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은 좀 다른 사람이다.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다가도 막상 누군가가 짖궂은 농담을 걸어오면 정색을 하기 일쑤고, 누구라도 흥분될만한 공격을 퍼붓는대도 결코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평소에 미모와 유려한 말솜씨, 그윽한 눈빛 등등 자기 자랑은 빠짐없이 하면서, 연애에서의 자기 입장은 다자망이라고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연애경험이 없다고 적적한 흉내를 낸다. 연기를 못하기에 흉내라는걸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다. (아니아니, 사실 내가 좀 눈썰미가 있다.)
그런데도 M을 볼 때마다 나는 참말로 기분이 좋아진다. M의 말랑말랑한 말투와 까슬거리는 입매무새, 자연발생적으로 창의성을 담보받아 나오는 언어와 한번씩 잽으로 날려주는 반말 비스무레한 어투까지. 손으로 꼽으려면 손가락이 25개는 더 늘어나야할 정도로 많은 M의 까칠한 면모를 아는데도 그가 좋다.
그래서 반쯤은 반하고, 반쯤은 살랑살랑대는 기분으로 그에게 말해보았다.
-멜기세덱님,(이번엔 진짜로 제대로 썼어요!) 멜기님이 아저씨 같아서 참 좋아요.
그럼 당연히, 혹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그럼요, 저도 아치님의 단어 선택이 맘에 쏙 들어와요'. 이럴줄 안 건 아직 내가 사회적 언어에 대한 감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멜기님은 불현듯 한옥타브 말을 끌어올려 자신이 아저씨가 아닌 이유를 설명하셨다. 네네. 그런데 느닷없이 아프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하고 자신과 푸하를(왜 푸하님은! 전에 맥주를 뒤춤에 낑겨가지고 갖고 온 잔상?) 아저씨를 부르는 것의 차이, 아저씨란 어법에 도사린 자기 모함의 징후, 아저씨란 말은 사회적으로 단순히 '나이 들어보이는게 다다'란 것 뿐이라는 것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멜기가 아저씨가 아닌 이유'를 듣고 나자 그럼 이런걸 뭐라고 표현을 해야할지 궁금해졌다.
일테면
내가 진짜 아저씨라고 생각하는 배철수 아저씨가
오늘 임진모씨와 네버엔딩 팝스토리를 진행하면서 그래미 어워드 영화음악에 오른 곡들 중 B.J Thomas의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를 틀어줬다. 노래를 듣고나자, 배철수 아저씨가 자기가 라디오 진행하던 초창기 때, 비오는 날 이 노래를 듣다가 너무 짧아서 두 번 들었던 적이 있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임진모씨가 그래서 그때 청취율이 별로였구나라고 대꾸해주고. 청취율 가지고 두분이 한차례 말이 오갔다. 언제부터 내 방송을 들었느냐, 그런건 당신이 몰라도 된다, 등등. 그런 다음에 철수 아저씨가 다시 주섬주섬 이 노래를 또 틀려고 하는거다. 그러자 임진모씨가
- 아니, 뭐하세요. 진행하셔야죠.
- 가만히 있어봐요. 음악 틀어놓고 얘기해보게요.
- 혹시 90년대 시절이 좋았던거에요? 무슨 사연 있는거 아냐?
- 사연은 무슨, 임진모씨 목소리가 너무 까칠하고 팍팍하니까 목소리 좀 더 좋게 들릴까봐 트는거지.
그 뒤 두분은 다시 누구 목소리가 더 까칠한가를 놓고 얘기를 하셨다.
이런거. 가벼운 재치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죽일 듯이 이죽거리는 것도 아니고 딱 이만큼. 보기 좋고, 듣기 좋고, 대하기 편한 딱 이만큼.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탁구공처럼 툭툭 말을 주고 받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 이 사람을 곯려먹을까, 어떻게 재미있게 만들까를 고민하는 느낌. 내가 떠는 주접과는 다르게 뭐라고 하지, 아, 능청맞음. 아니, 이걸로도 멜기님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해 아저씨라고 한건데. 나이 들어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유쾌한 탄성으로 부딪쳐오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멜기님은 어찌됐든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저씨 금지령을 내렸다. 뭐, 맘 속으로만 생각해야지.
우르르 몰려간 술집에서 우리는 멜기님이 결혼 후 가사노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멜기님은 과연 이러이러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를 놓고 한참 투닥거렸다. 그러면서 다시 아저씨 생각이 절로 난게, 이 분은 정말 자신의 논리를 굳건한 성처럼 세워놓는데 다른 말들이나 의견도 성의 도랑과 문 사이사이로 스며들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논쟁과 상처란 권성우의 책 제목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논쟁 후에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 상처를 받고, 패인을 분석하고, 이를 바득바득 갈기도 하겠건만 우린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입장에서 억울할 수도 있는데 성문을 활짝 열어놓은 성주는 그저 여유롭기만 했다. 약간 샘날 정도로. 나였다면 성이고 뭐고 문은 쾅쾅 다 닫아버리고, 끙끙대며 곯머리를 싸맸을텐데. 이래도 정말, 아저씨 안 할거에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멜기님은 다른 분과는 정답게 악수를 하더니 가운데 있는 나를 쏙 빼놓은 적이 있다. 적잖이 민망해 슬쩍 내밀다가 만 손으로 허공을 향해 가로지르기를 하며 딴청을 피우다 왜 나랑은 악수를 안 할까, 처음봐서 그랬을까, 여자랑은 악수를 안 하기로 엄마와 약조를 했을까 등등 여러모로 이유를 생각해본적이 있다.
이번에도 헤어질 때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길래 나도 술김에 쓱 손을 내밀었더니 악수를 해주셨다. 이번의 악수는 조건반사적이었다. 뭔가 나오니까 나도 나가려니 뭐 이런. 비록 몇번 만나보지 않았지만, 난 멜기님이 이성과 악수를 하는걸 쑥쓰러워 한다는걸 눈치챘으니까. 이래도 아저씨 아니에요? 에~ 아저씨면 쑥쓰러운거 없는데? 그러니까 내 '아저씨'는 당신의 '아저씨'랑 다르다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