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 아내폭력에서 탈출한 여성들의 이야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30
한국여성의전화 지음 / 오월의봄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대 중반, 일하다 친해진 언니네 집에 자주 놀러간적이 있다. 언니는 남자친구랑 같이 살고 있었다. 무슨 얘기 끝엔가 언니가 자신과 남자친구는 자주 싸우며 가끔 남자가 자길 때릴 때도 있다고 했다. '때린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장난으로 그러는거야'라고 되물었다. 언니는 남자가 자기를 어떻게 때리고 어느 순간 폭발하는지 얘기해줬다. 어떤 느낌인지 상상이 안 갔다. 일찍 집을 나와 혼자 살던 언니가 유일하게 의지한 사람이 폭력을 행사하고 언니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나는 폭발할 때까지 남자를 밀어부치진 말아야 한다는 콩인지 된장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언니는 심상한 분위기로 자신의 성격도 그렇지 못해서 결국 사단이 난다고 했다. 나는 그때 '아, 남자를 밀어부치면 안 되겠구나. 폭력적인 놈을 만나면 안 되겠구나, 언니 불쌍해서 어쩌지.'라고 생각했다.

 

 너무 심하게 때려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죽은 듯 매질을 견뎠다는 고모. 아빠의 폭력을 피해 맨발로 도망친 엄마. 열 손가락을 다 채울 정도로 도처에 매맞는 여성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혼하면 되는거 아냐? 아이 핑계로 왜 사는건데,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안 돼서 그러는거 아냐. 왜 그런 남자를 만났대. 도처에 뿌리내린 가정폭력보다 내 시각이 더 폭력적이었다. 엄마에게 그렇게 살지 말고 이혼하라고 했지만 엄마가 그 시기를 견딘 덕분에 화목한 가정까지는 아니어도 여전히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 둘 사이를 가로막는 모순에 맘 한켠이 싸해진다. 가정폭력은 신체적 폭력뿐 아니라 관계와 편견의 폭력이라 다시 새롭게 살겠다고 선을 그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기에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이제서야 알게 됐다.

 

 가정폭력 생존자들의 '여성 살해의 현장에서 탈출한 여성들'은- 본 제목보다 정희진 선생의 개인적 의견이 더 나아 리뷰에서는 이 제목으로 책을 지칭한다- 가정폭력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수기이다. 가정폭력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그래도 되니까 하는 것 뿐이다. 집 밖이었다면 당장 고소 당하고 형사 입건 할 사건을 집 안에서는 집안일이라며 쉬쉬하고 넘긴다. 가정폭력에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해결을 하고 가해자를 구속한다면 어떨까. 구속을 넘어 무조건 감옥에 가야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면? 아마 엄청난 분노조절장애 배우자도 상대방을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타인에게라면 어떻게 저러나 싶을 행동들을 나는 a에게 한다. 했던 말을 다시 되물으면 불같이 짜증을 내고 얘기한대로 하지 않으면 눈을 부라리며 a를 공격한다. a의 유일한 낙은 술 먹는 것이고 자신도 나처럼 화내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같이 살지 못하니까 참는다고 했다. 나는 아빠를 꼭 닮았다. 아빠가 일하고 와서 쉬는 편안한 집, 내키면 가끔 청소 한번씩 하면서 생색내는 집에서 12시가 넘도록 열무김치를 담그는 엄마가 꼴보기 싫어 집에 잘 가지 않는다. 나와 가정폭력 가해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무엇이 내가 그래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했을까.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마냥 거리를 두면서 성찰할 수가 없었다. 나 역시 관계를 무기로 다른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으니까.

 

 언니를 다시 만난다면 언니와 그 남자를 떼어놓고 싶다. 언니 잘못으로 그놈이 도발하는게 아니고 그놈은 원래 그런 놈이라고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a를 비난하는 대신 나부터 잘해야겠다. 집안일 개미지옥에서 벗어나 유연한 시선으로 타인을 대하고 싶다.

