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천 마법사가 어떤 데이터를 근거로 내 취향을 골라내는지 모르겠다. 여성학/남성학은 수긍이 가는데 <건강>에 관한건 좀 의아하다. 물론 요새 영양과 대사 능력, 호르몬에 대한 책들을 읽고 있지만 따로 페이퍼나 리뷰를 쓴 것도 아닌데. 내가 쓴 열 손가락에도 안 드는 리뷰 중 하나가 건강에 관련된 책이어서일까. 그렇다면 에세이나 잡문을 추천해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알게 돼서 즐겁다. 물론 당장 사지는 않을테고, 사고 싶어서 안달나진 않겠지만 눈도장 찍어놨으니까 언젠가 읽게 되겠지.

 추천 마법사에서 나랑 비슷한 취향의 서재를 알려주는건 좀 귀엽다. 어렴풋하게 이 사람은 나랑 비슷하단 생각을 했지만 -역시 어떤 근거로 선정한지 분명하지 않다.- 콕 집어서 알려주니까 신선하다.

 마법사야, 앞으론 잡문도 많이 추천해주렴.

* 얼마 전에 읽은 한윤형의 <키보드 워리어>에서 강준만 선생님에 대한 내용을 읽었다.
 한윤형은 진중권이 이문옥 서울 시장 후보에 대한 관점을 강준만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된 논쟁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수십 년간 제도정치권 내에서 빛과 그늘을 모두 맛보았던 김대중과는 달리, 아웃사이더 체질의 노무현을 옹호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논변은 어느 선량하면서 고생을 많이 한 무명 군소후보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강준만)는 민주당이라는 제도권 정당이 지니는 현실성을 무시하는 진중권의 논의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 자신이 그 지점을 정연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과연 그 자신의 생각대로 강준만은 컨텍스트의 남자였다. 그에겐 수많은 데이터를 통해 구축된 감각적인 판단이 있었고, 옳지 않은 것들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진중권이 논리적 일관성을 위해 존재론적 모순을 선택했다면, 강준만은 존재의 일관성이 논리적 비일관성을 설명해 버리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전략을 비교하다보면 일관성이라는 말이 결코 쉽지 않은 어떤 강박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절로 깨닫게 된다.'
 
 강준만 선생님이 민주당, 호남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열린 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강준만 선생님이 욕을 먹고, 결국은 실패한 기획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은 것 정도가 내가 아는 것의 전부. 정말, 정치는 어렵고 역사는 복잡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흔적을 좇아가는 독서는 필요보단 재미의 요소가 더 많다. 이번 경우는 안티조선에서 시작한, (미잘 말에 의하면) 인터넷 무림 세계에 관한 것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교과서에 실린 동시를 처음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렸을 때부터 여백이 없어 새까맣게 백지를 사용하고 또 그 위에 덧칠을 하도록까지 절약 교육을 받았던 내게, 교과서에 실린 동시는 인쇄가 잘못된 이상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종이의 낭비가 심했던 것이다. 어려서 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몇 개의 단어와 짧은 시행이 거느린 드넓은 여백은 신비한 풍요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인이 되기로 했(다.)' 는 시인은 공무원이 돼서 퇴근 후 독자로 사는 삶을 꿈꿨단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저자가 됐다.

'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으면서, 독서에 관한 내 관념은 몇차례나 바뀌었다. 젊었을 때는 그저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수단으로 책을 읽었다. 그때 책은 아파트 평수를 넓혀 가는 것과 같이, 내 개인적인 재산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다른 사람과 이해와 사랑을 나누는 방법으로 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식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책을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어 가게 된 것이다. 무엇엔가 중독된다는 말은 곧 외로움으로 통하지만, 책에 중독된다고 해서 외로워지지는 않는다.'

 그 저자의 이름은 장정일이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7권을 읽고 있다. '아담이 눈뜰 때'나 '보트 하우스'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책은 특별하거나 너무 싫지 않은, 딱 고만고만한 정도였다. '생각'을 읽으면서 '정말 이런 생각을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어느 부분에선 내가 나 아닌 것으로부터 단속했던 생각들이 무척 신기했다. 그래도 확 좋진 않았다. 안티 미스코리아 운동을 두고선 당사자가 말하게 해야지, 누가 대신 하는건 무리라는 얘기가 좀 불편했고, 자본대 반자본의 이분법적인 도식은 좀 뻔했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난 후에 그의 책의 충실한 독자가 되기로 했다.

