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좀체로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아이들이 내 말을 들어야할 이유는 없다. 사실과 당위는 늘 엉킨다.

 민은 밤새 온몸을 긁었는지 아침부터 짜증을 내고 옥찌는 알레르기 때문에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뭔가 마뜩치 않다. 누구의 책임도 아닌 일로 힘들다고 느낄 때면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불현듯 어딘가로 튕겨져 나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란다.

 옥찌들에게 연고를 발라주고, 밥을 차려주고 신문을 읽었다. 같이 밥을 먹다가 늦장 피우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낼까 싶어 되도록 아침을 같이 먹지 않는다. 옥찌는 A가 와서 같이 학교에 가고, 민은 한약이랑 방울 토마토를 먹으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내 주위를 맴돌았다.

 아이들을 다 보내고 홍차를 먹는다. 조금 있으면 옥찌가 오겠지만 그 전까지는 자유시간이다.

 책상에 앉아 그림자극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덧댈 일이 있어 테이프를 잘랐다. 오랫동안 쓰던 내 가위가 아니라 옥찌 가위로. 삐뚤빼뚤 글씨로 옥찌 이름이 씌여진 가위. 가위는 예전 것보다 잘 들고, 테이프가 가위날에 달라붙지 않았다. 사각 사각 소리까지 내면서 아주 잘 잘린다. 옥찌가 내 방에 있던 가위를 잃어버리고 선뜻 자기걸 같이 쓰자고 하지 않았다면 소리마저 경쾌한 이 가위를 써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민은 방울 토마토를 먹으며 말했다.
- 이모는 하는 일이 참 많아. 신문지도 보고, 책도 읽고, 텔레비전도 보고, 컴퓨터도 하고. (헥헥) 우리 책도 읽어주고, 우리랑 도서관도 같이 가고. (그렇네) 알고 있었어?
- 이모, 방울 토마토를 눈사람 같이 먹을 수 있어? (방울 토마토 두 개를 나란히 붙여서 입에 쏙 넣더니) 이렇게 먹는거야.

 한방향으로만 흐르는건 없다. 한방향으로만 흐르고 있다고, 억울해 죽겠다고 징징대는 맘만 있을 뿐. 그래서 오늘 아침은 좀 미안했다. 내 맘이 도깨비 방망이 얻으려고 욕심 부리다 혹을 하나 더 붙이고 온 영감 심보를 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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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4-20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그럴때 있잖아요, Arch 님. 알아주는 것 만으로도 충분할 때. 물론 상대가 알아주길 바랐던 건 아니지만, 알아준다는 걸 알고나니 이걸로 충분해, 싶어질 때 말예요.

이모는 하는 일이 참 많아, 라고 민이 말하는 순간, 바로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나요? 음 나였다면(Arch님은 내가 아니지만) 바로 저런 말을 듣는 순간에 그 기분을 느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 따뜻해지고 말이지요.

주말에 외할머니 생신이라 외갓쪽 친척들이 저희집에 다들 모였었거든요. 삼촌의 아이는 이제 네살(다섯살?)인데, 지난번에 제가 제 침대에 올라오라고 해서 [백만번 산 고양이]를 읽어준 적이 있어요. 그 후에 와서도 또 읽어달라길래 읽어주었고요. 물론 책의 내용을 듣기 보다는 이 고양이는 누구네 고양이냐를 묻느라 더 바쁘긴 했지만. 그래서 저는 그때 집에 가는 그 아이에게 그 책을 주었거든요.

이번 주말에 왔을 때 저는 제 방에 콕 처박혀 책을 읽고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더라구요. 제가 "책 읽어줄까?"했더니 씨익 웃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로 올라오더라구요. 아이들은 잊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떤 좋았던 경험에 대해서는요.

민이에게도 Arch님의 일상 모습들이 차곡차곡 쌓일것 같아요.

Arch 2010-04-28 09:17   좋아요 0 | URL
페이퍼보다 댓글이 좋다는 말은 너무 식상하니까 이제 안 할래요.
다락방님 조카들은 누구 고양이인지를 궁금해하는군요. 귀여운 녀석들. 아이들은 뻔하지 않아서 좋은데 가끔은 뻔하지 않아서 서운할 때도 있어요.
음... 나를 들여다보는 눈을 갖고 싶단 이유로 연애를 한적이 있어요. 이젠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웽스북스 2010-05-0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눈사람 모양의 방울 토마토를 먹어야겠어요. ㅎㅎㅎ

Arch 2010-05-06 16:21   좋아요 0 | URL
히히 ^^
 

 옥찌는 방과 후 활동으로 미술을 한다. 시간이 안 맞을 것 같아 신청 안 한걸 자기가 직접 신청해서 학교 끝나고 그림을 그리고 온다. 옥찌가 방과 후 활동이 끝나서 집에 오는 시간은 대략 2시나 3시쯤이다. 옥찌는 단짝 친구인 A가 피아노 학원을 마칠 때까지 집에서 나랑 같이 숙제를 하거나 독서 일기를 쓴다. A가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오면 둘이 방정맞은 참새들마냥 지지배배거리며 방마다 들쑤시고 다닌다.
 
