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내가 끼니를 거를 때가 있다니! 

  점심을 2시에 먹고, 9시가 다 되도록 사과 하나 먹은게 다였는데 배가 안 고팠다. 회사가 끝나고 노면에 살짝 눈이 낀 거리를 걸었다. 바닥의 물기가 맘까지 전염이 되는지 불현듯 예전에 알바 끝나고 애썼다며 늦게까지 잠을 안 자고선 기다렸다가 설렁탕을 같이 먹은 그 사람이 생각났다. 분명 보고싶은 마음에 울컥했는데 눈물도 안 나오고, 그가 저질렀던 만행이 기억폴더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바람에 그저 좋은 추억들 연필심 꾹꾹 눌러가며 적어내려가자란 생각을 해가며 씩씩하게 집으로 향했다. 씩씩하게 걷다보니 위도 갑자기 운동을 시작했는지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다...  

의욕적이고 기세등등하게 배가 고프다.

 그래, 뭘 원하지? 김치찌개? 아니. 라면? 윽 별로. 그럼 없는데. 그냥 율무차로 때워. 아니 넌 어떻게 먹을걸 때우는거라고해. 따라해봐, 먹을건 신성한거라고! 신성한... 먹거리. 

 떠오른다, 떠올라. 우선은 노란색. 잘 된 밥에 들척한 국물, 부드럽게 익은 감자에 동글동글 씹히는 당근. 보들거리는 고깃살에서 배어나오는 육즙과 독특한 향. 침이 꼴까닥 넘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왕성하게 배고픈데, 게다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걸 만들고(만들줄은 아냐고? 물론 안다. 알고만 있다. 왜, 조리예 다 나오잖아.) 앉아있을 수는 없어! 그래서 신성한 한끼를 위해 레토르트 카레를 샀다. 오~ 레토르트 만세, 만만세. 

 안 돼, 안 돼 너무 허겁지겁 먹다가 체할 수도 있어. 그래놓고 또 부대끼면 말짱 꽝이란 말이야. 허겁지겁은 안 돼. 안 돼. 하지만 내 손은 벌써 수저를 집고 미친듯이 카레 얹은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물론 상상했던 그 맛은 아니었다. 모든 알갱이들을 레토르트화 해버린 카레의 질감에, 전자렌지에 돌렸더니 푸실거리는 밥알갱이. 하지만 상관없었다. 왜냐면 난 배가 고프니까. 수저 가득 노란 카레밥을 담아 잘 익은 김치를 올려놨다. 보고만 있어도 침이 고여 침이 넘어가기 전에 잽싸게 한 입. 그리고 다시 또 한 입. 씹지도 않고, 입에서 한바퀴 카레를 돌린 다음에 미뢰 곳곳에 맛과 향만 살짝 간보이고 다시 한 입. 말 그대로 게 눈 감추듯이 한 그릇을 뚝딱. 

 어어. 그런데 배가 부르지 않다. 나는 다시 전자렌지를 향해 역전의 용사처럼 돌진했다. 다시 카레를 덥혀 처음과 마찬가지로 수저의 면적을 초과하도록 밥을 꾹 눌러 담은 채 입에 넣었다. 카레밥을 떠서 다시 입에 넣고, 김치를 아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씹고... 얼마쯤 그랬을까. 속도는 늦춰지고 슬슬 동공이 풀리고 문득, 아주아주 편안하고, 황홀하고, 나른해져서 그만 정말 딱 1.3초 정도 

 이거, 천사가 되는거 아냐? 

란 생각이 들었다. 뱃살 천사이거나 먹다 죽은 천사 이쯤이겠으나 이토록 허겁지겁에 걸맞는 식탐과 식욕 등등의 맹렬한 의지를 요근래 느껴본적이 없어, 천사라면 이렇게 짧고 찌릿하게 행복해요 하겠구나 싶어진거다. 맵고 흥분되는 맛을 좀 더 음미했다. 입에 콸콸콸 물을 들이붓는 상상, 얼음을 와직와직 씹는 상상, 그냥 계속 매운채로 놔두고 싶은 새디즘적인 욕망까지. 율무차를 걸죽하게 타서 호두며 잣 알갱이들을 성큼성큼 씹어댔다. 그리고 다시 짧게 거친 0.5초 동안 다시 행복한 기운이 몸 가득히 퍼져 딱 한모금만 자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오늘 밤은 다른 어느 때보다 앤의 이 구절에 동감과 지지를 보낼 것만 같다. 아울러 나는 침대에 쵸코 쿠키 따위는 가져오지 않을거야란 대범한 약속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왜냐면, 난 이제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배가 부르니까. 

