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7회째를 맞은 한겨레 인터뷰 특강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읽다. 그동안 노회찬씨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그의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비전에 맘이 동했다. 신자유주의의 구조적인 문제를 비튼 앤디 비클바움(예스맨 프로젝트의 주인공)의 독특한 이력도 흥미로웠다. 대개의 질문에 그건 'theyesmen.org'에 나와 있다고 말한 건 별로였지만. 공지영씨의 미모 얘기와 여유로움, 소설의 대중성과 포르노와 혁명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었다. 결국 한가한 사람이 바쁘기만한 부자들을 이긴다고 말한 마쓰모토 하지메의 특강은 너무 신나서 그를 따라할 생각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나만의 명함'을 만든다면 어떤 문구를 넣을까 고민할 정도였다. 그리고 김규항씨.

 김규항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르치려는 것 같고(내 글도 다를 바 없어 더 그런 맘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안의 이명박>이나 <말로는 정권 욕 하고 아이들은 학원 보내고>등등의 몇 개 안 되는 주제를 우려먹는 것 같았다. 아이를 학원 보내는게 스펙이 아니라 그 방법이 아니면 아이를 봐줄 방법이 없는 엄마들의 입장을 간과한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예전 페미니즘 논쟁에서 보인 그의 논조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의 <예수전>출간 때 출판 기념회 갔을 때는 저자와 독자의 만남보다는 종교 집회를 연상시킬 정도로 분위기가 엄숙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어느 면에선 글보다 완화된 인터뷰 형식의 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고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또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문득 조카들이 좀 더 자라면 <고래가 그랬어>를 구독해서 같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믿고 그 길만을 바라보고 가는 사람이 겪는 시행착오에 나는 너무 애먼 잣대를 들이댔다. 누군가의 진심이 전해졌다는건 너무 비장하다. 대신 친구가 말한 대로 누군가의 어떤 점이 안 좋더라도 다른 좋은 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것 정도.


 김대우의 음란서생을 보다. 김대우의 인물들은 비슷하다. 그 비슷함이 참 맘에 든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에 씌워진 것들을 벗겨내니 인물들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가 넓어진다. 음란한 글을 짓는 서생이 왕비를 사랑한다고 믿었다면(사랑한다, 사랑을 믿는다)드라마는 심심한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한석규 옆에 있던 왕과 환관의 비장함이 애처롭기보다는 뜬금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대우의 재기발랄함이 방자전으로 이어진건 두말할 나위 없다. 나는 배우나 시나리오보다 감독을 믿고 영화를 선택한다. 보기 드문 신작이나 신인 작가의 괜찮은 작품을 놓칠 수 있을진 몰라도 비교적 안전하게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짜>의 장점들이 쏙 빠진 <전우치>처럼 그 선택이 늘 정답은 아니지만. 김대우 영화 속 여배우들은 예쁨을 보여주는 방식이 전형적이긴 하지만 어떤 영화에 나올 때보다 아름답다.


  여행을 하는 행위가 그 본질상 여행자의 의식의 변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묘사하는 작업 역시 그 움직임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어디어디에 갔었습니다.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했습니다."하고 재미와 신기함을 나열하듯 죽 늘어놓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좀처럼 읽어 주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지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일상에 인접해 있는가' 하는 것을 복합적으로 밝혀 나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정말 신선한 감동은 거기서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변경이 소멸한 시대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 속에는 아직까지도 변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추구하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런 궁극적인 추구가 없다면, 설사 땅 끝까지 간다고 해도 변경은 아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시대이다.

  하루키의 여행법을 읽으며 역시 작가는 대개의 유행가 가사처럼 막연하게 짐작하는 것들을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쉬운 말들로 여행서를 정의할 수 있다니. 그래서 그의 여행법이 여행서로서 최고였냐하면 그건 좀 두고 볼 일이다. 죽음의 다이빙과 누군가의 여행 이후의 삶을 궁금해하는 점은 좋았지만 노몬한의 철의 묘지를 읽다가 지루해졌으니 말이다. 앞서의 포부와는 다르게-여행서의 정의 정도를 쓴 게 다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반짝이는 순간은 긴 서술 끝에 나타나고, 그런 변경을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쌓인 책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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