경험은 겪은 것이 아니다. 선택적인 기억이다. 경험은 철저히 정치적인 것이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의미화하는가, 내가 겪은 일은 어떤 것인가. 경험은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길 때, 비로소 ‘떠오르고‘ 인지되고 해석된다. 남성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자기 경험을 바라볼 수 있는 렌즈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 삶을 장악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 경험을 믿지 못한다. 자기가 겪은 일을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 나도 그랬다. 가부장제는 모든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다. 가해 남성들과 상당하다보면, 자기가 저지른 일을 남의 얘기인 양 비웃고 ‘동료‘를 비난한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이 겪은 폭력이 훨씬 심각한데도 ‘덜 맞은‘ 여성들을 보며 놀라고 걱정한다. 경험, 몸, 인식의 분리 속에서 우리는 생각할 능력을 상실했다.

8p

여기 실린 여성들의 글을 유심히 읽으면, 문장과 문장 사이가 떠 있음을 깨닫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연결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글이 ‘비논리적‘으로 보인다. 이런 문장은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데 일조한다. 왜일까. 내 해석은 이렇다. 녹취록처럼 가해 남성의 행동을 상세히 묘사해도 문장들 사이가 연결되지 않고 ‘뭔가 말이 안 된다‘. 그것은 남성들의 행동이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들을 이해하려고 해도, 도무지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 왜 때리는가? 이런 질문이 바로 폭력이다.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때릴 수 있으니 때리는 것뿐이다.thdy do because they can. 단지 그 뿐이다. 대신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왜 사회는 여성의 경험을 믿지 않는가? 왜 국가는 이 문제를 사소하게 다루는가? 왜 우리는 언제나 이 문제가 ‘사소하지 않다‘고 외쳐야 하는가?

9p

나를 사로잡고 있던 두려움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에게도 가정성공신화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고 이혼을 내 인생의 실패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나의 유리거울이 깨져서 내 모습이 찌그러져 보이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남편이 마치 장애를 앓고 있는 자식처럼 여겨져 차마 버릴 수 없었다는 것도 알았다.

88p

지난 상처는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이라고. 묶어두기만 하면 언젠가는 빵 하고 터지는데 터지고 나면 수습하기가 더 힘들다고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남편의 끊임없는 강박적 요구에 내 마음속은 미움과 두려움이 쌓였는데, 그런 감정들을 표출하지 못하고 억압하고만 있었으니 속에서 그것들이 상하기 시작했다. 얼굴은 웃고 있어도 늘 어두웠고 가슴은 항상 답답했다. 나는 쉼터에서 그것들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압력을 빼듯이 내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고 이해하면서 상처를 치유했다. 차츰 마음이 시원해짐을 느겼다.

89p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7-19 0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3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일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나는 재생산 노동을 하고 어쩌고 20개월 가까이 아기를 온전히 돌봤는데 좀 쉬면 안 되나 어쩌고 해도 내심 맘이 조급해졌다. 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입으로 계속 주장하는 '일' 말고 남들이 알아서 인정해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현실적인 잣대대로 살지 않겠다며 날을 세웠는데 그 잣대대로 스스로를 평가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 일하고 싶다며 떠들길 며칠. 마침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가 났다. 당장 하겠다고 했다. 먼저 하던 사람이 취업 최종결과가 안 나와서 대기를 해야하지만 만약에 하라고 하면 할거냐는 추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나는 급했다. 네네. 어쨌든 한다니까요.

 