  독서 일기만큼이나(특히 엉터리 책을 읽고 난 후, 자제하는 듯하면서 어깃장 놓는 방식은 유쾌하다) 그가 읽은 '책에 대한 책'의 내용도 좋다. '서재 결혼시키기'에서 '전작주의자의 꿈' 등 책에 대한 책은 항상  나를 설레게 한다. 맘에 드는 작가가 좋아하는 책의 지도를 그려볼 수 있고, 어떤 흐름으로 책을 읽었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신간 소개나 출판사 소개로 책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건 왠지 '그저 책'일 뿐 '읽고 싶은 책'의 아우라가 안 풍긴다.

 아니 프랑수아의 <책과 바람난 여자>에선 책과의 물성애에 빠진 그녀가 책을 사랑하는 방법을,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선 권력과 지식을 남성들이 독차지하던 시절에 '책 읽기'로부터 차단된 여성이 나온다. <꿈 꾸는 책들의 도시>는 너무 두꺼워서 읽기를 망설였는데 혹할 것 같은 내용이 아니라 이참에 깨끗이 단념하기로 했다.


* 아빠는 냉장고 청소를 하신다. '나도 해야되냐'고 여쭸더니 '안 하느니만 못한다'며 깨끗이 거절하셨다. 그래서 집안일 하는 대신 페이퍼를 쓴다. 그러니까 이 페이퍼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체 이런 음식을 반년 가까이 냉장고에 '처'넣어놓은 누군가를 규탄하는 아빠의 욕설과 얼음 가득 담긴 텀블러 덕에 씌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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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8-27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아직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제 읽어볼까 싶어지네요. Arch님 덕에 말이죠. 물론 더 흥미가 가는 책들은 [책과 바람난 여자],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이긴 합니다만.

- 고백하자면, 이 글을 두 번 읽었는데 왜냐하면 처음에 빨리 읽느라고 '아니 프랑수아'를 얼핏 '아프락사스'로 읽었기 때문이에요. 하하하핫;;


- 약올리자면, 나는 커피빈의 '아이스 모카 캐러멜 라떼' 기프티콘을 생일 선물로 받아서 가지고 있어요. 아직 안 바꿔 먹었어요. 먹고싶죠? 하하핫

(다섯시간 후) [책과 바람난 여자]는 품절이네요. 흐음.

Arch 2010-08-27 20:07   좋아요 0 | URL
* 우리 다락방은 왜 이렇게 예쁘게 말해요, 응? ^^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의 그림은 괜찮았는데 글은 별로였고, 책과 바람난 여자는 장정일에 의하면 책에 대한 한편의 수다로 읽힐 수 있대요.

* 아니 다락방도 아니고 저 글자를 어떻게 아프락사스로 읽혔을꼬~

* 아니아니 저는 커피빈 커피는 별로에요. 얼음이 좋다는거죠. 조그만해가지고 입에서 아삭아삭 씹히는거 말예요. 터미널에서 버스 탈 때면 텀블러에 얼음 넣어갔고 나와요. 몰래, 도둑질 하듯이.

도서관엔 있을지 몰라요. 왜 이렇게 빨리 품절되나 몰라.

2010-08-27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8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0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10-08-29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이 냉장고청소에 꼿힙니다....왜 항상 욕과 시작해서 욕과 끝나는지 저도 모르겠더라구요ㅋㅋㅋ

Arch 2010-08-30 14:08   좋아요 0 | URL
그건 해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공감할걸요. 그래서 전 손도 못대고 있는데 부지런한 아버님께서 그만^^ 전 오래 살거 같아요.
 

  여성주의는 제 자신의 경험과 고통에 대해 굉장한 설명력을 준다는 점에서, 그래서 저를 끊임없이 정치적인 인간이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여성의 삶에 근거한 새로운 언어를 고민하는 학문이 여성학이 아닐까.

 안다는 것은 '알게 된 새로운 자기 몸에 사로잡히는 것'

 공략하기보다는 우리가 기존의 언어하고 다른 언어나 다른 인식체계, 다른 가치관을 가짐으로써 어떤 면에서 '궤도 밖에서 좀 살아보자'라는 것이 '낙후시켜라'의 논의이다.

 여성과 남성이 원래 임의적인 범주, 다시 말해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범주이기 때문에 같은 성별이라도 내부에 차이가 많은 게 당연하다.

