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7회째를 맞은 한겨레 인터뷰 특강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읽다. 그동안 노회찬씨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그의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비전에 맘이 동했다. 신자유주의의 구조적인 문제를 비튼 앤디 비클바움(예스맨 프로젝트의 주인공)의 독특한 이력도 흥미로웠다. 대개의 질문에 그건 'theyesmen.org'에 나와 있다고 말한 건 별로였지만. 공지영씨의 미모 얘기와 여유로움, 소설의 대중성과 포르노와 혁명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었다. 결국 한가한 사람이 바쁘기만한 부자들을 이긴다고 말한 마쓰모토 하지메의 특강은 너무 신나서 그를 따라할 생각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나만의 명함'을 만든다면 어떤 문구를 넣을까 고민할 정도였다. 그리고 김규항씨.

 김규항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르치려는 것 같고(내 글도 다를 바 없어 더 그런 맘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안의 이명박>이나 <말로는 정권 욕 하고 아이들은 학원 보내고>등등의 몇 개 안 되는 주제를 우려먹는 것 같았다. 아이를 학원 보내는게 스펙이 아니라 그 방법이 아니면 아이를 봐줄 방법이 없는 엄마들의 입장을 간과한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예전 페미니즘 논쟁에서 보인 그의 논조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의 <예수전>출간 때 출판 기념회 갔을 때는 저자와 독자의 만남보다는 종교 집회를 연상시킬 정도로 분위기가 엄숙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어느 면에선 글보다 완화된 인터뷰 형식의 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고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또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문득 조카들이 좀 더 자라면 <고래가 그랬어>를 구독해서 같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믿고 그 길만을 바라보고 가는 사람이 겪는 시행착오에 나는 너무 애먼 잣대를 들이댔다. 누군가의 진심이 전해졌다는건 너무 비장하다. 대신 친구가 말한 대로 누군가의 어떤 점이 안 좋더라도 다른 좋은 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것 정도.


 김대우의 음란서생을 보다. 김대우의 인물들은 비슷하다. 그 비슷함이 참 맘에 든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에 씌워진 것들을 벗겨내니 인물들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가 넓어진다. 음란한 글을 짓는 서생이 왕비를 사랑한다고 믿었다면(사랑한다, 사랑을 믿는다)드라마는 심심한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한석규 옆에 있던 왕과 환관의 비장함이 애처롭기보다는 뜬금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대우의 재기발랄함이 방자전으로 이어진건 두말할 나위 없다. 나는 배우나 시나리오보다 감독을 믿고 영화를 선택한다. 보기 드문 신작이나 신인 작가의 괜찮은 작품을 놓칠 수 있을진 몰라도 비교적 안전하게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짜>의 장점들이 쏙 빠진 <전우치>처럼 그 선택이 늘 정답은 아니지만. 김대우 영화 속 여배우들은 예쁨을 보여주는 방식이 전형적이긴 하지만 어떤 영화에 나올 때보다 아름답다.


  여행을 하는 행위가 그 본질상 여행자의 의식의 변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묘사하는 작업 역시 그 움직임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어디어디에 갔었습니다.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했습니다."하고 재미와 신기함을 나열하듯 죽 늘어놓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좀처럼 읽어 주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지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일상에 인접해 있는가' 하는 것을 복합적으로 밝혀 나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정말 신선한 감동은 거기서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변경이 소멸한 시대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 속에는 아직까지도 변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추구하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런 궁극적인 추구가 없다면, 설사 땅 끝까지 간다고 해도 변경은 아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시대이다.

