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타인은 옆자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전화통화 생중계를 하는 사람이며 무관심과 권태에 찌든 얼굴로 멍 때리는 기둥이며, 용기라곤 주정부릴 때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게 다인 소시민일 뿐이었다. 타인이 볼 때 나도 별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차에 타기 전에 화장실을 들러야 맘이 편해 터미널 옆 공중화장실로 갔다. 짙은 초록색 짧은 미니스커트에 킬 힐을 신은 여자가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옆 칸이 비어 있길래 그녀에게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여자는 있다, 없다란 말 대신 상태가 안 좋다고 했다. 물 내려서 되는 정도면 기다리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건 뭐, 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소외와 핍진한 삶을 묘사한 거라고 헐렁하게 지껄여도 좋을 정도로, 화장실은 굉장히 역겨웠다. 똥 씹은 얼굴로 화장실 칸막이에서 나왔다. 초록 스커트의 그녀는 나를 보더니 자기 차례를 양보했다. '거봐라, 내가 뭐랬니.'란 표정이 아니었다. 혹시 초록 스커트가 한 짓이 아닐까란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심 없는 친절이 고마웠다. 내가 표정과 온 몸으로 자리를 양보 안 하면 견딜 수 없다는 무언의 압박을 줬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월요일마다 듣는 수업 사이에 저녁을 먹는 시간이 있다. 보통은 눈 두는 곳마다 하나씩 있는 콩나물국밥을 먹는데 그 날은 좀 다른 것이 먹고 싶었다. 느끼하고, 포만감이 느껴지는 음식, 몸에 해롭지만 몸에 좋은 음식으론 도달할 수 없는 좀 해로운 맛을 가진 음식.

 주위를 둘러보다 근처에 예쁘장한 총각이 하는 튀김집이 눈에 띄었다. 저녁시간이어선지 가게는 붐볐다. 총각은 예쁘장한 얼굴을 피로나 초조로 찡그리는 법 없이 부지런히 튀김을 튀기고 주먹밥을 만들고 있었다. 두 명의 여자가 들어왔고, TV의 6시 내 고향은 분식집과 어울린 않는단 생각이 드는 찰나,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 영화제 보러 혼자 오신거에요?

 뭐지? 전도하는 사람인가. 도를 아십니까는 아닌 것 같고. 뭐지?

- 영화제는 아니고 스텝 수업이 있어서 전주에 왔어요.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녀는 자꾸 의심 가는 말을 했다. '왜 그렇게 예쁘게 말해요, 동안이시다.' 그런 말을 쑥쓰러우니까 나중에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때 하는건 어떻냐는 제안을 해봤고, 서로가 시킨 메뉴를 나눠먹기도 했다. 어떻게 말을 걸게 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호기심이 많아서 말을 걸게 되더라구요.'란 대답을 했다. 동네 꼬마들에게 장난처럼 인사를 건네고 웃어보이는 것 말고는 어른에게 말을 걸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궁금했었다. 그녀 덕분에 '그냥' 말을 걸어보면 된다는걸 알았다.

 한대수 씨가 뉴욕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듯이, 안녕이란 말로 시작하면 된다는걸.

 버스가 잠시 서 있는 동안, 그는 약봉지에서 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버스 노선을 알려주고, 운전을 하고, 요금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프면 약을 먹고, 기분 좋을 때는 웃기도 하는, 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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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8-20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 여자분도 대단한데요. 어떻게 말을 걸 수 있지? 저는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만약 누군가 말을 걸었다면 그렇게 기분 좋게 대답해주지도 못했을 것 같구요.

타인에게 말걸기는 저에게는 정말 쉽지 않아요.

Arch 2010-08-21 00:22   좋아요 0 | URL
우리 다락방은 새침한 서울 여자라 그래요. 저는 동네 꼬마들이 적선하듯 말 걸어주는 것도 재미있고 그렇거든요. 그렇게 말 거는게 서재에선 왜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2010-08-21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1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8-22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태에 찌든 얼굴로 멍 때리는 기둥"과 "아프면 약을 먹고, 기분 좋을 때는 웃기도 하는, 타인." 말을 나누었을 때와 나누지 않았을 때의 차이가 이렇게 크군요.^^ 정말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 보다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타인'에게 말을 걸 듯 처음으로 댓글을 남겨봅니다.^^

Arch 2010-08-22 15:33   좋아요 0 | URL
푸른 바다님 고맙습니다 ^^ 저도 그래야하는데 말 걸기가 참 어려워요. 먼저 말을 걸어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