 성폭력- 의무, 역할, 권리, 문화, 일상이었는데 갑자기 이게 범죄가 된 경우. 당신(가해자)이 기억할 수 없는 사회 구조와 권력 관계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인권은 주체와 대상(타자)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 배려가 아니라 경합하는 가치, 각축하고 투쟁하는 가치이다.

  가족주의는 여성의 노동에 대가를 지급하지 않기 위한 이데올로기.

  거짓말, 참말의 문제는 진실이냐 아니냐, 사실인가 아닌가의 차원이 아니라 권력관계에 의해 구조화된 인식론적 관점의 문제이다. 성폭력 하지 않았다는 사람에게 했다고 '설득'하거나 '강요'하기보다는, 성별권력관계에서 네 행동이 왜 성폭력이란 의미를 갖는지 혹은 갖지 않는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을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하기보다 그들을 욕망하고 자기보다 낮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가부장제이다.

  사회적 강자들은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남성들의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남성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중심주의와 자기가 보편이란 착각은 지적 능력을 갉아먹는 태도이다.

 콘돔을 착용해서 성욕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용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성욕이 떨어진다고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

 성적인 활동을 왕성하게 하는데도 남성은 사회적 존재나 계급적 존재로 여겨지지 성적인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성은 무성적 존재까지도 다 성적인 존재나 성적인 대상으로 본다.

 (O양 비디오 사건) 아마 그렇게 눈물 흘리고 잘못했다고 하는 것도, 일종의 협상을 한 거겠죠.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여자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두가지 잖아요. 성스러운 어머니가 되거나 피해자가 돼서 울어야 합니다. 여자가 울지 않고 당당하면 굉장히 미워해요. 피해자 연기를 한 걸거에요.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너무 화가 나는 현실이지만, 우리는 그 여성을 이해할 수 있지요.

모성은 여성을 특정한 역할 노동에 묶어두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제도이다.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지도 않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다. 모성을 재해석하거나 확대해석하면, 아이들한테 밥 차려주고 공부시키는 것만이 모성이 아니라 엄마가 새로운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것도 훌륭한 모성이다. 엄마가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 엄마 스스로 행복한 것이 아이에게도 중요하다.

(투표)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이 더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경향.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라 자기가 욕망하고 동일시하고 싶은 정당에 투표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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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떨어져 있을 때 참 보고 싶어요. 그런데 보잖아요. 그럼 그냥 그래요. 왜 보고 싶었나 싶고.

그는 자기 얘기냐며 한번 더 되묻고선 그러니까 아치가 날 보고 싶어하네 이러면서 자꾸 놀렸다.

 고백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에 사는 것 같다. 자꾸 보고 같이 있어서 즐겁다면 당연히 좋아하는거지 굳이 맘을 다잡아 고백하는게 좀 겸연쩍다. 고백하고나서 달라질 것도 없다. 우린 전처럼 사이 좋은 동네 친구이고, 서로에게 허용되는게 어떤건지 잘 알 정도로 상식적인 사람들이니까. 서로 맘이 다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조금씩 멀어지는게 인지상정. 허기질 때면 내 옆에서 종알거리며 떠들어줄 그가 생각나기도 하겠지만 그게 그렇게 심각하고 고통스럽진 않을 것 같다고 쓰려고 했는데, 그건 좀 오만했다.

 이건 아주 먼 얘기고 우선은 정서 불안처럼 자꾸 여름 다 가기 전에 아치가 비키니를 입어야 한다며 해수욕장에 가자는 그를 좀 말려야 했다.
- 저 배가 아직 안 들어갔어요. 그리고 수영해야하는데 비키니는 좀 오바다.
 그는 자기가 선교사들이 수영하는걸 봤는데 다른 나라 사람은 배 나와도 비키니 잘만 입더라고 내 기인지 자신의 의도인지를 모르겠는걸 자꾸 북돋았다. 아우 참, 아우 참하면서 내 할일을 하는 틈틈이 그의 말을 흘려듣자니 왠지 이 정도의 거리가 참 좋다란 생각이 들었다.
 비키니를 꼭 입어야하나 걱정할 필요도 없고, 자기 말하는데 나는 내 일에 몰두하고 있어서 서운하지 않을까란 염려는 붙들어맨, 누군가는 열심히 선교사 얘기를 하고 다른 사람은 그냥 흘려들으면서 가끔 눈을 봐주며 씽긋 웃어주는 거리.  