  하루키의 여행법을 읽으며 역시 작가는 대개의 유행가 가사처럼 막연하게 짐작하는 것들을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쉬운 말들로 여행서를 정의할 수 있다니. 그래서 그의 여행법이 여행서로서 최고였냐하면 그건 좀 두고 볼 일이다. 죽음의 다이빙과 누군가의 여행 이후의 삶을 궁금해하는 점은 좋았지만 노몬한의 철의 묘지를 읽다가 지루해졌으니 말이다. 앞서의 포부와는 다르게-여행서의 정의 정도를 쓴 게 다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반짝이는 순간은 긴 서술 끝에 나타나고, 그런 변경을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쌓인 책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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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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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셀은 세계에 관한 확실한 앎을 원했다. 러셀이 꿈꾼 완벽한 우주는 철두철미하게 합리적이고 확실한 앎을 약속했다. 그는 유클리드 정리에서 본 확실성에 매료되지만 그 당시 수학은 증명되지 않은 전제들과 순환적인 정의들이 널려있는 난장판이었다. 강력한 논리학, 그게 없었다. 게다가 게오르크 칸토어의 무한은 인류의 정신을 압박해온 관념이었다. 무한은 수학의 내면이 허약하단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즈음 버트란트 러셀은 그 자신의 이름을 딴 역설을 생각해낸다. 그리스 시대의 에우불리데스가 말한  ‘여러분,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와 비슷한 자기 언급이 포함된 명제가 그것. 이 역설은 ‘집합’이 공통 속성을 통해 정의된 집단이란 생각뿐 아니라 논리학을 파괴한다. 그렇다면 수학의 토대는 무엇일까. 그 토대를 증명하기 위해 러셀은 화이트 헤드와 함께 ‘수학의 원리’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불가능하며 ‘논리학은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라는 신념은 이제 완벽하게 정당화되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면서 전진하는 것은 러셀에게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오직 ‘멍청해지기’를 통해서만 겉보기에 자명한 장벽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혼란스러운 실재를 명확한 지도로 환원, 실재를 더 단순한 것들로 대체해 논리학이 더 자연스럽게 적용되도록 노력하지만 이것은 실재와 지도를 혼동하기, 광기의 완벽한 정의를 제공할 뿐이었다.

 1911년 러셀은 프레게 소개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난다. 비트겐슈타인은 유형을 역설의 침입을 막는 수비대로 봤다. 예컨대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자는 이발사에게 면도를 받는다’ 이때 이발사는 누가 면도해주냐는 역설에서 이발사의 계급을 나눌 경우 이 명제는 증명할 수 있게 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전문적으로 논증 다듬는 일을 맡겼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진리의 본성에 관해 러셀이 암묵적으로 품어온 가장 기초적인 전제에 의문을 품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실재의 부분 각각이 기호로 대체, 기호들이 그것들 간의 실제 관계에 맞게 재결합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관계는 언어에 의해 매개된다고 봤다.

 비트겐슈타인: 논리학은 언어의 형식, 철골 구조가 건물 속에 들어 있듯이 논리학은 언어 속에 있다. 그러나 철골 구조 속에서 살 수는 없다. 러셀이 논리학의 토대를 창조하려다 실패한 원인은 논리학의 본성 자체에 있다. 논리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논리학을 보여주는 것만 가능하다.

 러셀: 내일 눈이 오거나 아니면 오지 않는다는 진술은 공허한 형식이지만 완벽한 진리이다.

 비트겐슈타인: 하지만 내일의 날씨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진리이다.

 이 둘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러셀은 지난 20년간 항진명제를 생산하는 기계<논리철학논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비지땀을 흘린 것이었다. 더군다나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을 전부 다 알아도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며 세계를 이해하려면 세계 밖으로 한 걸음 나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성은 여전히 옛날과 똑같이 격정으로 가득 찬 달걀이고 그 달걀에서 여전히 옛날과 똑같은 오믈렛이 만들어진다.’ 러셀은 세상 밖으로 나가 인간성을 개조하려고 교육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런 즈음 괴델은 러셀의 저작 ‘수학의 원리’에서 가장 기초적인 전제를 명확하게 진술한 문장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한다. 모든 참인 논리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고 모든 거짓 논리 명제가 거짓임을 증명한다.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그 전제이지만 증명할 수는 없었다. 러셀은 노력의 중심에 공허가 있음을 깨닫는다. 러셀은 감정과 애매함이 두려워 논리학에 끌렸는지도 몰랐다. 러셀이 증명하려고 했던 최초의 전제, 즉 수학의 토대를 찾는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물론 러셀이 추상 언어로 수학을 절대적인 확실성 위에 세우려고 노력한 과정에서 나온 강력한 방법들은 수학에서 유효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핵심은 증명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결론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있다는 것. 괴델로 인해 ‘증명할 수 없는 것도 있다’란 결론에 도달한 논리학은 컴퓨터의 개발로 ‘어디까지 증명할 수 있나’란 과제 앞에 놓였다.