 오늘은 해가 좋아 속성으로 집 청소를 하려고 했다. 무조건 30분 안에 끝내는 속성 집 청소는 엄마에 의하면 그렇게 할거면 아예 하지 말라는 핀잔을 듣긴 하지만 나로선 적어도 발 디딜 틈은 있다는 점에서 안하는 것보다 낫다고 자부하는 청소법이다. 이불을 걷어서 털고, 청소기를 돌리고, 방바닥을 닦는다. 쓰레기통은 잽싸게 비우고, 재활용은 미친 듯한 속도로 분리한다. 대체 다 하고 남은 시간에 뭘 하려고 그렇게 서두르냐고 묻는다면, Nothing이랄 밖에. 판에 박힌 청소에 기념비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썰렁한 농담보다는 깨끗함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취향이 반영된게 다이기 때문이다. 혹은 누가 어떤 취향을 갖고 있든 반복적인 집안일을 하게 됨으로써 둔해지는 감각을 여실히 보여주는게 다일지도.
 
 옥찌에게 걸레를 빨아줄테니 선반 위를 닦으라고 해놓고 이불을 털었다. 옥찌는 걸레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진공 청소기를 끌고 오더니 자기가 해보면 안 되겠냐고, 포장된 선물 만지듯 청소기를 만지작거렸다. 두 번 일하는건 싫었지만 청소를 통해 아이의 적성과 흥미를 찾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사용법을 알려줬다. 본건 있어서 구석 구석 청소기를 밀고 다니는 폼이 꽤 익숙해보인다.
 
 옥찌는 청소기를 가지고 청소를 하고 나는 말라비틀어진 걸레를 빠는데 누군가 자꾸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웅거리는 청소기를 끌고 다니며 옥찌가 뭐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옥찌는 혼잣말을 하면서 흥얼거리고, 누군가에게 잔소리도 했다. 빙의된게 아닐까 살짝 걱정되다 애늙은이 같은 모습에 슬몃 웃음이 났다.
 
 초등학교 1학년이면 영어 과외도 받아야하고, 특기를 살릴 수 있는 학원 정도는 다녀야한다는데 이래도 될까 싶은 걱정이 없는건 아니다. 다른 애들 열심히 공부할 때 청소기 돌리다 혼자 뒤떨어지는건 아닐까란 핀트 안 맞는 생각도 해본다. 주위에 열혈 엄마가 없어서 그렇지 내가 좀 팔랑귀라 단순 공부 기계가 아니라 자아 성취를 위한 사교육 뭐 이런걸로 꼬여내면 안 넘어갈 자신도 없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청소기 돌리는 옥찌에 만족하기로 했다.

 귀찮은게 가장 큰 이유고, 자기가 맘에 들고 꽂히면 뭔가 할텐데 굳이 설레발 쳐가며 정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생활에 불편함 없을 정도의 괜찮은 습관 몇 개와 자기 일쯤은 거뜬히 할 수 있는 (이게 더 과한걸까) 배경만 만들어주고 싶다. 물론 자신이 한 일에는 알아서 책임지는 것도.

 A가 학원에서 돌아와 옥찌랑 오렌지배 독서 일기 빨리 쓰기 내기를 했다. 조금 후에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민도 합류해 셋 사이에는 미묘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일테면 민으로선 누나는 자기랑만 놀아야되는데 A에게 누나를 빼앗겼단 생각이 있고, A로선 쪼끄만한게 까불지만 자기 나와바리가 아닌 이상 세게 나갈 수 없어 눈치를 보는 것이다. 옥찌야 둘의 긴장관계를 즐긴달까. 물론 이건 순전히 말 만들기 좋아하는 내 추측일 뿐이다.

