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하지만 나는 여행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지를 돌아다니는 탐험가의 용기도 없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큼 그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서 알차게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부지런함도 없다. ...... 다닌 곳의 면면을 꼼꼼히 적고 분류해서 기록에 남기는 철저함도 없다.
내가 하는 여행은 게으른 자의 어슬렁거림에 가깝다.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그러나 체계적인 계획과는 거리가 멀고 달랑 방랑벽 하나만 있는 게으른 자의 여행 말이다. ......일주일, 보름, 혹은 한 달, 길게는 석 달 동안 한 곳에 짐을 부려 놓고 마치 그곳에서 계속 살 것처럼 뭉개다가 심심하면 주위를 둘러보는 그런 식이다. 떠나기 전에 여행기를 읽거나 여행 정보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는 일도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그건 순전히 게으름의 결과인 듯 싶지만 마음 고쳐먹고 부지런 떨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런 게으른 자의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는 근사한 건물과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친절하고도 멋진 사람들, 일정 없이 슬렁슬렁 다니다가 들어간 예쁜 까페,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긴장감과 호기심...... 그건 나처럼 여행하는 사람들이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즐거움이다. 물론 놓치는 것도 많다. 기껏 돈 들여 다녀왔는데 정말 중요한 것을 지나쳤다든가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하도 많이 읽거나 보아서 이미 익숙해진 눈으로 해당 장소에 가서 남들의 감상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일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로 재미없다. 산에 올라가도 정상을 정복한 일이 한번도 없고 길 찾기에는 젬병이어서 간혹 자기 집도 못 찾아 헤매는 믿을 수 없는 방향치인 내가 여행기를 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중략)......
베를린, 젊은예술가들의 천국 서문 중
내 맘을 쏙 빼닮은 여행'관'을 만났다. 누군가의 여행책을 볼 때마다 왜 나는 이렇게 바지런하지 못하지, 왜 나는 이렇게 열정이 없지하며 한탄을 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이 도시를 어슬렁거리는건 '돈 많이 드는 여행'을 하기보다 두 다리면 되는 동네 여행이 더 적성에 맞아서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지금은 새벽부터 노려온 아침잠 없는 부지런한 잡범이 자전거를 훔쳐가 그나마 해오던 어슬렁질도 못하고 있지만. 생각해보니 여행 노래를 부르면서도 막상 떠나지 못한건 귀찮음 때문이었다. 훌쩍 떠나기엔 배시간을 맞추고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짜는게 번거로웠다. 그래도 여행을 꿈꾼다. 특히 말보다 제스처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시칠리아로 떠나는 꿈을.
시칠리아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상상해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러스 그리고 유쾌하고 친절한 사내들, 거대한 유적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들,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와 그것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올리브나무, 싸고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검은 머리의 처녀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 예전에 나는 로마와 피렌체, 베니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장사치들, 약삭빠른 도시인들과 척박한 삶, 테마파크를 닮은 번드르르한 대리적 건물들만 보았던 것이다. 내가 꿈구던 이탈리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저 영화나 관광엽서, 여행사의 팸플릿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 그것들은 모두 시칠리아에 있었다.
<김영하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중>
시칠리아는 먼 꿈 같아 맘 먹으면 차표 하나로 다다를 수 있는 곳도 생각해놨다. 청산도, 유치, 증도, 창평... 슬로시티란 타이틀로 어느 지명의 성격을 고정시킨 것 같지만 사진으로나마 접한 청산도 청보리 밭은 참 아름다웠다. 지도를 검색하고 차편을 알아보면서 가벼운 차림으로 청산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는 상상을 했다. 이 책의 이 구절을 만나기 전까지는

노인과 나란히 들판을 걷는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고 달아난다. 노인은 호미가 든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
"근디, 왜 혼자 댕겨? 일행을 놓쳤어?'
노인이 묻는다. 혼자 왔다고 하자,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을 텐디, 왜 혼자 다니냐며 나무란다.
"같이 다녀. 어차피 난중에 혼자 될 텐디......"
여행을 떠나고 싶은건 혼자 있는 시간,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아침에 혼자 눈을 뜨며 내 몸과 느낌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누군가의 찬사가 섞인 장소를 내 나름대로 느끼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로 여행을 가려고한 것 같진 않다. 그런데 할머니 말씀을 들어보니 (내가 귀가 한참이나 얇아서겠지만) 혼자 되고 싶은 막연한 동경을 재고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 좋았던건 우루루 몰려다니며 소란했던 여행객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날이 따뜻해지면 같이 또는 혼자 여행 다녀야지. 낯선 사람들에게 괜히 말을 걸어보고, 꼬마들에게 인사를 건네야지. 동네 개들에게 멍멍 짖는 장난을 치고 봄이 피어나는 소리를 온몸으로 느껴야지. 선술집에서 대접에 따른 막걸리를 쭉 들이켜야지. 그렇게 여행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