 여기까지가 내가 메모하고 정리하면서 책을 읽은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 책 정말 재미있다’란 감상을 별로 안 좋아한다. 하나마나한 감상을 굳이 글로 쓰고 사람들에게 보일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로지코믹스’를 다 읽고 나서 단박에 든 생각은 역시 ‘이 책 정말 재미있다’였다. 어렸을 때 이 책을 접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거란 낯뜨겁고 뻔한 감상도 생각났다.

 러셀의 강연을 시작으로 책을 구상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 그리스 비극에서 이야기가 배울 점, 러셀이 ‘토대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 등은 독자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 이야기들은 유기체처럼 연관되어 있다. 복잡한 구조가 혼란스럽다기보다는 이야기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돋보일 수 있게 했다. 각각의 발언은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사안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이런 효과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곧 토대를 찾아서 떠났지만 결국 토대를 찾을 수 없었던 이 책의 여정과도 닮았다.

 ‘왜’라는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도 좋았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단편적인 이론만 훑는게 아니라 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 어떤 식으로 해결하려 했는지 진득하게 따라가면서 나 역시 그들과 같은 고민을 했다. 본격 철학책은 너무 어려워 철학의 엑기스를 뽑았다는 요약서나 연대기적 주요 사상을 소개한 책들을 읽으며 철학적 사고를 해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진작 로지 코믹스를 읽었어야 했다. 이 책은 어렵기로 유명한 책들의 해설서라도 읽고 생각의 흐름을 잡고 싶게 만드니까. 여전히 나의 책 읽기는 해설서를 읽고 원작을 이해하려고 낑낑대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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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0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9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영장에 다니고 있다. 숨쉬기와 발차기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숨쉬기를 잘하면 발차기가 안 되고, 발차기에 공을 들이면 숨이 모자라 가라앉기 일쑤다. 딱 이 정도의 프로세스로 수영장을 다니고 수영을 한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물을 틀어놓고 다니거나 대여섯개씩 구비하고 다니는 세제로 여러 번 몸을 닦아내는걸 보는건 좀 그렇다. 나라고 별 수 있는게 아니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한 눈의 장난질, 맘의 요동질로 수영장에 수영이 아닌 수양하러 오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나를 포함해 늙고 남루한 몸들로 가득했던 수영장에 얼마 전부터 젊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윤기 있는 생머리를 정성껏 손질하고 얼굴에 화장품을 꼼꼼히 바른다. 홀쭉한 배와 풍만한 가슴, 탄력 있는 몸매에 자신 있는 걸음걸이까지. 나는 끝이 갈라진 머리카락을 도끼빗으로 빗다가 힐끔힐끔 그녀들을 쳐다본다. 누군가의 시선을 많이 받아본 무심한 표정이다. 그녀들은 날씬함이 돋보이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깔깔대며 여자 탈의실을 나갔다. 남겨진 공간에 떠도는 정체모를 우울감과 순식간에 왜소해진 자아들(혹은 내 자아만)의 한숨 소리.

이럴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정신 건강법'

- 나는 괜찮다. 나는 외모 꾸미는걸 귀찮아하고, 흥미를 못느낀다. (기본적인 외모 자신감과는 별개로)
- 저 아이들은 내가 느끼는걸(주로 변두리 감성) 못느껴볼거야.
- 나는 내 몸을 사랑한다, 내 몸을 좋아한다. (어쩌면 가끔)

 하지만 극복되지 않았다. 외면하려해도 그 아이들의 젊음은 그 자체로 환하게 빛났다. 내 몸뚱이가 초라해지는 느낌은 나 자신이 멍청하다는 느낌보다 더 교묘하게 사람 기를 꺾어놓는다. 왜 나는 이런 느낌을 못견뎌할까. 왜 나는 젊은 사람들의 스타일에 매료될까. 젊음 자체보다 젊음에 깃들인 자유와 무모함이 부러운걸까. 그저 이건 낯선 상대를 대할 때 느끼는 역시 낯선 감정인걸까.

