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좀체로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아이들이 내 말을 들어야할 이유는 없다. 사실과 당위는 늘 엉킨다.

 민은 밤새 온몸을 긁었는지 아침부터 짜증을 내고 옥찌는 알레르기 때문에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뭔가 마뜩치 않다. 누구의 책임도 아닌 일로 힘들다고 느낄 때면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불현듯 어딘가로 튕겨져 나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란다.

 옥찌들에게 연고를 발라주고, 밥을 차려주고 신문을 읽었다. 같이 밥을 먹다가 늦장 피우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낼까 싶어 되도록 아침을 같이 먹지 않는다. 옥찌는 A가 와서 같이 학교에 가고, 민은 한약이랑 방울 토마토를 먹으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내 주위를 맴돌았다.

 아이들을 다 보내고 홍차를 먹는다. 조금 있으면 옥찌가 오겠지만 그 전까지는 자유시간이다.

 책상에 앉아 그림자극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덧댈 일이 있어 테이프를 잘랐다. 오랫동안 쓰던 내 가위가 아니라 옥찌 가위로. 삐뚤빼뚤 글씨로 옥찌 이름이 씌여진 가위. 가위는 예전 것보다 잘 들고, 테이프가 가위날에 달라붙지 않았다. 사각 사각 소리까지 내면서 아주 잘 잘린다. 옥찌가 내 방에 있던 가위를 잃어버리고 선뜻 자기걸 같이 쓰자고 하지 않았다면 소리마저 경쾌한 이 가위를 써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민은 방울 토마토를 먹으며 말했다.
- 이모는 하는 일이 참 많아. 신문지도 보고, 책도 읽고, 텔레비전도 보고, 컴퓨터도 하고. (헥헥) 우리 책도 읽어주고, 우리랑 도서관도 같이 가고. (그렇네) 알고 있었어?
- 이모, 방울 토마토를 눈사람 같이 먹을 수 있어? (방울 토마토 두 개를 나란히 붙여서 입에 쏙 넣더니) 이렇게 먹는거야.

 한방향으로만 흐르는건 없다. 한방향으로만 흐르고 있다고, 억울해 죽겠다고 징징대는 맘만 있을 뿐. 그래서 오늘 아침은 좀 미안했다. 내 맘이 도깨비 방망이 얻으려고 욕심 부리다 혹을 하나 더 붙이고 온 영감 심보를 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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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4-20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그럴때 있잖아요, Arch 님. 알아주는 것 만으로도 충분할 때. 물론 상대가 알아주길 바랐던 건 아니지만, 알아준다는 걸 알고나니 이걸로 충분해, 싶어질 때 말예요.

이모는 하는 일이 참 많아, 라고 민이 말하는 순간, 바로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나요? 음 나였다면(Arch님은 내가 아니지만) 바로 저런 말을 듣는 순간에 그 기분을 느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 따뜻해지고 말이지요.

주말에 외할머니 생신이라 외갓쪽 친척들이 저희집에 다들 모였었거든요. 삼촌의 아이는 이제 네살(다섯살?)인데, 지난번에 제가 제 침대에 올라오라고 해서 [백만번 산 고양이]를 읽어준 적이 있어요. 그 후에 와서도 또 읽어달라길래 읽어주었고요. 물론 책의 내용을 듣기 보다는 이 고양이는 누구네 고양이냐를 묻느라 더 바쁘긴 했지만. 그래서 저는 그때 집에 가는 그 아이에게 그 책을 주었거든요.

이번 주말에 왔을 때 저는 제 방에 콕 처박혀 책을 읽고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더라구요. 제가 "책 읽어줄까?"했더니 씨익 웃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로 올라오더라구요. 아이들은 잊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떤 좋았던 경험에 대해서는요.

민이에게도 Arch님의 일상 모습들이 차곡차곡 쌓일것 같아요.

Arch 2010-04-28 09:17   좋아요 0 | URL
페이퍼보다 댓글이 좋다는 말은 너무 식상하니까 이제 안 할래요.
다락방님 조카들은 누구 고양이인지를 궁금해하는군요. 귀여운 녀석들. 아이들은 뻔하지 않아서 좋은데 가끔은 뻔하지 않아서 서운할 때도 있어요.
음... 나를 들여다보는 눈을 갖고 싶단 이유로 연애를 한적이 있어요. 이젠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웽스북스 2010-05-0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눈사람 모양의 방울 토마토를 먹어야겠어요. ㅎㅎㅎ

Arch 2010-05-06 16:21   좋아요 0 | URL
히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