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내가 끼니를 거를 때가 있다니! 

  점심을 2시에 먹고, 9시가 다 되도록 사과 하나 먹은게 다였는데 배가 안 고팠다. 회사가 끝나고 노면에 살짝 눈이 낀 거리를 걸었다. 바닥의 물기가 맘까지 전염이 되는지 불현듯 예전에 알바 끝나고 애썼다며 늦게까지 잠을 안 자고선 기다렸다가 설렁탕을 같이 먹은 그 사람이 생각났다. 분명 보고싶은 마음에 울컥했는데 눈물도 안 나오고, 그가 저질렀던 만행이 기억폴더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바람에 그저 좋은 추억들 연필심 꾹꾹 눌러가며 적어내려가자란 생각을 해가며 씩씩하게 집으로 향했다. 씩씩하게 걷다보니 위도 갑자기 운동을 시작했는지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다...  

의욕적이고 기세등등하게 배가 고프다.

 그래, 뭘 원하지? 김치찌개? 아니. 라면? 윽 별로. 그럼 없는데. 그냥 율무차로 때워. 아니 넌 어떻게 먹을걸 때우는거라고해. 따라해봐, 먹을건 신성한거라고! 신성한... 먹거리. 

 떠오른다, 떠올라. 우선은 노란색. 잘 된 밥에 들척한 국물, 부드럽게 익은 감자에 동글동글 씹히는 당근. 보들거리는 고깃살에서 배어나오는 육즙과 독특한 향. 침이 꼴까닥 넘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왕성하게 배고픈데, 게다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걸 만들고(만들줄은 아냐고? 물론 안다. 알고만 있다. 왜, 조리예 다 나오잖아.) 앉아있을 수는 없어! 그래서 신성한 한끼를 위해 레토르트 카레를 샀다. 오~ 레토르트 만세, 만만세. 

 안 돼, 안 돼 너무 허겁지겁 먹다가 체할 수도 있어. 그래놓고 또 부대끼면 말짱 꽝이란 말이야. 허겁지겁은 안 돼. 안 돼. 하지만 내 손은 벌써 수저를 집고 미친듯이 카레 얹은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물론 상상했던 그 맛은 아니었다. 모든 알갱이들을 레토르트화 해버린 카레의 질감에, 전자렌지에 돌렸더니 푸실거리는 밥알갱이. 하지만 상관없었다. 왜냐면 난 배가 고프니까. 수저 가득 노란 카레밥을 담아 잘 익은 김치를 올려놨다. 보고만 있어도 침이 고여 침이 넘어가기 전에 잽싸게 한 입. 그리고 다시 또 한 입. 씹지도 않고, 입에서 한바퀴 카레를 돌린 다음에 미뢰 곳곳에 맛과 향만 살짝 간보이고 다시 한 입. 말 그대로 게 눈 감추듯이 한 그릇을 뚝딱. 

 어어. 그런데 배가 부르지 않다. 나는 다시 전자렌지를 향해 역전의 용사처럼 돌진했다. 다시 카레를 덥혀 처음과 마찬가지로 수저의 면적을 초과하도록 밥을 꾹 눌러 담은 채 입에 넣었다. 카레밥을 떠서 다시 입에 넣고, 김치를 아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씹고... 얼마쯤 그랬을까. 속도는 늦춰지고 슬슬 동공이 풀리고 문득, 아주아주 편안하고, 황홀하고, 나른해져서 그만 정말 딱 1.3초 정도 

 이거, 천사가 되는거 아냐? 

란 생각이 들었다. 뱃살 천사이거나 먹다 죽은 천사 이쯤이겠으나 이토록 허겁지겁에 걸맞는 식탐과 식욕 등등의 맹렬한 의지를 요근래 느껴본적이 없어, 천사라면 이렇게 짧고 찌릿하게 행복해요 하겠구나 싶어진거다. 맵고 흥분되는 맛을 좀 더 음미했다. 입에 콸콸콸 물을 들이붓는 상상, 얼음을 와직와직 씹는 상상, 그냥 계속 매운채로 놔두고 싶은 새디즘적인 욕망까지. 율무차를 걸죽하게 타서 호두며 잣 알갱이들을 성큼성큼 씹어댔다. 그리고 다시 짧게 거친 0.5초 동안 다시 행복한 기운이 몸 가득히 퍼져 딱 한모금만 자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오늘 밤은 다른 어느 때보다 앤의 이 구절에 동감과 지지를 보낼 것만 같다. 아울러 나는 침대에 쵸코 쿠키 따위는 가져오지 않을거야란 대범한 약속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왜냐면, 난 이제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배가 부르니까. 

서재 결혼시키기 139p 

키츠, 그의 친구 찰스 웬트워스 딜크에게 보낸 편지 

쾌락에 대한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 순간 나는 한 손으로는 글을 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숭도 복숭아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다네.  

정말 얼마나 맛이 있는지. 

부드럽고, 걸쭉하고, 질척거리고, 즙이 새어나오고. 

그 맛있는 살이 마치 축복받은 커다란 딸기처럼 내 목 안에서 녹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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