 예쁘고 젊은 애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에서 외모도 경쟁력이란 소리를 듣고 식겁했던가, 역시 그 영화의 불안한 감정이 담긴 대사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읊는 예쁜 애들에게 실소했던가. 아니면 역시 별 수 없다는 생각에 자포자기 했던가. 나의 많은 장점은 속성상 즉시 발견되지 않으니 이토록 몰아치는 좌절감은 금물이라고 헛물을 켰을까. 아니면 예쁘거나 젊은 사람들이 주위에 드물어 처음엔 신선했지만 자주 보니 식상하다고 느꼈던가. 어쨌든 지금은 낯선 감정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괜찮다. 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의 젊음과 예쁨 앞에서 내가 속절없이 무너질거란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건 젊음과 미모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잘 쓴 글에, 잘 다듬은 생각에, 거친 개성에, 감탄하고야마는 센스에도 내가 약하다는걸 나는 잘 안다. 

 항상 자신이 찍힌 사진을 맘에 들어하지 않던 사진작가가 있었다.(메모해놓은게 아니라 구체적인 부분은 좀 다를 수 있다) 그는 사무엘 베게트를 닮고 싶었지만 자신의 생김새는 베게트와 너무 달랐다. 그의 눈에는 자신이 찍힌 사진의 부족한 면만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사진을 보고 어떤 학생이 말한다.

- 오, 당신이 찍힌 사진 말예요. 그 사진 속 당신은 사무엘 베게트를 닮았어요.

 
 그런 순간이 올지는 모르겠다. 누군가를 닮고 싶다가도 하루에 수십번씩 맘이 바뀌니 말이다. 강렬하게 뭔가를 원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뤄진다는데 나는 긍정의 힘도(난 홍철씨가 아니에요), 강렬한 뭔가도 없다. 사실 그런 믿음 자체에 의심을 품고 있다. 그런 말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했다고 퉁치는 말장난 같다. 낯선 감정이 돋아나는 순간엔 내가 초라하거나 유난히 뿌듯하겠지만 그 생각이 오래가진 않을 것 같다. 나는 생긴대로 살아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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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5-0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 수영을 배우고 있군요! 멋져요. 완전 에스라인 되서 컴백하는거 아녜요? ㅎㅎ
있지, 아치랑 수영은 어쩐지 잘 어울려요.

나는 최근에 아주 강렬하게 원하는 뭔가가 있어요. 아니, 최근이라고 하면 기간이 좀 애매모호하지만, 어쨌든 있어요. 그래서 아치처럼 결과가 좋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했다고 퉁치는 말장난, 같다는 생각을 안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쨋든 강하게 원하면 이루어질거라고 속으로 내내 생각해요. 이것보다 어떻게 더 강렬하게 원하지? 라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어떻게든, 혹시라도 제가 원하는 이것이 이루어지면, 그때 사람들에게 말하게 될 거에요. 난 정말 이걸 아주 강하게 원했거든요, 그랬더니 이렇게 됐어요. 하고. 아마 그때는 울지도 모르겠어요, 그치요?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이걸 원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나도 가끔은 거울에 발가벗은 몸을 비춰보면서 나는 내 몸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그 순간을 제외한 다른 순간들에는 사실 나는 내 몸을 좋아하지 않아요. ㅜㅡ


아치, 나는요,
내가 더 많은 걸 가졌더라면, 더 좋은 환경과, 더 좋은 유년시절과, 더 좋은 부모를 가졌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요, 내가 많은 걸 가졌다면, 많은걸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몰랐을 거에요. 이해심이 지금보다 더 부족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런것들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는 것이 최상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내가 하는 말이 무슨말인지 이해가 되려나요? 나는 아치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아치가 지금 가진 것, 그게 아치의 최상인것 같아요.

