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안 본다고 전력공사에 전화를 했다. 수신료를 청구하지 않도록 하겠단다. 혹여 나중에 방문했을 때 텔레비전이 있으면 그날부터 수신료를 내야한다고 말한다. 네네.
 새로 사는 집엔 텔레비전이 없다. 이젠 몇달 됐으니 새로 사는 집 운운하면 헌집은 자기 얘기 하는줄 모르고 딴청을 부릴지 모르겠다. A는 텔레비전을 좋아하지만 텔레비전보다 나를 더 좋아하니까 TV 대신 나와 같이 살기로 짠짜 한거다. A와 텔레비전 보기 대신 다양한 놀이를 개발했다는건 좀 어마어마하고 어쩌다 보니 몇 가지 놀이를 하게 됐다. 모월모시, 할 일 없는 아치는 페이퍼에 뭔 놀이를 했는지 적어보려 한다.

 * 표정 알아맞추기

 자주 짓는 표정이 있다. 아치는 울면서 거울 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울 때는 물론 화내고 짜증내고 즐거워할 때의 표정을 모른다. 어느 날 아치의 표정을 따라하는 A를 보고 표정짓기 놀이를 제안한건 여러모로 지략과 문무를 겸비하여 머리가 큰 아치 생각이었다. 먼저 A가 시작했다.
 입은 대발로 나오고 몸을 좌우로 비튼다.
- 띠, 아치가 오리 흉내내며 뛰뚱거리는거?
- 땡!
- 띠, 아치가 배고프다며 밥 달라는거?
- 딩동댕
 에~ 뭔 표정이 그래, 그리고 난 저렇게 귀여운 표정 지으며 밥 달라고 한적 없단 말야 등등의 대응을 했으나 A는 가차없이 다음 표정으로 넘어갔다.
 이마에 삼자를 세우고, 입으로 험악한 말을 하는 듯 얼굴이 엄하다. 오른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삿대질을 한다.
- 띠, 너 혼자 뭐 먹고 있을 때 나도 좀 달라는 표정?
- 땡!
- 혹시 지민이한테?
- 딩동댕
 그러니까 그 표정은 지민이가 장난을 치거나 누나를 괴롭힐 때 짓는 표정이라는건데, 애들이 무서워할만 했다.

 나도 A의 표정을 흉내냈다. 얼굴 근육을 잔뜩 긴장 시켰다 풀었다 하면서 과장을 했다. 그렇지만 A만큼 세밀하게 하진 못하겠더라. 표정 놀이의 급수는 평소에 상대방을 유심히 보며 쌓아놓은 관찰력과 거울을 자주 보는 습관에 따라 갈린다. 거울 잘 보는 남자-사람에게 당할 수가 있어야지. 

* 상상 스피드 퀴즈

 말 대신 온 몸으로 설명하는거다. 상상력과 지구력, 인내심과 (저렇게 쉽게 설명하는데 못맞추면 어쩌나 하는)불안감을 숨기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버스랑 병아리, 방귀를 설명하는데 방귀는 엉덩이를 들자마자 A가 맞춰버렸다. 병아리는 닭을 먼저 흉내낸 다음에 손을 오므려서 그게 이렇게 작은거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A가 못알아들었다. 결국 패쓰. 버스도 네모난 모양에 운전하는 흉내랑 버스 카드 찍는걸 보여줬는데 아무리해도 A가 못맞추는거다. 나중에 너라면 어떻게 할거냐니까 손잡이 모양을 제시한 다음에 그걸 잡고 이리 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흉내내는거다. 아 그렇게 하는거지! A는 상상해서 설명을 잘 하고, 나는 말로 풀어내는걸 잘 한다. 괜찮은 조합이다.
 요즘 한약을 먹는다고 장이 좋아졌는지 연신 방귀를 뀐다. A는 아치 방귀 때문에 식욕이 감퇴되고 두통이 심해졌다는 말 대신 이 그림을 붙여줬다.

