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배가 고파 분식집에 들어갔어. 만두를 먹었는데 세상에, 너무 맛있는거야. 
- 그래서?
- 만두가 이렇게 맛있는건지 예전엔 몰랐지. 그런데 며칠 먹으니까 이게 또 질리더라구. 그때 너무 배가 고파서 맛있었던거구나 싶고.
- 도루묵이란 얘기야? 
- 아니. 분식집 만두가 그렇게 맛있을리는 없다는거지.

 그는 김현진을 모른다. 정치적 성향은 모호하고 오로지 즐겁게 사는걸 인생 목표로 둔 사람이다. 괜찮은 직업을 잡아 적당한 때 결혼을 하고, 아이는 무리하지 않게 딱 둘 정도 낳아서 키우는게 꿈이란, 꿈마저 무채색이라 흥미있는 구석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남자였다. 폴로 셔츠가 잘 어울리고 비 오는 날 살짝 감미롭게 들리는 나른한 목소리의 남자. 그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남자의 설명에 따르면 (은유적인) 분식집에서 만났다는 그녀와는 서로 살짝 건드려 보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쪽도 적극적이지 않았고, 그 역시 아쉬울게 없는 사이. 

 분식집에는 만두만 있는게 아니라는 둥, 분식집이란건 네 안의 방어기제일 뿐 결국 쿨하기 위해 쌩쑈하는거라는 둥의 얘기를 건넸던 것 같다. 그는 분식집이었던 곳은 다른 가게가 되어도 결국 분식집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할거란 아리송한 얘기만 들려줬다. 

 얼마 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둥, 바등거리며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둥, 가끔씩 나와 갔던 가게와 같이 걸었던 길이 생각난다는 둥. 그러니까 그는 수작을 부리는 중이었다.

 그는 가끔씩 분식점에 들를 요량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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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5-06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강력 추천이요. 엄청 쎄게 눌렀어요.

Arch 2010-05-07 10:34   좋아요 0 | URL
왜요, 왜요. 신비주의 댓글이야요? ^^

다락방 2010-05-07 13:33   좋아요 0 | URL
아뇨. 마지막 문장을 읽고 있노라니 어쩐지 불끈, 해버려서.

L.SHIN 2010-05-0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분식집엔 만두만 있는게 아닌게죠. 가끔은 덤으로 '목소리가 나근한 남자'라든가, 또 가끔은
'그 남자의 수작을 귀신같이 눈치채는 영리한 여자'가 덤으로 딸려 나올지도 몰라요.
요즘은 단무지만 줘서는 소비자가 만족을 못 하거든요. ( '') 힛

그러니까, 그 분식집이 어딥니까? (웃음)

Arch 2010-05-07 10:35   좋아요 0 | URL
음.. 제가 글을 잘 못써서 의도가 명확하지 않았나봐요. 그 얘기는 아닌줄 아뢰오 ^^

머큐리 2010-05-07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것아닌 사이도 이렇게 맛깔나게 표현되는 수도 있군요...흠 분식점이라...

Arch 2010-05-19 11:42   좋아요 0 | URL
^^
 

 작년 이맘때쯤이었던가. 친구가 메신저로 쌈싸페에서 믿을 수 없는 그룹이 나왔다는 말을 전했다. 친구가 말하길 그들의 랩은 웅얼거림과 본격 랩을 넘어선 미치도록 열광할만한거였고, 퍼포먼스는 이전의 인디씬에선 볼 수 없었던 파격 자체였다고 했다. 파격, 비일상, 좀 다른 것, 엇나가고 뒤틀린거라면 환장하는 나로선 친구의 뽐뿌질에 흔쾌히 동참, 그들의 음악을 찾아들었다. 아주 진기한 노래, '싸구려 커피'는 이렇게 내게 다가왔다. 물론 노래만큼이나 홀쭉해진 장기하의 시큰둥한 표정이 더 맘에 들었다. 