Arch 2011-05-01 17:00   좋아요 0 | URL
다락방은 내가 뭐 한다고 하면 자기 일처럼 좋아해주는군요. 이 맛에 페이퍼를 올린다니까^^
S라인은 모르겠고, 그냥 배영을 얼른 배워 물 위를 떠다니고 싶어요.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지금 나는 최선이란 생각. 어제 팀장님이랑 이야기가 잘 돼서 무지 기뻤는데 오늘은 그분이 웃으면서 아치를 어쩜 좋냐고 해서 여전히 나는 날 잘 모르겠어서 다시 의기소침해졌어요. 기쁨의 질량은 늘 비슷하게 유지되는 것 같아요. 그건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겠죠.

늘 그렇지만 페이퍼보다 좋은 댓글 고마워요. 그리고 다락방이 바라는 그거, 꼭 이루길 바랄게요. 그래서 이룬 즉시 당장 페이퍼에 올려서 모든 알라디너가 축하해줬음 좋겠어요.

미잘에겐 내가 소문내줄게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쟁이로 꼽히는 데이비드 세다리스. 데이비드 세다리스의 전설은 시카고의 작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신의 일기를 읽어주는 데서 시작되었다. 어처구니없는 그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볼륨을 높이며 빵빵 웃음을 터뜨렸고, 결국 '세다리스 타임'은 전국 방송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전 세계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나도 말 잘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는 20주 동안이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전 세계 300만 부가 판매되는 등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에세이집이다. 이 작품집에는 일상의 시시콜콜하고 어이없는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세다리스 특유의 유쾌함이 잘 녹아들어 있다. 뉴요커들과 파리지앵들을 모독하는 즐거움, 위선적 교양을 거부하는 세다리스의 가족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알라딘 책소개 중

 씨네21에서 즐겨보는 이다혜의 도서 소개에서 봤을 때는 시큰둥했다. 화장실 유머는 너무 지독하잖아! 그런데 얼마 전 다시 이 책이 눈에 띄었다. 한겨레21에서 봤던가. (그런데 왜 다 21이지?) 이다혜씨가 다른 동료에게 이 책을 소개했는지 아니면 출판사의 홍보력이 대단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잡지에서 다른 것보다 도서 소개를 먼저 보고 요 근래 두개의 잡지를 자주 봤다고 치더라도 두번이나 노출되는건 우연으로만 치부하기엔 뭔가 좀 그렇다. 게다가 에세이 아닌가. 
 아래 두 책만큼 재미있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책이 달랑 두권이라는건 좀 별로다. (재미있는 책 좀 추천해주세요!)

 

 

 


 '지식채널e'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변화되었는지에 대한 개인적이고 사소한 보고서. 김진혁씨의 책이라 기대했는데 지식채널 시리즈에서 보아온 감성지식 이야기는 없다. 다만 저자가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겪은 일과 깨달아가는 과정이 나온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 각각 다른 입장을 갖고 있지만 보편적인 감성에선 누구나 차이를 뛰어넘어 동의할 수 있다는 점, 진짜 슬픔을 고민하다 소외된 이들을 다룰 때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아야겠다는 것 등등. 분노가 문제의식으로 바뀌면서 무기력한 감정에 대해 다룬 다음의 내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느낌'이 불편하다며 '남의 일'에 외면하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분노가 감정적 배설로 끝나지 않고 이성적인 ‘문제의식’으로 자리 잡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고민 끝에 알게 된 것이, 분노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으면 쉽게 배설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후 소외를 낳는 배경을 거론할 때 절대로 몇몇 가해자를 직접적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꼭 지목해야 할 경우에도 가해자를 내용의 ‘주인공’ 자리에는 놓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청자는 ‘화풀이’의 대상을 명확하게 찾기 어렵게 되고, 그처럼 배설되지 못한 감정과 에너지는 문제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쓰인다. 결국 자기가 느낀 감정에 대해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제의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제작진은 그처럼 시청자가 분노를 문제의식으로 승화시킬 준비가 됐을 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구조적 문제 한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지만 모든 감정이 다 승화되지는 않는다. 일부 분노는 승화되지도 못하고 배설되지도 못한 채로 내면에 남는데 그건 일종의 ‘무기력함’일 것이다. 아무리 문제의식을 가져봤자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 않는 데서 느끼는 절망 말이다. <지식채널e>를 보고 느끼는 ‘먹먹함’이라는 감정도 바로 이게 아닐까. 그러나 이 ‘무기력함’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느낌은 다름 아닌 소외된 이들이 체험하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시청자는 소외된 이들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나마 그 입장에서 그들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무기력함을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체험할 수 있다. 소외 문제에 있어서도 백 마디 말보다는 한 번 경험하는 것이 훨씬 나은 법이고, 이는 문제의식이나 비판의식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핵심적이다.