서재 결혼시키기 139p 

키츠, 그의 친구 찰스 웬트워스 딜크에게 보낸 편지 

쾌락에 대한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 순간 나는 한 손으로는 글을 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숭도 복숭아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다네.  

정말 얼마나 맛이 있는지. 

부드럽고, 걸쭉하고, 질척거리고, 즙이 새어나오고. 

그 맛있는 살이 마치 축복받은 커다란 딸기처럼 내 목 안에서 녹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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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은 좀 다른 사람이다.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다가도 막상 누군가가 짖궂은 농담을 걸어오면 정색을 하기 일쑤고, 누구라도 흥분될만한 공격을 퍼붓는대도 결코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평소에 미모와 유려한 말솜씨, 그윽한 눈빛 등등 자기 자랑은 빠짐없이 하면서, 연애에서의 자기 입장은 다자망이라고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연애경험이 없다고 적적한 흉내를 낸다. 연기를 못하기에 흉내라는걸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다. (아니아니, 사실 내가 좀 눈썰미가 있다.)

 그런데도 M을 볼 때마다 나는 참말로 기분이 좋아진다. M의 말랑말랑한 말투와 까슬거리는 입매무새, 자연발생적으로 창의성을 담보받아 나오는 언어와 한번씩 잽으로 날려주는 반말 비스무레한 어투까지. 손으로 꼽으려면 손가락이 25개는 더 늘어나야할 정도로 많은 M의 까칠한 면모를 아는데도 그가 좋다. 

 그래서 반쯤은 반하고, 반쯤은 살랑살랑대는 기분으로 그에게 말해보았다. 

-멜기세덱님,(이번엔 진짜로 제대로 썼어요!) 멜기님이 아저씨 같아서 참 좋아요. 

 그럼 당연히, 혹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그럼요, 저도 아치님의 단어 선택이 맘에 쏙 들어와요'. 이럴줄 안 건 아직 내가 사회적 언어에 대한 감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멜기님은 불현듯 한옥타브 말을 끌어올려 자신이 아저씨가 아닌 이유를 설명하셨다. 네네. 그런데 느닷없이 아프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하고 자신과 푸하를(왜 푸하님은! 전에 맥주를 뒤춤에 낑겨가지고 갖고 온 잔상?) 아저씨를 부르는 것의 차이, 아저씨란 어법에 도사린 자기 모함의 징후, 아저씨란 말은 사회적으로 단순히 '나이 들어보이는게 다다'란 것 뿐이라는 것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멜기가 아저씨가 아닌 이유'를 듣고 나자 그럼 이런걸 뭐라고 표현을 해야할지 궁금해졌다. 

 일테면 

 내가 진짜 아저씨라고 생각하는 배철수 아저씨가 

 오늘 임진모씨와 네버엔딩 팝스토리를 진행하면서  그래미 어워드 영화음악에 오른 곡들 중 B.J Thomas의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를 틀어줬다. 노래를 듣고나자, 배철수 아저씨가 자기가 라디오 진행하던 초창기 때, 비오는 날 이 노래를 듣다가 너무 짧아서 두 번 들었던 적이 있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임진모씨가 그래서 그때 청취율이 별로였구나라고 대꾸해주고. 청취율 가지고 두분이 한차례 말이 오갔다. 언제부터 내 방송을 들었느냐, 그런건 당신이 몰라도 된다, 등등. 그런 다음에 철수 아저씨가 다시 주섬주섬 이 노래를 또 틀려고 하는거다.  그러자 임진모씨가 

- 아니, 뭐하세요. 진행하셔야죠. 

- 가만히 있어봐요. 음악 틀어놓고 얘기해보게요. 

- 혹시 90년대 시절이 좋았던거에요? 무슨 사연 있는거 아냐? 