 일주일 넘게 기다리다 그 사람의 취업확정과 동시에 일을 시작했다. 문서와 책 등의 자료를 목록화하는 작업이었다. 신났다. 시간이 돈이 되고 내 쓸모가 됐다. 시답잖은 농담에 활기가 넘쳤고 흰소리 듬뿍 담아내는 점심시간도 즐거웠다. 여느 직장 다니는 사람처럼 같이 먹는 점심이라니. 평소라면 툭툭 받아쳐냈을 말들을 주워삼키며 네네 그렇죠, 그럼요 모드가 됐다. 그러길 고작 하루. 다음날부터 지루해 죽겠는거다. 지금 하는 일은 돈이 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의례적인 말은 의례적이라 질색이고 점심시간은 따분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이렇게 바닥을 툭툭 치고서야 과연 어떻게 사는게 나다운건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주위 여성들이 임신 출산으로 생존단절(경력단절) 경험 후 밟는 비슷한 수순의 일들. 그 일 하나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저 멀리 달아났다. 보람을 느끼고 어느 정도 돈도 되고 재미있는 일. 그런 일이 있을까. 돈 안 돼도 좋으니까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은 있을까. 주부란 타이틀을 내걸고 노는걸 한번도 상상해본적이 없다. 남아도는 인력이 돼서 이곳저곳 불려다니고 언제든 불러다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돈벌이는 돈벌이 자체보다 지금 상황을 벗어나는 수단이었다. 돈을 벌어서 흔한 여행 한번 가고 싶다는 꿈도 꾸지 않았는걸.

 

  단순하고 의미없는 작업이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나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어쩌면 내가 했던 일은 잠시 머물렀던 기관의 자료 목록화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큰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의미가 없었다. 여전히 근사한 것, 대단한 것, 멋진 것을 막연하게 희망하면서 나에게 의미있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욕심이 너무 많아 선택을 못하면서 선택 못한 것들에서 흠을 찾아낸다. 고등학교 때 일기장에 썼던 그 마음에서 어떻게 한뼘도 자라지 않은걸까.

 

 밤이 깊어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사는 곳은 두 부류의 인간형이 있다. 가치와 이상을 우위에 두고 살지만 생활에선 살짝씩 마이너한 사람들(a)과 고정관념을 온몸으로 재현하지만 관계에서는 편하고 너그러운 사람들(b). 명확하게 구분되는 기준은 아니다. 분류하고 규정하기 좋아하는 성격상 나눠본거지 두 부류에 걸쳐 있는 사람도 있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다. 기준 자체가 똑 떨어지는 건 아니다.

 

 아이가 머리카락을 잘랐다. 아이는 갓난아이때부터 머리카락이 잘 안 자랐다. 그동안은 별로 없는 머리카락을 위로 하나, 양쪽으로 하나씩 세개로 섹션을 나눠서 묶어줬다. 꾸미기 좋아하는 이모들 영향이었는데 나도 아이가 이렇게 머리를 묶는게 좀 더 예뻐보여서 계속 고수했다. 그런데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라 같이 있으며 아이의 풀린 머리를 다시 묶어줄 때 이상한걸 느꼈다. 아이 머리를 묶어주자 남자 아이가 자기도 묶어주라며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고 내게 왔다. 남자아이의 머리를 묶는데 어느 순간 놀이방에 있는 아기들의 머리가 보였다. 여자아이들은 길든 짧든 머리를 묶고 있는데 남자아이들은 짧은 머리였다.

 

 왜 성별을 구분짓는데 여자아이들이 수고를 하는걸까. 안 그래도 분홍분홍하고 거추장스러운 레이스 스커트를 입는데 머리까지 묶고 여자란걸 드러내야할까. 간단하고 깔끔한 짧은 머리는 왜 남자들에게만 허용될까. 언젠가 페북에서 본 글도 생각났다. 신생아의 여남 구분을 위해 머리카락도 없는 여자아이의 머리통에 리본을 꽂는게 크리피하는 글. 맞아, 진짜 뭐지? 아침마다 머리를 묶겠다는 실랑이며 연약하고 보호받아야하는 공주 여성상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기의 머리카락을 잘라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b그룹은 아이 머리 스타일을 두고 남자같다, 왜 잘랐대, 숱이 더 없어보인다며 뇌에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 말했다. a그룹은 아치와 아이 머리 스타일이 멋지다고 칭찬한다. 그래서 하소연처럼 얘기했다.

 

- 다른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말을 해요.

- 그런걸 왜 신경써. 나만 아니면 되지.

 

 통찰을 담고 있는 뉘앙스였지만 말인지 된장인지 모르겠다. 신경 안 쓰면 되는데 왜 그 많은 명절증후군이 생겼으며 사람들이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단 말인가. 그분의 단언이 헛헛해서 웃었는데 긍정의 의미로 느꼈나보다. 계속 얘기하려고 해서 슬쩍 자리를 옮겼다.

