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짜인 내가 봐도 답답한 배우가 있다. A는 배우로서의 재능까진 모르겠고 연기가 안 될 때면 웃음으로 때우고 말도 안 되는 변명하기에 급급한 사람이었다. A는 평소에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혹은 설명하는걸 어려워해서 아예 말을 안 하는지도. 오늘도 감정이며 상황을 다 날려버리고 대사하기에 급급한 그를 보자니 내가 한 발 연기는 생각도 안 하고 답답해만 하고 있었다. 연출님도 그랬는지 다른 때보다 코멘트가 길어졌다.

 모든게 변하지 않고 딱 하나만 바뀌는건 드물어. 네 경우는 옆구리에 주먹이 들어오면 그곳만 움찔하고 말아. 하지만 옆구리를 때리면 온몸이 아프고 머리가 띵하고 감정까지 동요하잖아. 너는 하나만 바꿔서 쉽게 가려고 하고 있어. 변화된 뒤 상황이 괜찮지만 뭔가 어색할 경우, 별 영향을 안 주는 것으로 바꿀 수도 있어. 하지만 상황에 영향을 주는 경우라면 바꿔야해. 이것은 기본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려는 근성, 영향을 안 받고 그것만 해버리는 문제야. 아무리 작은 것이 와도 영향을 받고 온 몸이 영향 때문에 움직이고 흔들려야 좋은 배우야. 그렇지만 넌 안 움직이고 경직되어 있어. 배우로서 자세가 전혀 안 돼 있어. 극복하기보다는 피해가려 하고 노력하지 않아. 그러니 맨날 연습 해봐야 이 모양이다. 뭐가 오면 제대로 된 영향을 받아야해. 영향을 자기 나름대로 엉뚱하게 표출하거나 변형시키지 말고. 대표적인게 그냥 웃는 것이다. 받은 영향을 웃음으로 변형시킨다. 민망하거나 쑥쓰러우면 웃지 말고 그대로 표현해봐라.

 내가 모호하게 느낀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는게 연출가의 능력일까. A가 왜 그러는지 아무도 몰랐다. 열정이 없는건지, 노력하기 싫은건지,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줄 모르는건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단순하게 덮어놓고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하는건 달콤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아무도 A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혹은 상처가 되는 말은 쏙 빼놓고 빙돌아 얘기를 했는지도.

 연습 몇 주가 지났지만 A는 번번히 혼나고 있다. 감정 상태에 있지 못한다고, 간신히 들어선 상태를 벗어나려고 한다고, 눈치 본다고, 자기 습관 나온다고. 혼나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A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A랑 포스터 수정 작업을 하면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지만 성폭행 유발론에 대해 피상적인 얘기만 하고 말았다. 연습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코너에 몰린 한 사람에게 책임을 뭍긴 쉽지만 ‘그래서 어쩌라고’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혼나고 매번 우울하게 연기를 하던 A가 상황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헤어진 사람 얘기를 한 후 아무 대사 없이 가만히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그제서야 난 아주 강하게 연기를 하고 싶어졌다. 나를 바꾼다거나 아는게 아니라 내가 어떤 상태에 있을 때 어떤식으로 생각을 하고, 어떻게 날 보호하려드는지가 미치도록 궁금했다. 연기를 함으로써 나를 지켜보는 사람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딱 한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반짝이던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결국 연출님은 손을 떼고 배우와 공연 일정은 변경됐다. A는 한시름 놨다는 표정이었다. '나라면'에 고착된 갈망은 연기 외의 잡무에 자리를 비워줘야했다. 난 요즘 풀뿌리니, 나를 표현한다란 듣기에 좋은 말들을 직접 해보는건 상상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조금씩 깨닫고 있다. 비겁해지긴 쉽지만 후회 안 할지는 자신할 수 없어 여전히 나 역시 지지부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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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4-20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연도 얼마 안남았는데, 걱정이 많겠어요.
아, 미뤄진건가요?

무슨 페이퍼를 이렇게나 쟁여놨어요 ㅋㅋㅋㅋㅋ

'연기를 함으로써 나를 지켜보는 사람의 상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 아, 난 아치의 연기에 내 상태가 변했던 적 있어요. 그 자존심 상하고 무섭고 울분에 겨웠던 순간말이죠. 무척 울컥했다고요.
하지만 이런 상황(나를 지켜보는 사람의 상태가 변화하는)은 꼭 연기할 때가 아니더라도 찾아오잖아요. 사실 많죠. 이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고, 좀 더 객관적으로 그 상황 속의 나와 상대방을 볼 수 있다면 나중에 연기를 할 때 많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나의 직접적인 상황에 몰입하지 못한다는 부작용도 있겠지만..

뭐, 관객의 입장에서 한 번 적어봤어요. ㅎㅎ

다락방 2010-04-20 13:15   좋아요 0 | URL
추천을 한번 더 할 수 있다면 이 댓글에 기꺼이 바치겠어요.

Arch 2010-04-28 09:20   좋아요 0 | URL
저도 다락방님 얘기에 동감.

뽀님, 그건 인물보다는 그냥 제 감정대로 연기를 한거라서, 전 연기보단 생활 연극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