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맥주에서 한약 맛이 났다. 거품이 풍부하고 깊고 진한 맛이 나는, 다 마신 후에 감칠맛이 입 안에서 맴돌아 한잔 더 한잔 더 하다가 얼굴이 흑색이 되도록 퍼마시게 되는 흑맥주까지 상상한건 아니었지만 너무했다. 첨가물을 넣었는지 쓰기만한 맥주를 보약 마시듯이 들이켰다. 감자튀김이랑 딸려서 나온 비린내 나는 소시지를 보기 좋게 썰어놨다. - <헝그리 플래닛>과 도축 사진을 다양하게 본 후로 내가 먹는 고기는 짐승으로 보였다. 고기에선 몸의 냄새가 났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케이준 감자튀김은 너무 기름지고 바삭거렸다. 이런 감자튀김을 원한게 맞지만 맥주 때문에 꽁해있는 기분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배는 부르고 취기는 살살 도는데 흥이 나지 않았다. 나를 매개로 만난 친구 녀석들은 무료한 김에 잘됐다 싶었는지 좀 전부터 서로의 호구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알고 있는 사실보다 자신에 대해서 과장하거나 생략했다. 두 녀석의 긴장을 핑계로 버틸 수 있었음 좋으련만 어쩌나. 오늘은 금요일인걸.

 그때 느닷없이 '나이트행 고고씽'이란 글자가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충동적인 나이트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친구들을 은근히 대놓고 떠봤다. 남자앤 자기는 잘 놀 줄 모르고, 나이트도 별로 안 좋아하고, 가면 술만 먹겠다는 오만가지 설명을 한 끝에 오케이를 했다. 여자앤 화장도 안 하고, 꼬라지가 말이 아니니 다음에 날을 잡아서 다른 지역 클럽을 순례하자고 했다. 나중에 보자고 하는 것들 다 필요없다며 대성통곡하길 2초, 여자앤 대신 부킹만 하지 않는다면 글쎄, 어디 한번, 스텝 좀 밟아줄까라며 운을 띄웠다. 어딜 가나 이렇게 꼭 한번씩 튕기는 애들이 있다. 튕기는 애들 다 싫어!

 나이트 전문가 H에 의하면 나이트는 최소 11시 이후에 입장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숙만필>에서 고스톱이 너무 치고 싶어 사람수를 맞추느라 싫어도 싫은척 못하는 사람이 어디 그녀 뿐이겠는가. 친구들이 행여 맘을 바꿀까, 또 다음을 기약하고 앉았을까 염려되어 공식 시간인 11시를 지킬 수가 없었다. 도리어 친구들이 말리는데도 일찍 가서 안주 먹으며 분위기랑 리듬감을 익혀야한다고 설레발을 쳤다.

 나이트 시간대로 치면 초저녁에 나이트에 들어섰다. 약간 뻘줌했다.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손님을 가장한 웨이터들은 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DJ는 무조건 빠른 비트로 노래를 틀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하고 주문을 하자마자 안주와 술이 나왔다. 초스피드다. 웨이터들은 음악 비트에 최적화된 서빙을 하고 있었다.

 무대에 나가서 춤추기도 우습고 앉아있자니 뭐하는가 싶어 셋 다 멍 때리고 있었다. 여자앤 어깨로 리듬을 맞추고, 남자앤 보란 듯이 술을 푸기 시작했다. 언제쯤 나가서 뱃살에 회오리 칠 정도로 흔들어볼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났다.

쭈뼛거림에 그동안 먹었던 술마저 깨려고 했다. 맥주 한잔을 쭉 들이켰다. 그런데 저건 누구지. 어떤 여자분이 DJ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남색 트레이닝복에 짧은 파마 머리. 여자분은 미동도 하지 않은채 DJ와 눈싸움을 하고 있었던거다. 왠지 용기가 생겼다. 아무도 없잖아. 이건 우리 놀라고 벌려놓은 판 아니겠어, 라고 최면을 걸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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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5-12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글 읽고 아침 맞이합니다.~^^ 글이 생글생글합니다.

Arch 2010-05-13 10:36   좋아요 0 | URL
히~ 2편 쓸 기운이 조금 나려고 하는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