 

 아이가  머리카락을 자른 후 보인 반응은 두 그룹의 성향차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두 사회의 교차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a그룹에서 내가 사는 모습은 너무 당연하데 b그룹에서는 특이한 경우가 된다. b그룹중 한명은 a그룹이 너무 개성이 강해 사람에게 배려하는데 서툴다고 단언을 한다. 대화를 할 때는 가치관이 맞는 사람이, 생활할 때는 고정관념에 충실한 사람이 좋다. 영혼과 세속, 분별할 수 없는 언어들이 튀어나온다.

 

 어쩌면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청개구리 습성과 여전히 특별하고 싶은 욕망? 같은걸 버리지 못한 내 존재가 두 세계를 구분하는 가장 큰 지표인지도 모르겠다. 신경쓰지말라니, 진짜 그게 말이야 된장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나른한 이불에서 썼 듯 누군가 맹렬하게 부러운 날이 있다. 나는 그럴만한 능력과 배짱과 용기가 없는데 내가 원하는걸 쉽게 얻고 쿨한 태도까지 겸비한 누군가.

 

 그런데 며칠 내가 좋아하는 언니와 부러운 누군가를 비교해봤더니 부러움의 정체가 좀 더 선명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언니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나는 언니를 좋아하고 부럽지만 부러움이 좋아함을 압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니의 약함과 한계, 나와 비슷한 면모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부러웠던 건 부정의 기운이 하나도 비치지 않는 평온하고 신나는 일상을 전시해서인건 아닐까. 세련된 포장방식이 나같은 사람을 낚는건 아닐까. 아, 이런식으로 정신승리하는걸까.

 

 * 연기 수업을 받고 있다. 나는 집안일을 안 하는 남편역을 맡았다. 내가 주로 맡는 역은 누군가를 구박하거나 삐딱선을 타는건데 이런건 즉흥으로도 곧잘 한다. 내가 어려워하는 연기는 예쁘거나 순진한 사람, 아무 의심없이 다른 사람을 믿는 역할이다. 이건 고도로 의식적인 집중력을 보여야 한다. 암튼 남편 역을 하는데 즉흥으로 하는거라 연기할 때랑 실제 다른 친구들 앞에서 하는게 조금 바뀌었다. 원래는 (집안일 안 하는 남편과 갈등-> 아내의 고민-> 6년 후 남편에게 아기 맡기고 쿨하게 외출하는 아내) 이런 식이었는데 아내 역할을 맡은 분이 다른 대사를 날렸다.

 

 '나 갔다올게' 이러고 가면 되는데 '여보, 당신 집안일 좀 해.' 이렇게 돼버린거다.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남편이라 되는대로 말을 했는데 '여보, 당신은 6년째 어떻게 한결같냐'였다. 순간 빵터져서 상황이 그게 아닌데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6년째 참으로 끈질긴 남편이구나, 어떻게 6년째 지치지도 않고 비슷한 주제로 싸우나. 집안일은 정해져있는데 아직 남자가 어떤 역할을 맡아야하고 어느 정도 해야할지는 공식적인 기준이 없다. 대개 이럴 때 다른 사람들의 가사, 육아 기여도를 듣고 상대방의 노동 수준을 가늠하는 정도.

 

 연기를 하면서 느낀게 와, 그 눈치와 염치없는 순간을 계속 당하면서 꿋꿋하게 집안일을 안 하고 TV를 보는 남성의 정신력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주변 엄마 중 다시 돌아갈 일자리가 있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다. 대부분 전업이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한다. 나는 다시 돌아갈 곳이 있는 엄마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게다가 육아휴직을 3년이나 할 수 있어 아기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일년 정도 아기를 본다고 하는 순간 다시 샘이나서 어쩔줄 몰랐다. 그런데 일하면서 아기를 돌보는 엄마의 고충은 말해 무엇하나. 맞벌이인데도 여전히 육아,가사노동의 남성 기여율은 차이가 없고 엄마들은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전업주부가 편한 건 아니다. 끊임없이 자기존재를 증명해야만하는 기로에 섰다. 얼마 전에 엄마들이랑  아이스브레이킹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나눈적이 있다. 대부분 하고 싶은 일로 무슨 자격증 따기, 집안 정리 잘하기, 다이어트가 들어가 있다. 나는 남자인 a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세상에, 세계여행이라고 한다. 꿈조차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해졌다. 어렸을 때 나를 설명하는 명함 하나가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 다시 명함 없는 삶으로 돌아왔다. 나는 전보다 잘 지내고 있는걸까.