 
   

   '진짜 할바를 찾아서'는 물론이고 근사한 음식보다는 소박하고 추억이 담긴 음식 얘기를 하는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은 재미있다.     

 그 중에서 특히 괜찮았던건 동화에서 나온 음식 얘기를 하는 부분이었다. 분명히 어렸을 때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문고판으로 읽은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하이디가 염소젖을 먹는 부분은 기억이 안 나는거다. 다행히 펭귄문고에서 적은 단어로도 하이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었다. 나무에서 나는 바람 소리를 듣고, 밤하늘을 보길 바란 하이디. 하지만 눈을 뜨면 할아버지네 집이 아닌 프랑크푸르트였다.


He carried Heidi up to her bedroom and put her on the bed.
"You're all right now." he said.
"Tell me, child, Where did you want to go?"
"I was at home, in grandfather's house" said Heidi
"I could hear the wind in the trees, and I wanted to look at the night sky. So I ran to the door and opened it. I do it every night. But when I wake up, I'm here in Frankfurt"

 다시 돌아온 하이디는 염소젖을 먹고 세상에서 이것보다 맛있는건 없다고 했는데, 염소젖을 직접 먹어본 요네하라 마리에 의하면 비린맛이 강해서 그다지 맛있는줄 모르겠다고 했다.

Heidi drank her milk and said,   "Nothing in the world is as good as our milk."

 이 두 구절이 좋았던건 (얇지만 영어로 된 책을 끝까지 읽은 기념은 예외로 하고) 하이디가 피터네 할머니를 생각해서 흰빵을 몰래 숨긴거며 알프스의 할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는 맘이 한 단어씩 또박또박 읽혔기 때문이다. 만약 한글로 된 동화를 읽었다면 이만큼 좋지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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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4-15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뷰리풀말미잘님이 '개콘보면서도 안 웃는 인간이 이 책을 보고는 웃었다'라고 극찬을 하기도 한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는 저는 재미있어서 기억에 남을 만한 책까지는 아니었는데, 아치는 정말 좋았는가봐요. 자주 언급하네요. '죠반니노 과레스키'의 [까칠한 가족]을 추천해주고 싶은데, 아치 그 책 벌써 읽었네요. 그런데 내내 읽겠다고 결심했던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아직 안읽었죠? 그거 진짜 웃겨요. 재미있어요. 이 참에 꼭 읽어봐요, 아치.

아치, 원서 읽는 여자로구나. 멋지다.

저기, 저 위에 [나도 말 잘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궁금해요. 나도 읽어볼래요.

Arch 2011-04-15 12:05   좋아요 0 | URL
다락방은 그걸 어떻게 다 아는거죠?
네~ 까칠한 가족은 정말 '읽었는데' 재미있지 않았어요. 빌 브라이슨의 책도 읽었는데 미국 횡단기는 괜찮았지만 '나를 부르는 숲'은 잘 기억이 안 나요. 다들 너무 재미있다고 해서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봐요.

오, 다락방 원서라니요! ㅋㅋ 단어 몇개 안 되는데 완전 웃기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원서 읽는 여자라고 자랑하고 다녀야지~

네, 저도 읽어보려구요!

hnine 2011-04-1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를 위한 스테이크>는 재미있으면서 저에게는 페이소스도 함께 안겨 준 책이었고 '세다리스'의 책은 재미있어요. 말씀하신 그대로 뉴요커들과 파리지앵들을 모독하는 즐거움, 위선 꼬집기, 허세 까발리기가 주특기이지요.
다른 책들은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고요.