 이 책은 장기하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을 추구하는 붕가붕가 레코드의 이야기를 담았다.  책은 군데군데 설익은 냄새를 풍기다 중반을 넘어서 속도를 내기 시작하더니 결국 이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란, 기승전결 뚜렷하기보다는 인내하여 끝까지 읽는자에게 복이 있으리란 구성을 보이고 있다. 오해할까 말하는데 마지막에 좀 더 분명히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거지 초반에 책이 재미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어떨까. 지금 나로선 하고 싶은 일이 도대체 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고, 현상유지로도 좀 어려운 처지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의 함정이었다. 지속하는 데 너무 집중하다 보니 자꾸만 모든 궁리가 돈을 벌어 살아남는 것으로 향하게 됐다. 결국 이런 식이라면 일반적인 음악 사업과 다를 게 없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우리가 애초에 하고자 했던 건 그게 아니었잖아.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전통술 만드는걸 배우러 다니고, 글을 계속 쓰고 싶다. 옥찌들이랑도 잘 지내고 싶고, 옥찌들이랑 동생이랑 아빠집을 나와서 살고 싶다. 이 모든 것을 지속하려니 나도 돈 벌 궁리만 하고 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선 돈 벌 궁리, 후 하고 싶은 일이란 프로세스라도 되어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하고 싶은걸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엄살만 피우고 있다는 생각에 잠도 안 온다. 엄살 아니라고 백번 말해도 내가 엄살이라고 느낀다. 하기 싫은 일 하면서 좀 다져질 수 있는데, 지금도 이렇게 열심히 사는게 아니면서 자꾸 하고 싶은 일로 당면한 과제를 회피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루는 것보다는 나아지는 게 우리가 재미를 느끼는 종류의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제 조금씩 나를 알 것 같으니까 다른 내가 되기보다는 지금껏 있는 나를 좀 더 추스려서 살아봐야겠다. 이건 뭐, 고민하느라 지속가능한 즐거운 짓할 시간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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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5-06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게. 지속 가능한, 이라는 말에 저런 함정도 숨어 있었군요. 그건 또 생각 못했네.

가끔 (저는 종교가 있으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모냥으로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일을, 혹은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건 대부분 돈과 연결되지 않는.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과의 삶을 하고 싶은 것, 과는 무관하게 살아가야 하는. (의사, 변호사, 이런 것들이 진짜 '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겠지만요) 그리고, 그건, 어쩌면, 그렇게 그 선택을 어렵게 만듦으로 인해, 정말로 하고 싶은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들이 선택한 삶이 더 빛날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한 건 아닐까, 뭐 이런 생각. 뭐 좀 두서 없고 정리 안됐긴 한데, 뭐 암튼 아치님 글 읽으니 그렇게 생각했던 게 생각났어요. 아치님은 반짝반짝 빛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거니까, 그것만으로도 내겐 대단하고 훌륭하게 느껴져요.

오랜만에 와서는 이런 쓸데없는 소리만 하다 가요. 잘 지내시죠? 지민이도 잘 있죠? ㅎㅎ

Arch 2010-05-06 16:20   좋아요 0 | URL
두서없고 정리 안 되는건 내가 최고니까 그런 말 마셔요. ^^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느껴져요. 웬디양님, 오랜만의 댓글뿐 아니라 '이런 댓글' 달아줘서 고마워요.

네, 민이는 병원도 잘 다니고, 가끔 이모랑 싸우긴 하지만 잘 지내요.

머큐리 2010-05-0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나가고 뒤틀린 것이라면 환장하는 아치님이니까...ㅎㅎ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하지 않을까 기대되요
혹 알게되면 저랑 공유하기에요...^^
 

 인사동에서부터 걸었다. 덕성여대를 지나 삼청동의 시네 코드 선재(행정구역상으로는 소격동)에 들렀다. 장기 상영 중인 '위대한 침묵'을 볼까, 유레루로 인상적인 라스트신을 보여준 니시카와 미와의 신작'우리 의사 선생님'을 볼까. 경계도시2에서 작은 연못까지. 보고 싶은 영화가 많았다. 보고 싶은 영화만 골라서 상영해주는 영화관은 얼마나 오랜만인지. 시간이 맞는걸 찾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상영 후 GV와 타바코쥬스의 콘서트도 한단다. 운이 좋다. 
 
