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을 한다. 비자발적 실업자가 돼서 집안일을 하고 있다. 내키지는 않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취업을 안 하는건 아니, 못하는건 이력서를 쓰기 싫어서이기도 하고, 돈을 벌지 않아도 근근히 살 수 있어서이기도 하다. 용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소린 빼먹는다. 내가 돈을 벌지 않는다면 다른 가족이 내 몫을 부담하는건 알지만 그래서 다 늙은 부모에게 얹혀 사는 꼴이 된다는 것도 알지만 아는 것과 비겁하지 않을 수 있는게 매번 일치하는건 아니다.
오늘도 눈 뜨자마자 부산을 떨고 있다. 보라고, 이렇게 정신 없이 집안일을 한다고. 과시하듯, 잉여를 전시한다.
부산떨기는 잔소리에서도 나온다. 나는 눈 뜨자마자 끊임없이 가족들에게 잔소리를 한다. 불을 꺼라, 물을 아껴라, 쓰레기를 만들지 마라, 정리를 해라.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면 무심히 넘겼을 정리되지 않은 집안 곳곳의 물건들을 죄다 제자리에 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진이 빠지는 일이다. 진이 빠지는줄도 모르고 계속 잔소리를 한다.
어제는 밤에 습진으로 계속 온몸을 벅벅 긁는 민을 데려다 약을 발라줬다. 긁지 말라고 민을 위협을 하고, 때리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옷을 벗기고 약을 바르는데 진물이 나오는 몸에서 피가 배어나오는게 보였다.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난 정말 그동안 뭘 한걸까. 아무 말도 없이 약을 바르자 다른 때 같으면 칭얼대고 짜증을 냈을 민도 조용했다. 가족들이랑도 이렇게 적당한 거리에서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약이라면 몇천번이라도 바를 수 있으니 이렇게 악쓰고 잔소리 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볼 수 있다면.
정선희씨가 텔레비전 프로에 나오는걸 봤다. 라디오를 표방한 프로였는데 그녀는 버블 시스터즈의 '붉은 노을'을 자신이 가장 빛나는 순간에 즐겨 들었단 얘기를 했다. 저렴한 나는 이 방송이 언제쯤 나왔던건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빛나던 순간을 얘기할 때만큼 빛나는 얼굴을 언제 봤더라. 다음 선곡으로 힘들었을 때 들었던 노래가 나오고나서야,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어 훌쩍이고 말았다.
그녀가 말했다. 진실이란건 아주 커다란 돌덩이라 그것을 다 파헤치려면 아주 애를 써야한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건 돌덩이를 안고서 침묵하는거라고. 그건 그 진실에 대한 예의일 수 있다고.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상처를 가지고 자기 연민에만 빠져있지 않게 되었다고. 그제서야 나는 좀 더 말없이 지내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으면 모든게 좀 더 분명해지고 확실할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보다 빨리 나이를 먹기에 바빴다. 늘 성급함이 문제였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한게 아니어도 좋다. 이제는 진득하게 붙어서 때때로 우습지만 늘 한결같은 목젖씨처럼 오래가는 내 것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