* 연극적인 상황이었다. 다른 때의 나라면 이건 나와 맞지 않는 일이고, 좀 웃긴다고, 너 되게 위선적이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백 대신 살짝 웃으며 넘어갔다. 그 일이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기도 했고, 사사건건 날을 세우는 것보다 지나치는게 훨씬 더 나을거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기를 쓰면서 상대방과 나의 간극을 줄이려고 노력한다거나 왜 그게 잘못된 생각인지 꼬치꼬치 따져대는걸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도리어 서로의 차이를 메울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사건건에는 '나는 이토록 너에게 최선을 다한다'란 진심이 담겨있다고 착각했다. 내가 편해지려는 최선이었지 상대방에게 필요한 최선은 아니었다. 


* 남자가 생선을 발라주면 어떤가란 웃기지도 않은 주제가 나온적이 있다. 한 남자가 자기는 여자 친구한테 생선 발라주고 고기 구워주는게 좋다란 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좀 웃기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단순히 취향 문제인줄 알았는데 같은 자리에 있던 여자분들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여자가 손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해주는건 여자 고유의 주체성을 훼손한다는 얘기를 하는데 나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변덕스러운 자아지만 그깟 생선 발라주는 것으로 쉽게 좌지우지 되진 않는다던가, 대체 누군가를 좀 챙겨주는 것과 주체성은 무슨 상관이며, 선뜻 '여성 노동'을 하는 남자를 칭찬해주지는 못할 망정 몰아세우면 되겠냐고, 그건 꼭 부엌 들어가면 꼬추 떨어진다고 겁주는 할머니들 같다는 얘기를 하려다 말았다. 

 대신 여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남자에게

- 저는 생선 발라주는 남자 좋아해요. 술잔 비면 술 따라주고, 자꾸 예쁘다고 하는 사람도 좋아요. 고기는 잘 못먹지만 밑반찬 아낌없이 챙겨주는 남자도 좋아해요. 비올 때면 둘 다 우산 있어도 우산 하나로 같이 쓰자고 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꾹꾹 눌러담은 문자 말미에 하트 숑숑 보내주는 사람도 좋아해요.

 라고 말하려 했으나 '아치, 술이 과했구나'라며 약올릴 것 같아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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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8-23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생선 발라주는 남자 좋아해요. 남자라면 모름지기 생선을 발라줘야 진짜 남자라고 생각해요. 고기를 먹을때는 생마늘이 다 떨어지지 않았는지 미리 챙겨주는 남자가 좋고, 술잔이 비면 따라주는 남자가 좋아요. 자꾸 예쁘다고 하는 사람도 좋구요. 이 술을 다 먹지 못할 것 같다고 하면 내 잔을 기꺼이 가져다 마시는 남자도 좋아요. 비오는 데 우산 하나로 같이 쓰자고 하는 남자도 좋아요.

남자 둘이 있다면, 그러니까 생선 발라주는 남자와 발라주지 않는 남자가 내 앞에 나란히 앉아 있다면, 나는 생선 발라주는 남자를 더 많이 쳐다볼 거에요. 자꾸 예쁘다고 해주는 남자와 예쁘다는 말에 인색한 남자가 있다면, 나는 예쁘다고 말해주는 남자한테 더 웃어줄 거에요.


Arch 2010-08-23 17:56   좋아요 0 | URL
아, 내 맘 같은 다락방이 있었군요^^
제가 기획력과 추진력이 있다면 전생발 만들면 좋겠단 생각을 해봤어요. 전국 생선 발라주는 남자들의 모임? 크~

차좋아 2010-08-23 18:4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아치님의 글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제가 그 남자가 되곤 합니다.
이야기 후반으로 갈수록 함량미달의 남자가 되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꿈을 잠시나마...ㅎㅎㅎ

생선을 발라줘야한다면 저는 횟집만 갈꺼에요~ (아줌마 꽁치구이 주지마세요) 나 보고 남는 음식 먹으라 하면 내가 짬통이야! 먹기 싫음 버려, 이러는 남자거든요^^



Arch 2010-08-23 19:04   좋아요 0 | URL
차좋아님은 그런 남자 사람이구나! 뭐 남자가 그럼 생선 잘 발라주고 우산 잘 씌워주는 여자 만나면 되죠~ 그래서 연애하는거 아니겠어요.

아기가 남긴 음식도 못먹는 저로선 음식 남은거 먹으라는 사람은 별로에요.