 인디 밴드의 이야기를 만든 다큐멘터리라, 왠지 구린 느낌이 났다. 궁상맞은 얘기가 나올 것 같고, 우리 이렇게 힘들지만 재미있게 잘 지낸단 소리를 철지난 계절상품처럼 우격다짐으로 반복할 것만 같았다. 잘못된 선택일까. 나루토를 보며 '우린 안 될거야.'라고 말한 타바코쥬스 보컬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할까. 

 인천 부평구 모텔촌. 그곳에 루비 살롱이란 까페가 문을 연다. 까페 사장님은 까페만으로는 성이 안 찼는지 루비 살롱이란 레이블을 차린다. 이 영화는 바로 루비 살롱의 소속 멤버인 타바코쥬스와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모텔촌에서 시작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내가 섣부르게 상상했던 내용은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대빵으로 찌질한 남자들(타바코쥬스)과 우주의 혼을 받아 음악을 하는 깜장옷 밴드.(갤럭시 익스프레스) 키치적일까, 정말 찌질한게 다야? 게으른건 알아줘야겠군.(누군!) 영화를 보며 낄낄대다 과연 이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걸까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오랜만에 영화보는 재미를 담뿍 느끼고 말았다. 와이드 스크린에서 뿜여져나오는 로큰롤 열정은 내가 로큰롤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그래, 저게 바로 로큰롤이야'라고 무릎을 칠 정도로 (아, 상투적이야.) 상큼하고 즐거웠다. 굳이 웃기려고 하지 않는데도 계속 키득거리게 만들고, 결국 이 밴드들을 좋아하게 만드는 힘도 이 영화의 아주 큰 장점 중 하나다. 나만 찌질한게 아니었어, 더 찌질한 사람이 있네에서 오는 위로감은 크지 않다. 결국 누군가는 찌질할 수 밖에 없다면 좀 더 재미있고, 엉터리로 찌질해진다면 괜찮겠네란 용기 정도. 이건 좀 위악인가.  

 GV에서 술에 취하지 않은 타바코쥬스의 수줍은 모습은 좀 귀여웠고, 노래 역시 좋았다. 원한다면 좀비떼 동영상을 보여줄 수도 있다.

 아무튼 리뷰를 잘 못쓰는 내가 영화 본지 무려 2주만에 이 영화의 리뷰를 쓰는건 뒷북이나마 입소문을 내기 위해서라는데, 글쎄 효과는 장담 못하겠다. 다만, 반드시 크게까지는 아니어도 좀 웃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길 바란다. 홍대 상상마당에서 절찬리 상영 중이다. 

 추신: 
* 왜 음악했냐는 질문에 '여자 따먹고 싶어서 음악했다'는 부분은 좀 그랬다. 그만큼 솔직하다는건데 솔직한 것과 다른 입장은 * 어떻게 봐야 할까. 결국 적당함의 문제인데.
소리가 뭉개져서 들릴 때가 있다. 
* 현재 갤럭시 익스프레스는 루비살롱과 더 이상 같이 활동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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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0-05-06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월미도다.

Forgettable. 2010-05-06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미돈지 어케 알아요? 나 배경만 뚫어져라 봐도 잘 모르겠구만 ㅋㅋㅋㅋ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치는 기타는 촘 간지. 비록 좀비같더라도 멋지다...

메일 보냈어요 ㅋㅋ

Arch 2010-05-06 16:18   좋아요 0 | URL
난 딱 보니까 알겠더만. 노래보다 뮤직 비디오가 더 타바코쥬스 같아요.
메일 봤어요. USB 갖고 와서 저장해가야지^^
블로그에 포게터블 이름으로 사진 올려야지~

머큐리 2010-05-07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건 몰라도 사운드하고 노래 부르는 친구의 수염은 맘에 드는군요...
얼마전에 뽀님 보니 아치님도 보고 싶던데...자동연상의 법칙인가 봐요.ㅎㅎ

Arch 2010-05-11 09:39   좋아요 0 | URL
그래서 오랜만에 제 서재에 댓글을 남기신거로군요. 틈틈히 뽀님께 부탁 좀 해야겠어요. ^^
영화 보세요. 정말 재미있을거에요.
 


