정말 굴라쉬 브런치를 먹다니! 부럽다기보다는 정말, 신기해요^^
 

 

-안녕하세요

긴장하지 말자, 와리스.

-듣기 좋네요.

-고마워요.

-이름이 뭐예요?

-데이나에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수줍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잠깐"하고는 돌아서 갔다. 이런! 그러나 나는 데이나를 그렇게 쉽게 놓아줄 생각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데이나의 뒤를 따라갔다. 데이나는 밴드 멤버들과 함께 앉았다. 그래서 나도 의자를 갖다 놓고 데이나 옆에 앉았다. 데이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내가 나무랐다.

-제가 말하고 있던 중이었을 텐데요. 아까는 무례했어요. 날 내버려 두고 갔잖아요.

 데이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곧 큰 소리로 웃으면서 탁자 위에 쓰러졌다.

-이름이 뭐예요?

 웃음이 멎자 데이나가 물었다.

-그런 건 이제 상관없잖아요.

 나는 콧대를 높이고 가능한 도도한 태도로 대답했다. 우리는 곧 이런저런 얘기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데이나가 연주할 시간이 돌아왔다.

...(그의 연주가 끝나고 잠시 밖으로 나가서 얘기를 하려고 계단을 오르고나서)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나 좀 안아줄래요?

나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부탁이라는 듯 데이나를 쳐다보았다. 늘 알고 지내던 사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데이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런던에 갈 때 알았던 것처럼, 모델 일을 시작할 때 알았던 것처럼, 나는 멋진 아프로 머리의 수줍은 드럼 주자가 내 인연이라는 걸.

(그에게 연락처를 건네주고 다음 날 통화를 한 후)

 우리는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작은 커피숍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데이나의 성격을 잘 알게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데이나답지 않은 행동이었음을 깨닫는다. 데이나는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거의 말을 않기 때문이다. 나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데이나는 놀란 것 같아 보였다.

-뭐가 그리 우스워?

-내 생각을 들으면 아마 내가 미쳤다고 할 걸

-말 해 봐. 벌써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난 데이나의 아이를 가질 거야.

 데이나는 자신이 미래의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될 거라는 말을 썩 유쾌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대신 내가 아주 미칠 대로 미쳤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소리라는 건 알지만 말하고 싶었어. 어쨌든 그 얘기는 그만해. 잊어버려.

 데이나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당연했다. 나는 데이나의 성도 모르는 상태였다. 나중에 데이나에게 들은 얘기에 따르면 데이나는 그 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는 보지 말아야겠군. 절대로 만나주지 말아야겠어. <위험한 정사>에 나오는 그 정신 나간 스토커 같아.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데이나는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지만 거의 말이 없었다. 다음날, 나는 내 자신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촌스럽기 그지없는 말을 한 내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비가 올 것 같아요"라는 말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데이나는 일주일이 지나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마침내 내가 먼저 전화를 했다. 데이나가 물었다.

-어디 있니?

-친구네 집에. 우리 만날까?

-그럼. 만나자. 같이 점심 먹자

-사랑해

-나도.

('사막의 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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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1-14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만약 이 책을 읽었다면 아치말대로 이 부분으로 페이퍼를 썼을것 같아요! 나도 말해보고 싶거든요. 나 닮은 딸을 낳고 싶고 당신 닮은 아들을 낳고 싶다고. 그 아이들을 당신이 사랑하는 걸 보고 싶다고. 헤헷. 언젠가는 말할 날이 오겠죠. 안와도 할 수 없고.:)

그런데요 아치, 아치가 옮겨준 이 부분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에요.

우리는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작은 커피숍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나, 이 부분이 너무 좋아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정말 좋지 않아요? 아이 좋아 ♡



Arch 2011-01-14 12:3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무슨 할말이 그리 많다고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도 먼 곳에 있는 빵꾸똥꾸들 보면 그러지 않을까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이 페이퍼는 다락방꺼니까 다락방 가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