그런데 전,
전에 수유 너머에서 밥을 먹은적이 있는데 욕심껏 음식을 담아서 남긴적이 있어요. 거기선 그러면 정말 안 되는데 말이죠. 그때 정말 더 먹으면 체하겠고, 안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끙끙댄적이 있는데 옆에 계신 분이 선뜻 제 밥을 먹어주시더라구요. 와, 굉장히 고마웠어요. 그땐 고맙기보다 죄송하고 민망했지만.

pjy 2010-08-24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생선발라주는 남자가 좋은거죠~ 고기먹을때 알아서 제때 뒤집어주는 센스는 있어야 남자인거죠^^ 술잔이 비면 최소한 자기 술잔은 알아서 채우는 남자가 좋아요~ 전 별로 욕심없어요ㅋㅋ

Arch 2010-08-25 10:17   좋아요 0 | URL
그런데 왠지 우리 욕심꾸러기 같아요.^^ 사실 그냥 좋으면 다 좋은건데, 고기 내가 뒤집으면 되고, 생선 나도 잘 발라먹으니까~
 

 남자가 내 잔이 빈걸 알고 술을 따라줬다. 남자는 잔을 살짝 잡고 예쁜 손으로 술을 따랐다. 행여 한입에 털어넣을까 너무 적거나 많지 않은 양을 잔에 부어준다. 무슨 얘기 끝엔가는 아치가 말을 참 예쁘게 한다며 살짝 꼬인 혀로 대꾸를 해주고, 슬쩍 편을 들어줬다고 아치밖에 없다며 농담을 곁들였다. 살뜰하게 챙겨주면서 생색내지 않는 마음이 참 예뻤다. 그때 문득 '그'가 아니라 '그와 같은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어졌다.

 그가 자기 옆지기 닮은 딸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와의 연애를 꿈꾸지 못하는건 아니다. 실제로 액션을 취하고 말을 걸기 전에 그저 꿈만 꾸는건데 그의 혼인 여부가 크게 문제될리는 없으니까. 내가 좋아하는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가 아니라 '연애하기에 이상적인 어떤 유형의 사람'이라는걸 안다. 그래서 술자리의 남자와 살짝 무릎이 닿았을 때 짜릿하기보다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연애 결핍 증세로 알딸딸해져서인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팠다. 건조된 당면이 들어있는 국수를 먹고 싶어 편의점을 기웃거렸다. 세 군데를 돌았지만 한곳에서도 국수를 팔지 않았다. 잘 안 팔리는 물건은 진열장에 없었다. 그 새벽에 당면 국수를 먹고 싶은건 나뿐이었나보다. 참치마요네즈 삼각 김밥을 샀다. 음악을 들으며 삼각 김밥을 먹었다.

 이번 선곡은 괜찮았다. 여름 밤에서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는데 노랫말 중에도 라일락 향기 운운하는 부분이 나온다. 사랑해달라고 애원하거나 사랑이 뭐 별거냐고 콧방귀 뀌는 요즘 가사가 아니었다. 사랑이란 말 하나 없이 라일락 향기만으로 퐁퐁 맴도는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노랫말이었다. 그 밤엔 라일락 꽃 무더기 속에서 잠이라도 잘 일이었다.

 연애를 하고 싶은건 누군가와 밥을 먹고, 연락을 주고 받고,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간단한 욕구라고 생각했다. 연애할 때는 그렇지 않으면서 말이다. 밥 한끼 먹는데도 서로가 먹고 싶은 음식을 정하고 상대의 식성과 그날의 기분, 그 전 식사에서 무엇을 먹었고, 밥을 먹은 후에 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도 연애를 안, 아니 못해서 생기는 허전함은 막연하게도 딱 이것 하나만 같이 할 수 있는 상대면 괜찮을 것 같단식이다.

 그래서 처음은 쉽고 연애 중반부터 허덕인다. 좋게 끝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연애를 안 할 때면 매번 끼니때마다 뭘 먹을지 고민하는 식이다. 아, 이 글의 시작은 문득 연애가 하고 싶을 때였지, 지난 연애를 반성하는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시 시작해야겠다.

 술자리에서 만난 남자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주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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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8-22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며칠 올리신 글 읽다보니 왠지 "백만번산 고양이" 를 읽어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짝에 대해 다시 설명해 줘봐" 하는 목소리도 들리는 듯 합니다.
목소리들이 마치 조용히 돌림노래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요 ^^

Arch 2010-08-22 21:22   좋아요 0 | URL
멋진, 댓글이에요. 사람마다 어떤 감각기관이 유독 발달하는거라면 바람결님은 소리에 민감한 것 같아요. 그게 참 좋다구요.