 흑맥주에서 한약 맛이 났다. 거품이 풍부하고 깊고 진한 맛이 나는, 다 마신 후에 감칠맛이 입 안에서 맴돌아 한잔 더 한잔 더 하다가 얼굴이 흑색이 되도록 퍼마시게 되는 흑맥주까지 상상한건 아니었지만 너무했다. 첨가물을 넣었는지 쓰기만한 맥주를 보약 마시듯이 들이켰다. 감자튀김이랑 딸려서 나온 비린내 나는 소시지를 보기 좋게 썰어놨다. - <헝그리 플래닛>과 도축 사진을 다양하게 본 후로 내가 먹는 고기는 짐승으로 보였다. 고기에선 몸의 냄새가 났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케이준 감자튀김은 너무 기름지고 바삭거렸다. 이런 감자튀김을 원한게 맞지만 맥주 때문에 꽁해있는 기분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배는 부르고 취기는 살살 도는데 흥이 나지 않았다. 나를 매개로 만난 친구 녀석들은 무료한 김에 잘됐다 싶었는지 좀 전부터 서로의 호구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알고 있는 사실보다 자신에 대해서 과장하거나 생략했다. 두 녀석의 긴장을 핑계로 버틸 수 있었음 좋으련만 어쩌나. 오늘은 금요일인걸.

 그때 느닷없이 '나이트행 고고씽'이란 글자가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충동적인 나이트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친구들을 은근히 대놓고 떠봤다. 남자앤 자기는 잘 놀 줄 모르고, 나이트도 별로 안 좋아하고, 가면 술만 먹겠다는 오만가지 설명을 한 끝에 오케이를 했다. 여자앤 화장도 안 하고, 꼬라지가 말이 아니니 다음에 날을 잡아서 다른 지역 클럽을 순례하자고 했다. 나중에 보자고 하는 것들 다 필요없다며 대성통곡하길 2초, 여자앤 대신 부킹만 하지 않는다면 글쎄, 어디 한번, 스텝 좀 밟아줄까라며 운을 띄웠다. 어딜 가나 이렇게 꼭 한번씩 튕기는 애들이 있다. 튕기는 애들 다 싫어!

 나이트 전문가 H에 의하면 나이트는 최소 11시 이후에 입장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숙만필>에서 고스톱이 너무 치고 싶어 사람수를 맞추느라 싫어도 싫은척 못하는 사람이 어디 그녀 뿐이겠는가. 친구들이 행여 맘을 바꿀까, 또 다음을 기약하고 앉았을까 염려되어 공식 시간인 11시를 지킬 수가 없었다. 도리어 친구들이 말리는데도 일찍 가서 안주 먹으며 분위기랑 리듬감을 익혀야한다고 설레발을 쳤다.

 나이트 시간대로 치면 초저녁에 나이트에 들어섰다. 약간 뻘줌했다.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손님을 가장한 웨이터들은 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DJ는 무조건 빠른 비트로 노래를 틀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하고 주문을 하자마자 안주와 술이 나왔다. 초스피드다. 웨이터들은 음악 비트에 최적화된 서빙을 하고 있었다.

 무대에 나가서 춤추기도 우습고 앉아있자니 뭐하는가 싶어 셋 다 멍 때리고 있었다. 여자앤 어깨로 리듬을 맞추고, 남자앤 보란 듯이 술을 푸기 시작했다. 언제쯤 나가서 뱃살에 회오리 칠 정도로 흔들어볼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났다.

쭈뼛거림에 그동안 먹었던 술마저 깨려고 했다. 맥주 한잔을 쭉 들이켰다. 그런데 저건 누구지. 어떤 여자분이 DJ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남색 트레이닝복에 짧은 파마 머리. 여자분은 미동도 하지 않은채 DJ와 눈싸움을 하고 있었던거다. 왠지 용기가 생겼다. 아무도 없잖아. 이건 우리 놀라고 벌려놓은 판 아니겠어, 라고 최면을 걸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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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5-12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글 읽고 아침 맞이합니다.~^^ 글이 생글생글합니다.

