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여행 에세이는 천편일률적이다. 포맷은 몇 가지로 압축된다. 싸이월드에 올릴법한 사진과 '후'하고 불면 날아가버릴 듯한 감상적인 글이 가득한 책, 정말 지독할 정도로 여행을 하고 또 해서 잠결에도 다음날의 일정을 줄줄 외울 정도로 빡쎈 형식의 책, 순전히 먹거리와 볼거리를 즐기기 위한 정보만을 실은 관광 책. 다종다량의 여행서가 쏟아져나오고 있지만 어느 것도 내 구미에 맞는게 없었다. 내가 여행 에세이를 읽는 것은 대리만족을 위함일까. 아니면 에세이 가운데 뭔가 읽을거리가 있는건 여행책 뿐이란 생각 때문일까. 여행 에세이를 읽을수록 갈증만 더해갔다.
이런 여행책(혹은 에세이)은 없을까, 골목에 오랫동안 서서 찬찬히 누군가의 삶을 기록하는 책.(유동훈의 어떤 동네) 크고 번쩍거리는 곳 대신 작고 낡은 곳에 대해 얘기하는 책.(소도시 여행의 로망-고선영) 혹은 '서재 결혼시키기'에서 소개한 '책을 읽으러 돌아다니는 여행'을 기록한 책은?(여행자의 독서-이희인) 아니면 아예 낯선 곳에 머물며 쓰는 책은? 혹은 기존 여행서와 비슷한 경로의 여행을 하지만 이런 얘기는 어떨까. 아무도 그곳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얘기랄지, 사적인 이야기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면 결국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한 책은?
그러던 중에 김영하의 여행자 시리즈를 알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쓴 소설과 사진, 짧은 에세이와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 이야기는 성글었지만, 가끔씩 눈에 띄는 구절들은 오로지 작가만이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인지라 그 자체로 생동감이 있었다. 인공적인 공간에 대한 느낌으로 '일본이 꾸는 꿈'이란 표현을 쓴 부분이나 거품이 맥주 그 자체를 대신하는 것에 대한 감상은 재미있었다. 그러고보니 여행책에 바라는바를 이러쿵 저러쿵 떠들긴 했지만 결국 내가 바라는건 단순했다. 책장을 넘기며 여행 장소와 분위기 사이 사이에 작가의 의도나 생각들이 켜켜이 쟁여지는걸 읽고 싶다는 것 정도. 어쩌면 생각보다 과한 주문이었던걸까. 리파리에서 머문 김영하가 쓴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의 시시콜콜한 서술이 따분했던걸 보면.
머릿 속을 맹랑하게 돌아다니는 생각들이 있다. 막연하게 이걸까, 저걸까 하다가 그것을 표현할 말이나 글을 떠올리지 못해 답답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맘을 쏟 빼닮은 가요에 동요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글을 읽기 전엔 나 역시 여행에 대한 모든 서술들이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뭐가 먹고 싶은지 모르겠어 점심 때마다 고민을 하고 고민 끝에 메뉴를 정해놓고도 만족을 못하는 점심 무렵 여느 직장인처럼.
9시 이후에는 알코올음료를 팔지 않고, 보행자들이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찻길에 뛰어들어도 아무도 경적을 울리지 않고, 길거리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곳.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슬로베니아, 그중에서도 블레드의 모습이다. 기질적으로 쾌락을 음미하는 듯 보였던 파리 사람들과 비교하면, 여기 사람들은 청교도라 해도 과한 말이 아니다. 파리에서는 지구 최후의 날처럼 죽을 힘을 다해 담배를 피워대고, 애첩처럼 귀애하는 레드와인 덕분에 대낮에도 불콰한 낯빛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아마 그런 것이 도시의 스타일이고 규칙일지 모르겠다. 몸 사리지 않고 즐기는 것 말이다. 내가 인상적으로 본 블레드의 모습은 어쩌면 이 작은 호수마을에 국한된 특징일 수 있겠고, 우연적인 관찰을 침소봉대하여 대단한 미덕으로 일반화시키고 싶어 하는 미숙한 여행자의 편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9시 이후에 알코올을 팔지 않는 이 깐깐한 동네가 맘에 든다. 그 시간 이후로는 묽은 위로를 팔지 않으니 책을 읽든 정사를 나누든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는 태도가 미더운 것이다. 허튼 기대를 버리면 인생은 조금 더 수월해진다.
이런거였다. 어디에 뭐가 있고, 무슨 음식이 맛있으며 어디서 자야할지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실용적인건 중요하고 때론 유용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런 정보는 굳이 여행 에세이란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이 악착같이 소개하지 않아도 된다. 정보는 널려 있고, 낚시 바늘이 아니라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본격 여행 안내서를 뒤적이면 정보는 충분하니까. 그래서 그녀에게 물어봤다. 왜 동유럽에 갔냐고, 정말 그곳은 어땠냐고.
나

는 모든 사물이 쓸모 있기를 바라는 완고한 낭만주의자이고 나무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고 느끼는 느슨한 자연주의자이다. 가난한 승려처럼 홀연히 달관한 척하기를 즐기고, 때로는 토끼를 발견한 시라소니마냥 무섭게 삶을 움켜쥐려 하기도 한다. 결과론적인 판단이지만, 나에게 동유럽은 기질적으로 잘 어울리는 곳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물으면 한번에 시원스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었는데, 우연히 N님 덕분에 알게 된 책인 <신을 찾아가는 아이들>에서 단서를 발견했다. 나는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해서 이렇게 장황해야만 했던가보다.
독수리를 보자마자 너는, 느닷없이, "사람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네가 생식을 뜻했는지, 노아의 방주를 뜻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뜻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 어느 쪽이든 그 당시 나로서는 다소 답하기 힘들었다. - 너는 다시 물었고, 그래서 나는 부모가 그래서는 안 되지만 임시변통으로 네게 대답했다. 나는 사람은 "저 뒤 동쪽에서" 왔다고 말했다. 너는 이 대답에 만족한 것 같았다.
사람은 어디서 왔느냐니. 어쩌자고 어린이들은 저런 질문을 하는 거냐. 어린이는 어른을 물 먹이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인가. 혹시 조카 녀석들이 저렇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저 뒤 동쪽에서"보다 더 근사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동쪽이 그냥 동쪽이라서 좋았는데, 사람의 고향이라고 하니까 아늑하게 느껴져서 더 좋다. 그러니까 우린 모두 '동쪽에서 온 사람들'의 자손인 거다. 매일 해가 지고 다시 새로 떠오르듯이 사는 건 끝없는 부침의 연속이고, 매일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살아가라는 말을 저보다 더 간략하고 무책임하게 할 수 있을까. 삶의 의지를 갱신하는 것이 마치 부침개 한 장 뒤집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듯이.
해갈될 기미가 보이지 않던 갈증이 이 책 하나로 단번에 풀어진건 아니다. 차가운 바람이 몹시 부는 이곳에선 갈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모든 게 휙휙 돌아가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녀라면 이 갈증과 바람에 대해 그녀다운 얘기들을 해주겠지만 난 가당찮은 아치니까 이 정도로 해둬야겠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고, 온풍기는 꺼졌다. 굴라쉬 브런치를 읽으며 아주 많이 흡족, 아니 배불렀다는 얘기로 이 페이퍼를 마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