 

* 하, 아기 올 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린이집 차에 아이를 태워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윗층 엄마를 만났다. 집에서 차 한잔 하자며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윗층 엄마는 여전히 아이 돌보는게 어렵다고 했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를 어떻게 보는지 다들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아이를 너무 일찍 어린이집에 보낸 건 아닌지, 아이 편식이 심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을 했다. 나는 윗층 엄마가 잘하고 있고 좀 더 확신을 갖고 아이를 대하면 좋겠다고 얘기해줬다. 아이는 엄마 뿐 아니라 자기 기질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성장하는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윗층 엄마한테 한 얘기지만 실은 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아빠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아이에게 양가감정과 죄책감을 느낀다. 육아로 감정과 정신, 육체가 닳을대로 소모되지만 ‘좀 더 잘해야하는데, 좀 더 잘할걸’ 같은 내면의 다그침을 듣는다.

 

 ‘부모로 산다는 것’에 보면 아이와 놀 때 아이의 세계에 빠져서 함께해야만 진정으로 놀았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나온다. 그녀는 탈진할 정도로 아기에게 맘을 쏟지만 이내 다 마치지 못한 집안일과 아기를 낳기 전 누릴 수 있었던 작은 일상을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맘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아이 입장에서 야속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육아의 전형에 빠지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내 시간을 갖으려고 a와 싸웠고 사회가 압박하는 ‘좋은 엄마’상을 거부했다. 육아의 굴레에 틀어박혀 나를 소진하며 유일한 희망으로 ‘자식의 성공이나 행복’ 같은걸 바라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고비가 있었다. ‘그 어린애를 어린이집에 맡겨? 엄마가 노는데 좀 더 보면 되잖아.’ ‘ 요즘 엄마들은 애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거저 본다니까.’ 란 공격적 말에 웃으며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 근력을 키웠지만 마음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아기가 침대로 올라와 부스럭거리며 내가 전날 밤 읽던 책을 뒤적였다. 언제 이렇게 커서 침대 위까지 올라오니, 너무 작아서 안는 것만으로 아스라했는데 언제 이렇게 컸니.

 

 아이는 금세 자랐다. 하루는 길고 길었는데 아이의 성장은 눈깜짝할새 이뤄졌다.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놀아줬어야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손목이 아프고 어깨가 빠질 것 같아도 더 안아줄걸. 나는 좋은 엄마였을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평온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맘이 미어졌다. 아침 댓바람부터 엉엉 우니까 a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장난을 쳤다. 아이 보고 엄마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물으니 아이는 내 얼굴을 쓱 만지며 배시시 웃는다.

 

 어린이집에 다녀온 아이는 차에서 내려 나를 덥석 안는다. 조금 더 안아주고 싶은데 야옹이를 보겠다며 나를 밀어낸다. 지금부터라도 두려움 없이 장난처럼 아이를 많이 안아줘야지. 그리고 계속 나는 잘하고 있고 괜찮다고 얘기해줘야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꿈꾸는섬 2017-06-23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잘 하고 계시는 것 맞아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해요.^^
아이는 정말 쑥쑥 잘 커가요.^^ 걱정 안 하셔도 되고 정말 괜찮아요. 많이 안아주는 것 정말 필요하죠.^^

Arch 2017-06-24 00:05   좋아요 0 | URL
아기를 돌보며 자아가 분열되는 느낌이... ㅋㅋ 페이퍼가 혼란해도 이해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