- 사연은 무슨, 임진모씨 목소리가 너무 까칠하고 팍팍하니까 목소리 좀 더 좋게 들릴까봐 트는거지. 

 그 뒤 두분은 다시 누구 목소리가 더 까칠한가를 놓고 얘기를 하셨다.  

 이런거. 가벼운 재치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죽일 듯이 이죽거리는 것도 아니고 딱 이만큼. 보기 좋고, 듣기 좋고, 대하기 편한 딱 이만큼.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탁구공처럼 툭툭 말을 주고 받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 이 사람을 곯려먹을까, 어떻게 재미있게 만들까를 고민하는 느낌. 내가 떠는 주접과는 다르게 뭐라고 하지, 아, 능청맞음. 아니, 이걸로도 멜기님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해 아저씨라고 한건데. 나이 들어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유쾌한 탄성으로 부딪쳐오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멜기님은 어찌됐든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저씨 금지령을 내렸다. 뭐, 맘 속으로만 생각해야지.  

 우르르 몰려간 술집에서 우리는 멜기님이 결혼 후 가사노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멜기님은 과연 이러이러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를 놓고 한참 투닥거렸다. 그러면서 다시 아저씨 생각이 절로 난게, 이 분은 정말 자신의 논리를 굳건한 성처럼 세워놓는데 다른 말들이나 의견도 성의 도랑과 문 사이사이로 스며들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논쟁과 상처란 권성우의 책 제목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논쟁 후에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 상처를 받고, 패인을 분석하고, 이를 바득바득 갈기도 하겠건만 우린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입장에서 억울할 수도 있는데 성문을 활짝 열어놓은 성주는 그저 여유롭기만 했다. 약간 샘날 정도로. 나였다면 성이고 뭐고 문은 쾅쾅 다 닫아버리고, 끙끙대며 곯머리를 싸맸을텐데. 이래도 정말, 아저씨 안 할거에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멜기님은 다른 분과는 정답게 악수를 하더니 가운데 있는 나를 쏙 빼놓은 적이 있다. 적잖이 민망해 슬쩍 내밀다가 만 손으로 허공을 향해 가로지르기를 하며 딴청을 피우다 왜 나랑은 악수를 안 할까, 처음봐서 그랬을까, 여자랑은 악수를 안 하기로 엄마와 약조를 했을까 등등 여러모로 이유를 생각해본적이 있다.  

 이번에도 헤어질 때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길래 나도 술김에 쓱 손을 내밀었더니 악수를 해주셨다. 이번의 악수는 조건반사적이었다. 뭔가 나오니까 나도 나가려니 뭐 이런. 비록 몇번 만나보지 않았지만, 난 멜기님이 이성과 악수를 하는걸 쑥쓰러워 한다는걸 눈치챘으니까. 이래도 아저씨 아니에요? 에~ 아저씨면 쑥쓰러운거 없는데? 그러니까 내 '아저씨'는 당신의 '아저씨'랑 다르다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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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2-19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페이퍼는 사랑스럽네요. 대상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데요.
딱 한번 뵈었지만, 멜기님은 정말 매력적인 어투를 가지고 있는거 같아요. 국문학도라서 그런 걸까요?
전 그런 눈썰미가 없는 편이지만 딱 뵙고, 정말 학교다닐때 인기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

어서 주무세요~ 스윗드림 ^^

Arch 2009-02-19 23:58   좋아요 0 | URL
어어~ 대상 즉 세덱씨가 제 애정을 눈치채면 안 되는데 큰일인걸요.

우리 휘모리님도 잘자요~ 샤랄라 드림(자매품 : 방싯방싯 어정어정 찌리리도 있음.)

멜기세덱 2009-02-20 00:37   좋아요 0 | URL
반어는 참으로 매력적인 용법입니다. 또한 우리는 신선하고 창의적으로 톡톡튀고 산소같은 어법을 추구합니다. 그리하여, 반어는 반어이되, 상투적 반어는 아름답지 못 합니다. 나는 정말 학교 다닐 때 인기가 많았을까? 그랬다면, 나는 좀 덜 까칠했을지도 모를 일이군요.
참고로, 저는 '국문학도'는 아니랍니다.

