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 다니고 있다. 숨쉬기와 발차기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숨쉬기를 잘하면 발차기가 안 되고, 발차기에 공을 들이면 숨이 모자라 가라앉기 일쑤다. 딱 이 정도의 프로세스로 수영장을 다니고 수영을 한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물을 틀어놓고 다니거나 대여섯개씩 구비하고 다니는 세제로 여러 번 몸을 닦아내는걸 보는건 좀 그렇다. 나라고 별 수 있는게 아니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한 눈의 장난질, 맘의 요동질로 수영장에 수영이 아닌 수양하러 오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나를 포함해 늙고 남루한 몸들로 가득했던 수영장에 얼마 전부터 젊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윤기 있는 생머리를 정성껏 손질하고 얼굴에 화장품을 꼼꼼히 바른다. 홀쭉한 배와 풍만한 가슴, 탄력 있는 몸매에 자신 있는 걸음걸이까지. 나는 끝이 갈라진 머리카락을 도끼빗으로 빗다가 힐끔힐끔 그녀들을 쳐다본다. 누군가의 시선을 많이 받아본 무심한 표정이다. 그녀들은 날씬함이 돋보이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깔깔대며 여자 탈의실을 나갔다. 남겨진 공간에 떠도는 정체모를 우울감과 순식간에 왜소해진 자아들(혹은 내 자아만)의 한숨 소리.

이럴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정신 건강법'

- 나는 괜찮다. 나는 외모 꾸미는걸 귀찮아하고, 흥미를 못느낀다. (기본적인 외모 자신감과는 별개로)
- 저 아이들은 내가 느끼는걸(주로 변두리 감성) 못느껴볼거야.
- 나는 내 몸을 사랑한다, 내 몸을 좋아한다. (어쩌면 가끔)

 하지만 극복되지 않았다. 외면하려해도 그 아이들의 젊음은 그 자체로 환하게 빛났다. 내 몸뚱이가 초라해지는 느낌은 나 자신이 멍청하다는 느낌보다 더 교묘하게 사람 기를 꺾어놓는다. 왜 나는 이런 느낌을 못견뎌할까. 왜 나는 젊은 사람들의 스타일에 매료될까. 젊음 자체보다 젊음에 깃들인 자유와 무모함이 부러운걸까. 그저 이건 낯선 상대를 대할 때 느끼는 역시 낯선 감정인걸까.

 예쁘고 젊은 애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에서 외모도 경쟁력이란 소리를 듣고 식겁했던가, 역시 그 영화의 불안한 감정이 담긴 대사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읊는 예쁜 애들에게 실소했던가. 아니면 역시 별 수 없다는 생각에 자포자기 했던가. 나의 많은 장점은 속성상 즉시 발견되지 않으니 이토록 몰아치는 좌절감은 금물이라고 헛물을 켰을까. 아니면 예쁘거나 젊은 사람들이 주위에 드물어 처음엔 신선했지만 자주 보니 식상하다고 느꼈던가. 어쨌든 지금은 낯선 감정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괜찮다. 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의 젊음과 예쁨 앞에서 내가 속절없이 무너질거란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건 젊음과 미모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잘 쓴 글에, 잘 다듬은 생각에, 거친 개성에, 감탄하고야마는 센스에도 내가 약하다는걸 나는 잘 안다. 

 항상 자신이 찍힌 사진을 맘에 들어하지 않던 사진작가가 있었다.(메모해놓은게 아니라 구체적인 부분은 좀 다를 수 있다) 그는 사무엘 베게트를 닮고 싶었지만 자신의 생김새는 베게트와 너무 달랐다. 그의 눈에는 자신이 찍힌 사진의 부족한 면만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사진을 보고 어떤 학생이 말한다.

- 오, 당신이 찍힌 사진 말예요. 그 사진 속 당신은 사무엘 베게트를 닮았어요.

 
 그런 순간이 올지는 모르겠다. 누군가를 닮고 싶다가도 하루에 수십번씩 맘이 바뀌니 말이다. 강렬하게 뭔가를 원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뤄진다는데 나는 긍정의 힘도(난 홍철씨가 아니에요), 강렬한 뭔가도 없다. 사실 그런 믿음 자체에 의심을 품고 있다. 그런 말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했다고 퉁치는 말장난 같다. 낯선 감정이 돋아나는 순간엔 내가 초라하거나 유난히 뿌듯하겠지만 그 생각이 오래가진 않을 것 같다. 나는 생긴대로 살아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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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5-0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 수영을 배우고 있군요! 멋져요. 완전 에스라인 되서 컴백하는거 아녜요? ㅎㅎ
있지, 아치랑 수영은 어쩐지 잘 어울려요.

나는 최근에 아주 강렬하게 원하는 뭔가가 있어요. 아니, 최근이라고 하면 기간이 좀 애매모호하지만, 어쨌든 있어요. 그래서 아치처럼 결과가 좋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했다고 퉁치는 말장난, 같다는 생각을 안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쨋든 강하게 원하면 이루어질거라고 속으로 내내 생각해요. 이것보다 어떻게 더 강렬하게 원하지? 라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어떻게든, 혹시라도 제가 원하는 이것이 이루어지면, 그때 사람들에게 말하게 될 거에요. 난 정말 이걸 아주 강하게 원했거든요, 그랬더니 이렇게 됐어요. 하고. 아마 그때는 울지도 모르겠어요, 그치요?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이걸 원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나도 가끔은 거울에 발가벗은 몸을 비춰보면서 나는 내 몸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그 순간을 제외한 다른 순간들에는 사실 나는 내 몸을 좋아하지 않아요. ㅜㅡ


아치, 나는요,
내가 더 많은 걸 가졌더라면, 더 좋은 환경과, 더 좋은 유년시절과, 더 좋은 부모를 가졌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요, 내가 많은 걸 가졌다면, 많은걸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몰랐을 거에요. 이해심이 지금보다 더 부족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런것들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는 것이 최상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내가 하는 말이 무슨말인지 이해가 되려나요? 나는 아치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아치가 지금 가진 것, 그게 아치의 최상인것 같아요.

Arch 2011-05-01 17:00   좋아요 0 | URL
다락방은 내가 뭐 한다고 하면 자기 일처럼 좋아해주는군요. 이 맛에 페이퍼를 올린다니까^^
S라인은 모르겠고, 그냥 배영을 얼른 배워 물 위를 떠다니고 싶어요.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지금 나는 최선이란 생각. 어제 팀장님이랑 이야기가 잘 돼서 무지 기뻤는데 오늘은 그분이 웃으면서 아치를 어쩜 좋냐고 해서 여전히 나는 날 잘 모르겠어서 다시 의기소침해졌어요. 기쁨의 질량은 늘 비슷하게 유지되는 것 같아요. 그건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겠죠.

늘 그렇지만 페이퍼보다 좋은 댓글 고마워요. 그리고 다락방이 바라는 그거, 꼭 이루길 바랄게요. 그래서 이룬 즉시 당장 페이퍼에 올려서 모든 알라디너가 축하해줬음 좋겠어요.

미잘에겐 내가 소문내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