 아이들은 겨울 모자랑 장갑으로 잡기와 돌리기 놀이를 하며 싸우고 화해하며 거실을 한바탕 뒤집어놓았다. 어제는 블루마블 게임을 하다가 똥침하기, 안아주기, 뽀뽀하기, 엉덩이로 이름 오십 번 쓰기 등등의 벌칙을 정하기도 했다. 작은방으로 아이들을 보내놓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자기 주도적 학습이니 영어는 몇 살 때부터 습관을 들여라 등등의 말이 휙휙 머릿속을 스친다. 스치는건 스치는거고, 조용한 저쪽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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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릿크래프트씨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사무용 건물을 짓는 공사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건물은 아직 골격만 있었다. 그때 빔인가 뭔가 하는 게 10층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서 플릿크래프트 앞의 보도를 박살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플릿크래프트에게 직접 닿지는 않았다. 깨진 보도 조각이 튀어 올라 뺨을 강타했을 뿐이었다. 플릿크래프트는 당연히 머리가 쭈뼛 섰지만, 경악했다기보다는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 인생의 어두운 문을 열고 그 안을 보여 준 것 같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플릿크래프트는 훌륭한 시민이자 좋은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던건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주변 환경에 맞추어 사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주변 사람들도 그와 같았다. 그가 아는 인생은 공평하고 정연하고 이성적이고 책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철제 빔의 추락은 인생을 본래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훌륭한 시민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도 사무실에서 식당에 가다가 떨어지는 빔에 맞아 즉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죽음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찾아오며, 사람은 눈먼 운명이 허락하는 동안만 목숨을 부지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런 운명의 불공평함이 아니었다. 최초의 충격이 지난 뒤 그 점은 받아들였다. 그를 괴롭힌 것은 그가 영위해 온 정연한 일상이라는 게 인생의 본래의 길이 아니라 인생을 벗어난 길이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철제 빔이 추락한 장소에서 5미터도 가기 전에 이 새로운 발견에 따라 자기 인생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다시 평화를 되찾지 못하리란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마쳤을 때 변화의 방법을 찾았다. 인생은 난데없는 빔의 추락으로 그 자리에서 끝날 수도 있으니 그 자신도 난데없이 살던 곳을 떠나서 인생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그도 남들만큼 가족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정도 재산을 남겨 주고 떠나면 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걸 알았고, 그의 가족애는 결별을 못 견딜 만큼 남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날 오후 그는 시애틀에 갔다. 거기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는 두 해 동안 정처 없이 떠돌다가 다시 북서부를 흘러든 뒤 스포케인에 정착해서 결혼을 했다. 두 번째 부인의 외모는 첫 부인과 달랐지만, 두 사람은 차이점보다는 같은 점이 더 많았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결국 타코마에 두고 떠난 것과 똑같은 생활로 빠져 들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사람은 철제 빔 사건 때문에 인생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빔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빔이 떨어지지 않는 생활에 인생을 맞춘 것이다.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에서 김경은 이 이야기의 첫 부분을 읽고 인생의 의외성에 눈을 떴다고 했다. 그 뒤로 계속 몰타의 매를 읽고 싶었다. 추리소설이다. 게다가 반절이 넘었는데도 스페이드란 작자의 대범함만 기술될 뿐 사건의 전말이며 몰타의 매가 의미하는바에 대해 하나도 알려주지 않는다. 눈동자의 색과 표정으로 사람의 심리 상태를 여지없이 보여준다는 서술 역시 뭔가 마뜩치 않다. 그렇지만 주소를 잘못 기재한 우편물처럼 삽입된 이 부분은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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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짜인 내가 봐도 답답한 배우가 있다. A는 배우로서의 재능까진 모르겠고 연기가 안 될 때면 웃음으로 때우고 말도 안 되는 변명하기에 급급한 사람이었다. A는 평소에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혹은 설명하는걸 어려워해서 아예 말을 안 하는지도. 오늘도 감정이며 상황을 다 날려버리고 대사하기에 급급한 그를 보자니 내가 한 발 연기는 생각도 안 하고 답답해만 하고 있었다. 연출님도 그랬는지 다른 때보다 코멘트가 길어졌다.