Arch 2011-04-15 12:09   좋아요 0 | URL
책이 재미있다는건 몇개의 구절, 어느 부분에 한정된 것 같기도 해요. 돌이켜보면 저는 전에도 말했던 것 같지만 '개를 위한 스테이크'에서 개가 나온 부분보다 국제통화를 하는데 아이가 유치원에서 생긴 일을 말하는 그 부분 있잖아요. 그게 재미있었어요. 역시 재미는 작정하고 웃기려는 것보다 가감없이 상황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hnine님, 어떤 페이소스였는지...

읽으셨군요! 저는 책 소개 때문에 더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아, 너무 기대하면 안 되는데~

hnine 2011-04-15 21:23   좋아요 0 | URL
음...개를 위한 스테이크를 읽으면서 나오는 웃음과 세다리스의 책을 읽으면서 나오는 웃음이 같지 않았거든요. 개를 위한 스테이크를 읽으면서 나오는 웃음이 어딘가 허탈하고 씁쓸한 웃음이었다면 세다리스의 책을 읽으면서의 웃음은 그야말로 '푸하하~~' 웃음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표현력이라니 참...(귀엽게 봐주세요~~ ^^)

Arch 2011-04-16 18:13   좋아요 0 | URL
아, 더 기대돼요. 이 갈증을 뭘로 풀어야할지...

치니 2011-04-15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 e의 고민은 정말 우리 모두의 고민과 맞닿아 있었구나.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굳이 책으로까지야, 이런 생각이었는데.

21을 다들 붙인 이유는 다소 싱겁지만 21세기라서 그런 거 아닐까 싶구요. ㅎ

Arch 2011-04-15 12:12   좋아요 0 | URL
아, 그런데 적극 추천하는 책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식채널e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떤 과정이었는지가 궁금하다면 읽어도 좋은데 제가 인용한 부분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차지하는게 아니라서.
책 소개는 정말 어려운거군요. 차라리 이 책 관심있어요! 이러는게 훨씬 맘 편할 것 같아요.

싱거운 그 이유가 정말 이유일 것 같아요.

nada 2011-04-1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미식견문록>에서 할바 이야기가 제일 인상 깊었어요.
할바란 이름도 좋지만, 터키꿀엿, 이렇게 불러도 꽤 귀여운 느낌이 들어요.ㅎㅎ

어릴 적 <소공녀>의 세라 방에 하나둘 채워지는 탐스런 물건들과 점점 훈훈해지는 방에 대한 묘사가
완전 황홀하고 달콤했던 기억이 나거등요.
그래서 원서를 사서 읽어봤는데, 그 느낌이 안 나는 거예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늙어버려서 그런가 봐요.
아치님은 저랑 반대네요. 원서가 더 좋으셨다니.

하이디가 피터네 할머니를 생각해서 흰빵을 몰래 숨긴거며 알프스의 할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는 맘이 한 단어씩 또박또박 읽혔기 때문이었다.
<-이 문장 완전 사랑스러워요.ㅎㅎㅎ

Arch 2011-04-16 18:19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까 할바란 단어도 참 좋았어요. 저도 꼭 한번 먹어보고 싶은 맛이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 박복했던건지 그런 기억이 별로 없어요. 소공녀도 언제 한번 도전해봐야지!(불끈)꽃양배추님 원서라고 하니까 자꾸 웃겨요. 왜냐면 이 책은 비기너들을 위해서 몇개 안 되는 단어로 지은 책이거든요. 아마 원래 지었던 책을 읽었다면 중간에 포기했을거에요.

