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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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셀은 세계에 관한 확실한 앎을 원했다. 러셀이 꿈꾼 완벽한 우주는 철두철미하게 합리적이고 확실한 앎을 약속했다. 그는 유클리드 정리에서 본 확실성에 매료되지만 그 당시 수학은 증명되지 않은 전제들과 순환적인 정의들이 널려있는 난장판이었다. 강력한 논리학, 그게 없었다. 게다가 게오르크 칸토어의 무한은 인류의 정신을 압박해온 관념이었다. 무한은 수학의 내면이 허약하단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즈음 버트란트 러셀은 그 자신의 이름을 딴 역설을 생각해낸다. 그리스 시대의 에우불리데스가 말한  ‘여러분,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와 비슷한 자기 언급이 포함된 명제가 그것. 이 역설은 ‘집합’이 공통 속성을 통해 정의된 집단이란 생각뿐 아니라 논리학을 파괴한다. 그렇다면 수학의 토대는 무엇일까. 그 토대를 증명하기 위해 러셀은 화이트 헤드와 함께 ‘수학의 원리’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불가능하며 ‘논리학은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라는 신념은 이제 완벽하게 정당화되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면서 전진하는 것은 러셀에게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오직 ‘멍청해지기’를 통해서만 겉보기에 자명한 장벽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혼란스러운 실재를 명확한 지도로 환원, 실재를 더 단순한 것들로 대체해 논리학이 더 자연스럽게 적용되도록 노력하지만 이것은 실재와 지도를 혼동하기, 광기의 완벽한 정의를 제공할 뿐이었다.

 1911년 러셀은 프레게 소개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난다. 비트겐슈타인은 유형을 역설의 침입을 막는 수비대로 봤다. 예컨대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자는 이발사에게 면도를 받는다’ 이때 이발사는 누가 면도해주냐는 역설에서 이발사의 계급을 나눌 경우 이 명제는 증명할 수 있게 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전문적으로 논증 다듬는 일을 맡겼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진리의 본성에 관해 러셀이 암묵적으로 품어온 가장 기초적인 전제에 의문을 품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실재의 부분 각각이 기호로 대체, 기호들이 그것들 간의 실제 관계에 맞게 재결합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관계는 언어에 의해 매개된다고 봤다.

 비트겐슈타인: 논리학은 언어의 형식, 철골 구조가 건물 속에 들어 있듯이 논리학은 언어 속에 있다. 그러나 철골 구조 속에서 살 수는 없다. 러셀이 논리학의 토대를 창조하려다 실패한 원인은 논리학의 본성 자체에 있다. 논리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논리학을 보여주는 것만 가능하다.

 러셀: 내일 눈이 오거나 아니면 오지 않는다는 진술은 공허한 형식이지만 완벽한 진리이다.

 비트겐슈타인: 하지만 내일의 날씨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진리이다.

 이 둘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러셀은 지난 20년간 항진명제를 생산하는 기계<논리철학논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비지땀을 흘린 것이었다. 더군다나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을 전부 다 알아도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며 세계를 이해하려면 세계 밖으로 한 걸음 나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성은 여전히 옛날과 똑같이 격정으로 가득 찬 달걀이고 그 달걀에서 여전히 옛날과 똑같은 오믈렛이 만들어진다.’ 러셀은 세상 밖으로 나가 인간성을 개조하려고 교육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런 즈음 괴델은 러셀의 저작 ‘수학의 원리’에서 가장 기초적인 전제를 명확하게 진술한 문장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한다. 모든 참인 논리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고 모든 거짓 논리 명제가 거짓임을 증명한다.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그 전제이지만 증명할 수는 없었다. 러셀은 노력의 중심에 공허가 있음을 깨닫는다. 러셀은 감정과 애매함이 두려워 논리학에 끌렸는지도 몰랐다. 러셀이 증명하려고 했던 최초의 전제, 즉 수학의 토대를 찾는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물론 러셀이 추상 언어로 수학을 절대적인 확실성 위에 세우려고 노력한 과정에서 나온 강력한 방법들은 수학에서 유효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핵심은 증명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결론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있다는 것. 괴델로 인해 ‘증명할 수 없는 것도 있다’란 결론에 도달한 논리학은 컴퓨터의 개발로 ‘어디까지 증명할 수 있나’란 과제 앞에 놓였다.

 여기까지가 내가 메모하고 정리하면서 책을 읽은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 책 정말 재미있다’란 감상을 별로 안 좋아한다. 하나마나한 감상을 굳이 글로 쓰고 사람들에게 보일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로지코믹스’를 다 읽고 나서 단박에 든 생각은 역시 ‘이 책 정말 재미있다’였다. 어렸을 때 이 책을 접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거란 낯뜨겁고 뻔한 감상도 생각났다.

 러셀의 강연을 시작으로 책을 구상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 그리스 비극에서 이야기가 배울 점, 러셀이 ‘토대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 등은 독자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 이야기들은 유기체처럼 연관되어 있다. 복잡한 구조가 혼란스럽다기보다는 이야기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돋보일 수 있게 했다. 각각의 발언은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사안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이런 효과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곧 토대를 찾아서 떠났지만 결국 토대를 찾을 수 없었던 이 책의 여정과도 닮았다.

 ‘왜’라는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도 좋았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단편적인 이론만 훑는게 아니라 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 어떤 식으로 해결하려 했는지 진득하게 따라가면서 나 역시 그들과 같은 고민을 했다. 본격 철학책은 너무 어려워 철학의 엑기스를 뽑았다는 요약서나 연대기적 주요 사상을 소개한 책들을 읽으며 철학적 사고를 해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진작 로지 코믹스를 읽었어야 했다. 이 책은 어렵기로 유명한 책들의 해설서라도 읽고 생각의 흐름을 잡고 싶게 만드니까. 여전히 나의 책 읽기는 해설서를 읽고 원작을 이해하려고 낑낑대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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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07: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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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09: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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