악수;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것은 실례라는 말을 들은 바 있습니다. 경험상으로도 모든 여성분들이 저의 악수요청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ㅎㅎ

승주나무 2009-02-2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악수를 들지 말고, 악수를 하길 바래요^^

Arch 2009-02-21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의 반어 역시 상투적인 반어로서 아름답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멜기님의 인기는 모르겠고, 멋있잖아요.
악수는... 히~

승주나무님 옙!
 

 예의없는 것들의 신하균은 킬러가 단순하게 사람 하나 쏘고 잠수타면 그만이란 상식을 깨주었다. 킬러도 밥 먹고, 킬러도 섹스를 하고, 킬러도 곱창을 먹고, (가끔 갈비도 먹으며), 킬러도 책을 읽는다. 영화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만 뭔가 좀 불안하고 위험한 킬러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가 생계형 조폭이라면 신하균은 삶에 단단한 뿌리를 두고 있는 생활형 킬러였던거다. 

  킬러에 대해서 잘 모르며 관심도 없던 나는, 이번 만남을 통해 더욱 더 확실히 말미잘님이 킬러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미잘님이 폼을 잡고 총을 쏘거나 칼질을 하는걸 보여줬을리 만무하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 의심을 품게된건 그의 몸짓이 아닌 언어 습관에 있었다. 말미잘님은 승냥이떼같은 나와 승주나무님-같이 묻어가요-의 공격으로 말이 끊기고, 본래 하려던 말들을 토막내선 저자거리에 효수를 하고, 그걸 또 기사로 쓰며 내가 신나 있을 때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저 우리 하는 짓의 유쾌한 면을 예리하게 지켜보고선 아, 혹은 웃음으로 대답하곤 했다. 킬러를 내가 만나봤다면 확실하겠지만 만나보지 않았는데도 확실하게 말미잘이 킬러로 생각하게된 단초는 그의 평정심과 웬만해선 움직이지 않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좀 더 정밀한 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수사 장소는 뷰리풀 서재이고, 작업 도구는 클릭질을 위한 광합성 마우스와 실핏줄이 몇개는 터진 뻘건 눈, 가끔씩 손가락을 휘돌려 잡아당긴 늘어난 머리카락, 물잔 몇컵이 다다.  

 뷰리풀 서재에는 그가 킬러라는 증거들로 차고 넘쳐났다. 잦은 출장과 부상, 요리를 할줄 아는데서 나아가 자주 하고, 어쩌면 잘할 수도 있고,(신하균도 요리쟁이였다.) 헌책방을 돌며 네셔널지오그래피를 수집하여 세계 곳곳의 지형을 습득해서  다음 일에 대해 대비를 하며, 킬러의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있으면 조력자를 쉽게 얻을 수 있는 달콤한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까지. 

 게다가 

 사랑의 단상에서 얘기를 시작해 조잡하게 다음 이야기로 머리를 굴리던 아치의 옆에서 말미잘님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한방을 노리셨으니, 이것 역시 전형적인 한방형 킬러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연예 토크쇼도 아니고, 뜬금없이 '자 말해봐요, 사랑이 뭔지'에서 킬러가 아닌 사람의 이런저런 대답이 나오는 가운데 말미잘님이 말할 순간이었다. 말미잘님은 숨을 가다듬으며 

- 사랑은 또 하나의 순환체계죠. 나의 오장육부를 보여주는 것이지 않을까. 

 대답 자체도 멋있었지만, 여기서도 난 그가 킬러란 단서를 찾고야 말았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오장육부, 내장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나 말미잘님은 외상시 대처와 킬러 본연의 임무 수행을 위해 신체기관의 흐름을 꿰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자신의 토대가  '사랑의 단상'을 얘기할 때도 거침없이 튀어나와 하필이면 나처럼 예민한 사람의 귀에 들어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미잘님의 늘씬한 옆구리 찔러 다 조사했으니 불으라고 하자, 그는 자신은 킬러가 아니며 '선량한'누구누구라고 했다. 하지만 킬러가 킬러라고 하는걸 보았는가. 게다가 그가 자신을 지칭해 '선량한'이란 형용사를 붙인걸 보면 100% 그가 킬러임이 확실하다. 나처럼 선량한 사람은 굳이 그런 형용사를 안 붙인다. 선량한걸 알고 있고, 느끼는데 굳이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미잘님은 중대한 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말미잘님 자신도 킬러 일을 해야한다는 것에서 약간의 망설임이 있어 그 단어를 붙인 것이었던 것이었다.  