Arch 2010-05-13 10:36   좋아요 0 | URL
히~ 2편 쓸 기운이 조금 나려고 하는데요. 감사합니다.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꼬마가 있었다. 친구들이 운동화를 자랑할 때 침을 꿀꺽 삼키며 고무신이 얼마나 좋은지 자랑하던 꼬마 말이다. 다 자란 꼬마가 그때의 자신에게 사실은 거짓말이지 않냐고 묻는다. 운동화 없는 게 부끄럽냐고 꼬마를 다그친다. 너 자꾸 그러면 어른 돼서도 거짓말만 한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대한민국 원주민 중>

 어렸을 때 열등감이 많았다. 친구들과 잘 지내는 아이들을 보면 부러웠고, 아무렇지 않게 뭔가를 이루는 애들을 보면 배알이 꼬였다. 예쁜 애는 예쁜 애라서 싫었고, 나보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른 많은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미웠다. 평범하다는 것 자체가 열등감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누군가 부럽고 약이 올라 죽겠으면 악에 바치도록 부러워하고 질투하다 제풀에 꺾이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기 못난 것도 알고, 못난 자기지만 좀 더 사랑할 수 있는 방법도 배울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 있었나.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내가 남보다 못하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부정하는 것 같았는걸. 그래서 딴에 생각해낸 게 내가 부러워하는 것에서 어떻게든 단점을 찾아내는 거였다.
 쟤는 공부를 잘하지만 뚱뚱해. 쟤는 친구랑 잘 지내지만 위선적이야. 나를 홀리게 하지만 가식이 몸에 배었어. 솔직하지만 남에게 상처를 줘. 멋지지만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줘 등등. 생각은 주위 사람에 그치지 않고 여러 갈래로 퍼져나갔다. 연예인을 봐도 예쁜점보다 미운점을 찾고,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좋고 예쁜 것들을 봐도 흠을 찾아냈다. 우물 안 개구리 되는줄 몰랐다.
 그렇다고 부럽지 않은 것에 관대한건 아니었다. 약하고 초라한 것엔 부끄러울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수그러들기보다는 되바라졌다. 되바라져서 크게 한번 깨져봐야는데 그 정도까지 세게 나가지 못했다. 상대가 꿈틀한 후에는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요즘도 그런다. 뭔가가 부럽고 샘이나 죽겠어도 아닌척, 관심 없는척을 한다. 때로는 운이 좋았다거나 환경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애둘러서 딴청을 피운다. 그게 아니란걸 잘 아는데, 그런데도 잘 안 고쳐진다.

 그의 말처럼,
 그런 어른이 돼버렸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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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4-28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상담 받으러 갈래요?
나도 요즘 딱 죽겠어요.
모든게 다 내탓이고 내 잘못인거 같은 그런 미친 마음이 도무지 사라질 생각을 안해요. 고치고 싶은데..


다락방 2010-04-28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아직 어른이 될려면 먼 것 같아요. 괜찮은 어른, 은 제게 너무나 먼 일이에요.

Arch 2010-04-28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무려 두개나 있어서 은근 기대했어요. ㅋㅋ 뭔 기대? ^^

뽀가 전에 말한 할머니한테 같이 가봐요. 난 페이퍼에 또 쓸거지만 이젠 한시름 놨지만 아직은 잘 모르니..
어차피 괜찮은 어른이 될거란 목표가 좀 우스울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좀 불량한, 어긋난, 엉망인, 그럭저럭 어른이 되는건 어때요. 나도 괜찮은 어른 되려다가 현상유지 정도만 하는걸로, 그러다 좀 못하면 못하는대로 좀 엄살도 부리면서 살려구요. 그래도 다락방님은 이런 말 한다고, 그러다 행려병자 된다고 겁주는 남자 친구는 없잖아요. 흑. 댓글이 슬퍼요.

아무튼, 힘내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