 모든게 변하지 않고 딱 하나만 바뀌는건 드물어. 네 경우는 옆구리에 주먹이 들어오면 그곳만 움찔하고 말아. 하지만 옆구리를 때리면 온몸이 아프고 머리가 띵하고 감정까지 동요하잖아. 너는 하나만 바꿔서 쉽게 가려고 하고 있어. 변화된 뒤 상황이 괜찮지만 뭔가 어색할 경우, 별 영향을 안 주는 것으로 바꿀 수도 있어. 하지만 상황에 영향을 주는 경우라면 바꿔야해. 이것은 기본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려는 근성, 영향을 안 받고 그것만 해버리는 문제야. 아무리 작은 것이 와도 영향을 받고 온 몸이 영향 때문에 움직이고 흔들려야 좋은 배우야. 그렇지만 넌 안 움직이고 경직되어 있어. 배우로서 자세가 전혀 안 돼 있어. 극복하기보다는 피해가려 하고 노력하지 않아. 그러니 맨날 연습 해봐야 이 모양이다. 뭐가 오면 제대로 된 영향을 받아야해. 영향을 자기 나름대로 엉뚱하게 표출하거나 변형시키지 말고. 대표적인게 그냥 웃는 것이다. 받은 영향을 웃음으로 변형시킨다. 민망하거나 쑥쓰러우면 웃지 말고 그대로 표현해봐라.

 내가 모호하게 느낀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는게 연출가의 능력일까. A가 왜 그러는지 아무도 몰랐다. 열정이 없는건지, 노력하기 싫은건지,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줄 모르는건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단순하게 덮어놓고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하는건 달콤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아무도 A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혹은 상처가 되는 말은 쏙 빼놓고 빙돌아 얘기를 했는지도.

 연습 몇 주가 지났지만 A는 번번히 혼나고 있다. 감정 상태에 있지 못한다고, 간신히 들어선 상태를 벗어나려고 한다고, 눈치 본다고, 자기 습관 나온다고. 혼나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A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A랑 포스터 수정 작업을 하면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지만 성폭행 유발론에 대해 피상적인 얘기만 하고 말았다. 연습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코너에 몰린 한 사람에게 책임을 뭍긴 쉽지만 ‘그래서 어쩌라고’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혼나고 매번 우울하게 연기를 하던 A가 상황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헤어진 사람 얘기를 한 후 아무 대사 없이 가만히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그제서야 난 아주 강하게 연기를 하고 싶어졌다. 나를 바꾼다거나 아는게 아니라 내가 어떤 상태에 있을 때 어떤식으로 생각을 하고, 어떻게 날 보호하려드는지가 미치도록 궁금했다. 연기를 함으로써 나를 지켜보는 사람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딱 한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반짝이던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결국 연출님은 손을 떼고 배우와 공연 일정은 변경됐다. A는 한시름 놨다는 표정이었다. '나라면'에 고착된 갈망은 연기 외의 잡무에 자리를 비워줘야했다. 난 요즘 풀뿌리니, 나를 표현한다란 듣기에 좋은 말들을 직접 해보는건 상상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조금씩 깨닫고 있다. 비겁해지긴 쉽지만 후회 안 할지는 자신할 수 없어 여전히 나 역시 지지부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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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4-20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연도 얼마 안남았는데, 걱정이 많겠어요.
아, 미뤄진건가요?

무슨 페이퍼를 이렇게나 쟁여놨어요 ㅋㅋㅋㅋㅋ

'연기를 함으로써 나를 지켜보는 사람의 상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 아, 난 아치의 연기에 내 상태가 변했던 적 있어요. 그 자존심 상하고 무섭고 울분에 겨웠던 순간말이죠. 무척 울컥했다고요.
하지만 이런 상황(나를 지켜보는 사람의 상태가 변화하는)은 꼭 연기할 때가 아니더라도 찾아오잖아요. 사실 많죠. 이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고, 좀 더 객관적으로 그 상황 속의 나와 상대방을 볼 수 있다면 나중에 연기를 할 때 많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나의 직접적인 상황에 몰입하지 못한다는 부작용도 있겠지만..

뭐, 관객의 입장에서 한 번 적어봤어요. ㅎㅎ

다락방 2010-04-20 13:15   좋아요 0 | URL
추천을 한번 더 할 수 있다면 이 댓글에 기꺼이 바치겠어요.

Arch 2010-04-28 09:20   좋아요 0 | URL
저도 다락방님 얘기에 동감.

뽀님, 그건 인물보다는 그냥 제 감정대로 연기를 한거라서, 전 연기보단 생활 연극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고 그래요.
 

  살림을 한다. 비자발적 실업자가 돼서 집안일을 하고 있다. 내키지는 않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취업을 안 하는건 아니, 못하는건 이력서를 쓰기 싫어서이기도 하고, 돈을 벌지 않아도 근근히 살 수 있어서이기도 하다. 용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소린 빼먹는다. 내가 돈을 벌지 않는다면 다른 가족이 내 몫을 부담하는건 알지만 그래서 다 늙은 부모에게 얹혀 사는 꼴이 된다는 것도 알지만 아는 것과 비겁하지 않을 수 있는게 매번 일치하는건 아니다.  
  오늘도 눈 뜨자마자 부산을 떨고 있다. 보라고, 이렇게 정신 없이 집안일을 한다고. 과시하듯, 잉여를 전시한다.  