2010-08-23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3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에게 타인은 옆자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전화통화 생중계를 하는 사람이며 무관심과 권태에 찌든 얼굴로 멍 때리는 기둥이며, 용기라곤 주정부릴 때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게 다인 소시민일 뿐이었다. 타인이 볼 때 나도 별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차에 타기 전에 화장실을 들러야 맘이 편해 터미널 옆 공중화장실로 갔다. 짙은 초록색 짧은 미니스커트에 킬 힐을 신은 여자가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옆 칸이 비어 있길래 그녀에게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여자는 있다, 없다란 말 대신 상태가 안 좋다고 했다. 물 내려서 되는 정도면 기다리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건 뭐, 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소외와 핍진한 삶을 묘사한 거라고 헐렁하게 지껄여도 좋을 정도로, 화장실은 굉장히 역겨웠다. 똥 씹은 얼굴로 화장실 칸막이에서 나왔다. 초록 스커트의 그녀는 나를 보더니 자기 차례를 양보했다. '거봐라, 내가 뭐랬니.'란 표정이 아니었다. 혹시 초록 스커트가 한 짓이 아닐까란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심 없는 친절이 고마웠다. 내가 표정과 온 몸으로 자리를 양보 안 하면 견딜 수 없다는 무언의 압박을 줬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월요일마다 듣는 수업 사이에 저녁을 먹는 시간이 있다. 보통은 눈 두는 곳마다 하나씩 있는 콩나물국밥을 먹는데 그 날은 좀 다른 것이 먹고 싶었다. 느끼하고, 포만감이 느껴지는 음식, 몸에 해롭지만 몸에 좋은 음식으론 도달할 수 없는 좀 해로운 맛을 가진 음식.

 주위를 둘러보다 근처에 예쁘장한 총각이 하는 튀김집이 눈에 띄었다. 저녁시간이어선지 가게는 붐볐다. 총각은 예쁘장한 얼굴을 피로나 초조로 찡그리는 법 없이 부지런히 튀김을 튀기고 주먹밥을 만들고 있었다. 두 명의 여자가 들어왔고, TV의 6시 내 고향은 분식집과 어울린 않는단 생각이 드는 찰나,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 영화제 보러 혼자 오신거에요?

 뭐지? 전도하는 사람인가. 도를 아십니까는 아닌 것 같고. 뭐지?

- 영화제는 아니고 스텝 수업이 있어서 전주에 왔어요.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녀는 자꾸 의심 가는 말을 했다. '왜 그렇게 예쁘게 말해요, 동안이시다.' 그런 말을 쑥쓰러우니까 나중에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때 하는건 어떻냐는 제안을 해봤고, 서로가 시킨 메뉴를 나눠먹기도 했다. 어떻게 말을 걸게 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호기심이 많아서 말을 걸게 되더라구요.'란 대답을 했다. 동네 꼬마들에게 장난처럼 인사를 건네고 웃어보이는 것 말고는 어른에게 말을 걸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궁금했었다. 그녀 덕분에 '그냥' 말을 걸어보면 된다는걸 알았다.

 한대수 씨가 뉴욕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듯이, 안녕이란 말로 시작하면 된다는걸.

 버스가 잠시 서 있는 동안, 그는 약봉지에서 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버스 노선을 알려주고, 운전을 하고, 요금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프면 약을 먹고, 기분 좋을 때는 웃기도 하는, 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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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8-20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 여자분도 대단한데요. 어떻게 말을 걸 수 있지? 저는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만약 누군가 말을 걸었다면 그렇게 기분 좋게 대답해주지도 못했을 것 같구요.

타인에게 말걸기는 저에게는 정말 쉽지 않아요.

Arch 2010-08-21 00:22   좋아요 0 | URL
우리 다락방은 새침한 서울 여자라 그래요. 저는 동네 꼬마들이 적선하듯 말 걸어주는 것도 재미있고 그렇거든요. 그렇게 말 거는게 서재에선 왜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2010-08-21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1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8-22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태에 찌든 얼굴로 멍 때리는 기둥"과 "아프면 약을 먹고, 기분 좋을 때는 웃기도 하는, 타인." 말을 나누었을 때와 나누지 않았을 때의 차이가 이렇게 크군요.^^ 정말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 보다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타인'에게 말을 걸 듯 처음으로 댓글을 남겨봅니다.^^

Arch 2010-08-22 15:33   좋아요 0 | URL
푸른 바다님 고맙습니다 ^^ 저도 그래야하는데 말 걸기가 참 어려워요. 먼저 말을 걸어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