 앞으로 그의 서재를 드나들며 그의 즐찾수가 고객 명단이란 증거와 방문자수와 서재지수의 조합으로 암호를 푸는 방법, 그가 밀고 있는 책의 54페이지에 그려진 삽화의 비밀(그런거 없다. 혹 누군가 찾을까봐), 하필이면 밀고 있는 책의 제목이 두 아이도 아닌 한 아이인지, 그는 왜 '한'이란 것에 꽂혔을까, 혹시 한이 맺힌건 아닐까, 그가 들고 다니는 사진기가 사진만 찍는게 아니라 사진기에 찍힌 인물의 영혼을 볼 수...(아, 이건 마술사인가?)있다는 것 등등을 알아낼 것이다. 

 다음 이 시간에는 멜기세덱, 그는 왜 아치와 악수를 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혹자는 아치의 손이 드러워 멜기님의 예리한 눈에 걸렸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그래 나다!) 멜기님은 아프편애주의자라 그런거라는 얘기도 들리던데,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일까. 혹시 멜기세댁의 서재를 자주 드나들며 심신을 가다듬는 알라디너들이 있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제가  찐하게 악수 한번 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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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02-1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온건한 페이퍼가 나올 수 있었다는 건 확실히 제 직업이 가진 포스 때문이겠죠. 예,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니까요. 아치님에게도요. 흐.. 사진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진 찍는거랑 총 쏘는건 정말 비슷해요. 눈과 목표물을 렌즈(혹은 가늠자)를 통해 일치시키고 호흡에 유의해 셔터(혹은 방아쇠)를 누르는거죠. 어두울수록 결과물이 좋지 않은 것도 공통점이구요. 장전을 해야하는 점이나 사용한다음엔 분해후 소제를 해야 한다는 것도 공통점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멜기세댁님이 아치님에게 악수를 하지 않은 이유는 아치님을 라이벌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아치님은 서재계의 떠오르는 신성이니까요.

멜기세덱 2009-02-18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

푸하 2009-02-18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Jade 2009-02-18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기와 총의 유사성에 대한 수전 손택의 글이 생각나네요 ㅎㅎ

나는 멜기님이 아프편애주의자라는 것에 한표! ㅋㅋ

무해한모리군 2009-02-18 11:5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수잔손택을 생각했어요 ^^

무해한모리군 2009-02-1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얘기를 아기자기하게도 쓰세요 ^^ 흠 악수 안한 얘기보다 저 아래 멜기님의 목에 빨간 자국이 더 솔깃한데요~ 퍽퍽 휘모리 이건 찌라시가 아니잖아 --;;

2009-02-18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09-02-18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자리님, 신김치 정도로 해두죠. 음... 카메라와 총은 제가 의도하지 않은거에요. 전 그저 뭐가 있을까 하다가 걸린건데 그걸 제이드님이나 미자리님은 이렇게 연관을 시키는군요. 어찌보면 이게 뭐야 싶을 수도 있는데 즐겁게 받아들여줘서 고마워요.

세덱님. 미안미안. 그런데 쪼오기 미자리도 틀렸대요. 세에서 주의하다보니.

푸하하하

제이드님 표 받아서 우리 지방선거 나가요(뮝미)

휘모리님 제가 한 아기자기해요. 전문의 소견 결과, 빨간자국은 건선으로 밝혀졌습니다.

속삭이신님 네^^
 

 내가 좋아하는 정선희씨가 라디오를 할 때 자양강장 토크쇼란 것을 했었다.  그 토크쇼는 말재주 뛰어난 연예인을 불러와 그야말로 아주 시끌벅적하고 뽕빨나게 재미있는 시간을 만들어 청취자들을 제대로 원기회복을 시켜주는 코너였다.  