그 말은 과장님 칭찬에 단련된 저라도 왠지 쑥쓰러워요^^
 

 

 두 권의 책을 읽는데 묘하게 겹친다. 그건 쓰고 싶은 사람은 무조건 쓰라는 것. ‘발자크처럼 써라’에선 그의 오문과 수식어의 단조로움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생각나는대로 쓰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야기를 복잡하고 흥미롭게 만들 것 등등의 주문은 보너스다. 작가적 특징은 <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다만 <거장처럼 써라>는 작가 얘기보다 어떻게 써야할지, 무엇을 써야할지에 대해 말한다. 모든 창작 독려 책들이 하나같이 발설하는 비밀은 우선 ‘쓰라’는 것. 그렇다면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은 쓰는 대신 다른 비결이 있는지 궁금해서 작법 책을 보는 걸까. 정말 이다혜의 말처럼 작법 책은 글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자기계발서’인걸까.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article_id=65330&page=3&mm=100000010

 ‘보헤미안의 파리’에서는 파리를 돌아다니며 ‘쓰라’고 한다. 쓰라는 주문은 같은데 이 책은 좀 더 낭만적인 기질을 갖고 있다.  

플라뇌르는 ‘산책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플라뇌르는 도시의 거리를 거닐며 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사소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이나 우연히 만나는 괴상한 장면들을 구경하며 자기 내면과 때로는 실없는, 때로는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사람을 말한다.

 에릭 메이슬은 파리를 거닐고 충만히 느낀 후 창작할 것을 권유한다. 보주 광장에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해도 쬐면서 글을 쓰라고 한다. 관광객이 들이 닥치기 전인 아침 9시 15분에는 오르세 미술관의 쾌적함과 호사를 누려볼 수 있다고 꼬신다. 벼룩시장에서 좋은 살구가 아니라 주걱으로 아무거나 뜬 살구를 고르며 초고를 끝내놓고 자신 안에 나쁜 요소도 있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고 속삭인다. 프랑스어를 못해도 상관없다. 이 책은 ‘창조적 영혼을 위한 파리 감성 여행’이란 살짝 낯간지러운 부제목을 달고 있지만 부제목이 좀 더 이 책의 성격이랑 맞다. 물론 내가 창조적 영혼도 아니고 그럴 가능성도 없지만 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설렌다.

 그런데 왜 파리지?

 파리에 오면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 도시는 우리가 항상 갈망해온, 그러나 여유가 없어 온전히 하지 못했던 것들, 즉 산책하기, 생각하기, 사랑하기, 창작하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게 엮여있다.


 작가 소개를 보니 30권이 넘는 책을 썼다고 하는데 내가 관심가는 책은 <보헤미안의 샌프란시스코>와 <당신 안의 예술가를 깨워라>이다. 재치있거나 기발하진 않지만 꾸준하게 자기 분야에 몰두하는 작가. 내가 참 부러워하는 면모다. 그렇지만 너무 가벼워서 날라가고 싶진 않다. 에릭 메이슬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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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4-08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창조적인 영혼이 아니고 그럴 가능성도 없지만, 분명히 파리에 가서 편안함을 느꼈어요. 그렇다면 서울이 문제?! 아니겠죠? 결국 제 마음이 더 문제겠죠?

Arch 2011-04-08 11:38   좋아요 0 | URL
초고속 댓글이에요! 아직 수정 중이었는데. 치니님은 몽블랑 만년필도 있고, 파리에도 가보셨군요! 부러워요^^
마음도 환경도 다 작용하겠죠. 그러니까 왜 결혼을 안 했냐, 애는 몇이냐를 묻는 환경보다 '요새 재미있는 일 있어요?'나 누군가의 또다른 면모를 발견하는 눈썰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더 신날 것 같아요.

다락방 2011-04-0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 요즘 글쓰기 공부하는 거에요?

저는 사실 파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데 저 인용한 문구에 '여유가 없어 온전히 하지 못했던 것들'이 촘촘하게 엮여있다니, 살면서 한 순간쯤은 파리에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Arch 2011-04-08 11:40   좋아요 0 | URL
아뇨~ 거장처럼 써라는 팝트래쉬님 덕분에 알게 됐고, 에릭 메이슬 책은 보헤미안이란 말에 끌렸어요. 이 책들을 같이 읽고 있는데 묘하게 겹쳤어요.

지금 여기서 여유를 찾으려면 노후는, 결혼은, 혹시 병걸리면 등등의 생존에 관한 물음표만 떠올르니까, 한번쯤 다른 곳에서 좀 느긋해져도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