  부산떨기는 잔소리에서도 나온다. 나는 눈 뜨자마자 끊임없이 가족들에게 잔소리를 한다. 불을 꺼라, 물을 아껴라, 쓰레기를 만들지 마라, 정리를 해라.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면 무심히 넘겼을 정리되지 않은 집안 곳곳의 물건들을 죄다 제자리에 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진이 빠지는 일이다. 진이 빠지는줄도 모르고 계속 잔소리를 한다.  

 어제는 밤에 습진으로 계속 온몸을 벅벅 긁는 민을 데려다 약을 발라줬다. 긁지 말라고 민을 위협을 하고, 때리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옷을 벗기고 약을 바르는데 진물이 나오는 몸에서 피가 배어나오는게 보였다.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난 정말 그동안 뭘 한걸까. 아무 말도 없이 약을 바르자 다른 때 같으면 칭얼대고 짜증을 냈을 민도 조용했다. 가족들이랑도 이렇게 적당한 거리에서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약이라면 몇천번이라도 바를 수 있으니 이렇게 악쓰고 잔소리 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볼 수 있다면.

 정선희씨가 텔레비전 프로에 나오는걸 봤다. 라디오를 표방한 프로였는데 그녀는 버블 시스터즈의 '붉은 노을'을 자신이 가장 빛나는 순간에 즐겨 들었단 얘기를 했다. 저렴한 나는 이 방송이 언제쯤 나왔던건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빛나던 순간을 얘기할 때만큼 빛나는 얼굴을 언제 봤더라. 다음 선곡으로 힘들었을 때 들었던 노래가 나오고나서야,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어 훌쩍이고 말았다. 

 그녀가 말했다. 진실이란건 아주 커다란 돌덩이라 그것을 다 파헤치려면 아주 애를 써야한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건 돌덩이를 안고서 침묵하는거라고. 그건 그 진실에 대한 예의일 수 있다고.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상처를 가지고 자기 연민에만 빠져있지 않게 되었다고. 그제서야 나는 좀 더 말없이 지내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으면 모든게 좀 더 분명해지고 확실할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보다 빨리 나이를 먹기에 바빴다. 늘 성급함이 문제였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한게 아니어도 좋다. 이제는 진득하게 붙어서 때때로 우습지만 늘 한결같은 목젖씨처럼 오래가는 내 것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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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4-15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오랜만에 등장하는 목젖씨!!!!!!!
2. 나이 먹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중이시구료.
3. 습진 ㅠㅠ 진짜 동병상련 ㅠㅠ 저도 애기때부터 지금까지 고생이지요. 요즘같이 건조할 때 피나는 건 기본. <-빈혈걸릴 지경. 막이래 ㅎㅎ 그래서 앞으로 집안일은 못할 예정이에요..고무장갑 껴도 설거지 한번 하면 확 오릅니다..

민아, 힘내자 우리 ㅠㅠ
4. 말 없이 지내는 것도 타고난 성정에 어긋나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어요.


Arch 2010-04-16 11:24   좋아요 0 | URL
1. ^^
2. 그냥 드문드문이죠. 쭉은 엄두를 못내고.
3. 빈혈? 그래서 요새 민이 가끔 정신을 놓나. 민에게 뽀란 사람이 있다고 얘기해줘야겠어요.
4. 명심하겠어요. 그런데 잔소리는 좀 줄여야겠어요. 내가 피곤해서 원.

gimssim 2010-04-16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먹는 거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 여기도 있어요!
근대 '공인'이면 침묵에 대한 예의에 대해선 다른 시각으로도 접근을 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군요.

Arch 2010-04-16 11:26   좋아요 0 | URL
다들 생각하나봐요. 전 워낙 얕고 별게 없어서.
중전님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전 연예인이 공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개인의 사생활을 굳이 들춰내는게 '알 권리'라고까지 생각지도 않구요. 그런면에서 연애 프로는 좀 집요하고 위악스런 면이 있어요.

다락방 2010-04-1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에게 뽀란 사람이 있다고 얘기해줘야 겠어요.

이 말 무척 좋아요. 나란 사람이 있다는 걸,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얘기해준다니. 이야기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잖아요. Arch 님은 멋진 이모에요.

Arch 2010-04-20 10:41   좋아요 0 | URL
아, 우리 집에서 단 몇분만 내 꼬라지를 본다면 아마 그런말 못할거에요. 아주 흉흉한 이모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