 어제, 나는 아무도 그렇게 명명하진 않았으나 비공식적으로 이름을 붙인 자양강장 모임에 나가선 주름 1미리와 목감기를 얻어왔다. 어찌나 떠들었는지 목이 쉬어 버렸고, 어찌나 웃었는지 뱃살이 몇그램이나 분산됐다. 뱃살의 가출 소식은 아침에 해장한다며 솥단지 가득 국을 먹은 바람에 몇그램이 더 붙어 소문은 소문일 뿐이란 사실을 재확인 시켜줬다. 그럼 어떤가. 오랜만에 정말 실컷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발로 헤집고, 음흉한 웃음을 한번씩 날려주고, 아이들처럼 약올리기도 해보고, 흥흥 이러면서 콧방귀도 뀌고, 결국엔 흐뭇해져선 고개를 45도 기울려서 그들을 바라보게 되는걸.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기대감을 갖게 해놓고, 에게게 저게 뭐가 웃겨, 왜이래 아마추어같이 싶은 글들을 쏟아낼까 조마조마하지만 어차피 아치의 막나가는 오바 실력과 뒷수습 없는 깔끔함을 다들 아실테니 큰 기대는 금물, 잠시 명상과 요가 비슷한 자세를 통해 작은 자극에도 웃을 수 있는 준비를 한 후 글을 읽길 바랍니다. 

 그러니까 처음은  

 그 님의 작업본능에서 시작됐다.(그 님, 혹시 비방용일까봐 따로 닉네임을 밝히진 않겠어요.) 아마도  그 님은 웃자고 한소리겠지만 시니에에서 아치로 바뀐줄 모르고 Arch로 쓴 글 중에 하나에 30분에 걸쳐 댓글을 달았다는 얘기를 들려주면서 아니 그게 이 사람이더라구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워낙에 날렵한 에드리브를 갖고 있어 캐물어도 진실은 알 수 없으나 농담처럼 한 그 말이 사실이라면 뭐, Arch~아직 죽지 않았어. 자, 주접만 조금 떨자고.  

 본론인 사랑의 단상으로 곧장 들어가기 뭐해서 서기관인 승주나무님의 제안으로  요즘 읽고 있는 책을 소개했다.  

 피터 셰퍼의 아마데우스를 읽는다는 렌초님에게 승주나무님은 댓글(대꾸가 맞는데^^)을 달고 싶었는지 

- 렌초님이 음악에 관심이 많구나. 

라고 했는데 어떡해. 렌초님 가로되, 

- 희곡인데요. 

 책이나 시트콤 같은데서도 아주 멋지게 이게 그거지 하다가 아닌데에서 콰당과 웃음을 선사해주는 것처럼 섬세하고 영민하며, 거칠 것 없고, 자신감으로 넘치는데다 지혜로운(승주나무님 배고파요)승주나무님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웃겨서 난 자꾸 키득대고 말았다. 승주나무님은 거의 반쯤 누워 웃음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대로 이걸 페이퍼로 어떻게 적을까, 분위기를 설정하고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로 할까, 평이하게 갈까를 생각하느라 흐뭇해지고 말았다. 쓰고나니 재미도 없고, 오바만 극성이고.

 내게 늘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렌초님은 아마데우스 외에도  김혜리의 책을 읽고 있었다. 렌초님이 글쟁이로 가장 좋아하는 최인호와 고종석, 김혜리. 그들의 글은 옷같아서 자기 완결성이 있으나 목적성은 없다. 하지만 누가 만든 옷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란 얘기를 하는데 평소의 렌초님보다 더 멋져보였다.(감상 수준하고는) 그러면서 카프 해체 당시 했던 말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 잃은 것은 예술'이란 말을 덧붙이며 한겨레와 경향이 요즘 민주노총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연계해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의심으로 시작하되 의심이 자조나 자멸이 아닌 자신을 굳건하게 지탱하게 해주는 힘을 얻고 있는 렌초님의 굳건함이 부러웠다. 어제를 마지막으로 렌초님은 앞으로 모임에 나올 수 없을거라고 했지만, 렌초님이 몇번에 걸쳐 내게 준 자극은 두고두고 남을 것 같다. 그렇게 되는 어느 날, 나는 로렌초의 시종에서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라 렌초님이 보여주려고 했던 뜻에도 다가가게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멜기님은 요새 바쁘고 정신이 없어 책을 못읽는다고, 하는데.... 어? 저건 뭐지? 

