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내 잔이 빈걸 알고 술을 따라줬다. 남자는 잔을 살짝 잡고 예쁜 손으로 술을 따랐다. 행여 한입에 털어넣을까 너무 적거나 많지 않은 양을 잔에 부어준다. 무슨 얘기 끝엔가는 아치가 말을 참 예쁘게 한다며 살짝 꼬인 혀로 대꾸를 해주고, 슬쩍 편을 들어줬다고 아치밖에 없다며 농담을 곁들였다. 살뜰하게 챙겨주면서 생색내지 않는 마음이 참 예뻤다. 그때 문득 '그'가 아니라 '그와 같은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어졌다.

 그가 자기 옆지기 닮은 딸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와의 연애를 꿈꾸지 못하는건 아니다. 실제로 액션을 취하고 말을 걸기 전에 그저 꿈만 꾸는건데 그의 혼인 여부가 크게 문제될리는 없으니까. 내가 좋아하는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가 아니라 '연애하기에 이상적인 어떤 유형의 사람'이라는걸 안다. 그래서 술자리의 남자와 살짝 무릎이 닿았을 때 짜릿하기보다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연애 결핍 증세로 알딸딸해져서인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팠다. 건조된 당면이 들어있는 국수를 먹고 싶어 편의점을 기웃거렸다. 세 군데를 돌았지만 한곳에서도 국수를 팔지 않았다. 잘 안 팔리는 물건은 진열장에 없었다. 그 새벽에 당면 국수를 먹고 싶은건 나뿐이었나보다. 참치마요네즈 삼각 김밥을 샀다. 음악을 들으며 삼각 김밥을 먹었다.

 이번 선곡은 괜찮았다. 여름 밤에서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는데 노랫말 중에도 라일락 향기 운운하는 부분이 나온다. 사랑해달라고 애원하거나 사랑이 뭐 별거냐고 콧방귀 뀌는 요즘 가사가 아니었다. 사랑이란 말 하나 없이 라일락 향기만으로 퐁퐁 맴도는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노랫말이었다. 그 밤엔 라일락 꽃 무더기 속에서 잠이라도 잘 일이었다.

 연애를 하고 싶은건 누군가와 밥을 먹고, 연락을 주고 받고,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간단한 욕구라고 생각했다. 연애할 때는 그렇지 않으면서 말이다. 밥 한끼 먹는데도 서로가 먹고 싶은 음식을 정하고 상대의 식성과 그날의 기분, 그 전 식사에서 무엇을 먹었고, 밥을 먹은 후에 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도 연애를 안, 아니 못해서 생기는 허전함은 막연하게도 딱 이것 하나만 같이 할 수 있는 상대면 괜찮을 것 같단식이다.

 그래서 처음은 쉽고 연애 중반부터 허덕인다. 좋게 끝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연애를 안 할 때면 매번 끼니때마다 뭘 먹을지 고민하는 식이다. 아, 이 글의 시작은 문득 연애가 하고 싶을 때였지, 지난 연애를 반성하는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시 시작해야겠다.

 술자리에서 만난 남자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주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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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8-22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며칠 올리신 글 읽다보니 왠지 "백만번산 고양이" 를 읽어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짝에 대해 다시 설명해 줘봐" 하는 목소리도 들리는 듯 합니다.
목소리들이 마치 조용히 돌림노래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요 ^^

Arch 2010-08-22 21:22   좋아요 0 | URL
멋진, 댓글이에요. 사람마다 어떤 감각기관이 유독 발달하는거라면 바람결님은 소리에 민감한 것 같아요. 그게 참 좋다구요.

2010-08-23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3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