 * 화투치기
 
 지난번에 동생이 놀러와서 남기고 간 건 '다시다를 넣고 맛있게 떡국 만들기' 비법만은 아니었다. 텔레비전이 없어 심심해하는 동생과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는데 그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평소에 사행성 노름을 멀리하고자하는 소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고스톱을 못쳐서 고스톱을 멀리 해온 아치로선 지난 시간이 아까워질 정도로 화투치기는 재미 있었다. 동생이 간 뒤 남은 화투로 아치랑 A는 밤마다 허리 끊어지는줄 모르고 맞고를 쳐댔다.
 순진하게 생겨서 화투짝 하나 못맞출 것 같던 A가 현란한 짝짝 소리를 내며 처음부터 기선제압을 했지만 지고 있을 아치가 아니었다. 직장에서도 머릿 속에서 패맞추기, 팔목 근력 강화 운동을 거듭한 끝에 지금은 실력이 거즘 비슷해졌다. 가끔 A가 구사하는 '판을 꿰뚫어 다음패를 알아맞추기' 비법까지는 터득하지 못했지만.
 다음 사진은 옥찌들이 놀러왔다 남긴 그림. 저기 긴머리 애벌레는 아치란다. 쳇

* 지적질 놀이

 손바닥만한 살림살이지만 뭐 그리 치울게 많고 신경 써야할게 많은지 모르겠다. 부엌에 피어나기 시작하는 곰팡이는 주인집에서 '전에 살던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에서 번번히 원래 그런갑다로 내버려둬야 했고, 환풍기에서 물 떨어지는건 비나 눈이 안 오길 바라는 수 말고는 도리가 없어 보였다. A와도 생활 습관이 다르다보니 여러가지로 신경 쓰일게 많았다. 아치는 A가 세제 뚜껑을 안 닫거나 불을 켜놓고 돌아다니는 것, 방바닥에 머리카락 있는걸 지나치는걸 못견뎌한다. A도 아치가 벗은 옷 그대로 방바닥에 굴러다니게 놔두는거나 설겆이를 드럽게 하는걸 안 좋아한다. 둘 다 깨끗함에 대한 기준도 달랐다. 아치는 물 아낀다며 안 씻고, A는 물을 아껴가며 씻는거라고 했다. 

 다툼이 생기면 맘씨 좋은 A가 먼저 양보를 한다. 아치는 그럴 때마다 좀탱이 속 같은 자신을 탓해보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건 아니었다.

 그렇게 지내길 며칠, 무슨 말 끝엔가 A가 눈짓으로 뭔가를 가리키는데 내가 벗어서 정리 안 한 옷이 눈에 띄는거다. 그래서 나도 A의 눈과 멀티탭에 여전히 꽂혀있는 전기밥통의 콘센트에 각을 맞췄다. 안 맞는게 당연한데 그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뺐다. 그래서 우린 싸울까봐 피하는 대신 막 지적질 하기로 했다. 길 난다고, 그렇게 하다보면 서로가 원하는게 습관처럼 맞는 날도 오겠지. 그동안은 싸우는데 에너지를 다 쓰는 대신 웃으면서 지적질-놀이를 해야겠다.

 다니기 싫은 직장에서 보기 싫은 사람들과 존재감 없이 지내는 대신 놀이를 한다. 사실 이건 몰래 카메라다, 몰래 카메라가 '몰래 카메라였습니다.'라고 밝히는 날은 내가 퇴직하는 날일거야라는 놀이, 뭐 이런걸 자주 떠올리고 상상을 자주 하다보면 현실과 상상을 구분 못하고 정신이 요래 이상해질 수 있을 위험이 다분하다. 친구가 일러준 미친척 하기, 힘을 기르기 등등의 실전 테크닉도 도움이 안 되는 날이다. 농사 지을거라고 했더니 친구는 현실 도피 밖에 안 될거란 대꾸를 한다. 딸꾹질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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