 멜기님 목에 난 빨간 자국을 보고 우리들은(사실 나와 승주나무님만-같이 죽읍시다!-) 승냥이떼처럼 달려들었다. 바쁘다더니 목의 빨강 때문에 바쁘시구려 어쩌고 저쩌고, 배신이야 어쩌고 저쩌고. 그렇게 오랫동안 식량을 비축해놓듯이 멜기님의 빨간 자국에 대해 야금야금 얘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멜기님을 사지에서 구해내야겠다는 투지로 불타오른건 아니고, 그저 갑자기 멜기님에게 뭔가 궁금해진 제이드님이

- 저 실습을 인천 쪽으로 나가는데 지하철 어디세요. 

 라고 물어보았다. 통상 이렇게 물어보면 '저희 집이 어디어디쯤이에요' 이거늘, 빨간 자국으로 개그 본능이 업된 사람들은 너도나도 멜기님의 멋진 입술(멜기님 앗흥^^)을 바라보며 다음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고, 멜기님은 역시나 멜기님이었기에 간단하게 

- 제가 무슨 노숙자도 아니고, 지하철이 어디라뇨! 

 이 사건은 왜곡 망말의 대가 승주나무님에 의해 조선일보식 경마 보도로 행여 못들은 분들에게 생생중계가 되고, 승주나무님은 저 산 위의 소나무처럼 고고한 매무새로 말씀하셨지요. 

- 여러분의 위선을 정직하게 번역해주는 것 뿐입니다. 

 이 말이 여기서 나오는게 아닌데 갖다 붙여쓴걸 보면, 잠잘 시간이 됐다는 얘기 같아요. 한편으로 끝내려고 하는데 

하이쿠처럼, 

한줄은, 한 페이퍼는 너무 짧은걸요.  

2편을 기대하며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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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2-17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크 마구 상상하며 읽고있어요. 렌초님이 좀 한 말빨 하지요 ㅋㅋ

푸하 2009-02-17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재밌네요.^^:
참, 맛깔나게 그상황을 정리하시네요.

2009-02-17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09-02-17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알고 계셨군요
푸하님,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힘을 내서 다음편으로 완결을 내겠습니다요.
속삭이신님, ^^

승주나무 2009-02-18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가 많이 나오네요ㅋㅋ. 마지막 그 말은 진심입니다. 다들 취해 있는데 나만 깨어 있는 것이라구욧!!

Arch 2009-02-18 11:18   좋아요 0 | URL
허허, 그 말은 우리 취하기 전에 했거덜랑덜랑요. (저 건들건들하니까 무섭죠?)
 

 먹을 곳이 마땅치않아  가방 속에서 잠자고 있던 사과랑 배를 주섬주섬 꺼냈다. 지하철역 안의 미세먼지가 떠올랐지만, 먹고 죽음 때깔도 좋단 얘기로 패쓰했다. 유리할대로 환경을 갖다 붙이긴! 옆에 학생으로 보이는 친구가 있길래 같이 먹자고 했더니, 

 대뜸 다이어트 하냐고 묻는다. 글쎄요, 워낙 자신있는 몸이라 다이어트는 생각해본적이 없다고 뻥을 치려다 그냥 웃고 말았다. 먹고 죽을 것도 없어서 다이어트 못해요. 생활고로 자진 다이어트가 된다는 말도 쑥 삼켜버렸다. 그냥 사과를 먹는 것 뿐이라고. 

 원래는 이렇게 할머니들처럼(난 할머니 정서가 좋다.) 뭔가를 싸가지고 다니거나 주섬주섬 꺼내는 사람들을 보면 젊은 처자들은 웃고, 젊은 남정네들은 비웃고, 좀 더 세련된 누군가는 기겁을 하고, 아저씨들은 기특해하고, 우리 아빠는 창피해하는데 이 친구는 반가워하면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사과를 먹는다. 그리곤 열차가 오자 잘 먹었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가는데 

 저만치 가는 그 아이 뒤통수가 참 야무져보였다.  

 주는건 별거 아닌데 받는건 참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아인, 쿨하게까지는 아니어도 멋지게 잘 소화해냈다. 십점 만점에 헤픈 웃음 두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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