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일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나는 재생산 노동을 하고 어쩌고 20개월 가까이 아기를 온전히 돌봤는데 좀 쉬면 안 되나 어쩌고 해도 내심 맘이 조급해졌다. 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입으로 계속 주장하는 '일' 말고 남들이 알아서 인정해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현실적인 잣대대로 살지 않겠다며 날을 세웠는데 그 잣대대로 스스로를 평가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 일하고 싶다며 떠들길 며칠. 마침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가 났다. 당장 하겠다고 했다. 먼저 하던 사람이 취업 최종결과가 안 나와서 대기를 해야하지만 만약에 하라고 하면 할거냐는 추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나는 급했다. 네네. 어쨌든 한다니까요.

 

 일주일 넘게 기다리다 그 사람의 취업확정과 동시에 일을 시작했다. 문서와 책 등의 자료를 목록화하는 작업이었다. 신났다. 시간이 돈이 되고 내 쓸모가 됐다. 시답잖은 농담에 활기가 넘쳤고 흰소리 듬뿍 담아내는 점심시간도 즐거웠다. 여느 직장 다니는 사람처럼 같이 먹는 점심이라니. 평소라면 툭툭 받아쳐냈을 말들을 주워삼키며 네네 그렇죠, 그럼요 모드가 됐다. 그러길 고작 하루. 다음날부터 지루해 죽겠는거다. 지금 하는 일은 돈이 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의례적인 말은 의례적이라 질색이고 점심시간은 따분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이렇게 바닥을 툭툭 치고서야 과연 어떻게 사는게 나다운건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주위 여성들이 임신 출산으로 생존단절(경력단절) 경험 후 밟는 비슷한 수순의 일들. 그 일 하나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저 멀리 달아났다. 보람을 느끼고 어느 정도 돈도 되고 재미있는 일. 그런 일이 있을까. 돈 안 돼도 좋으니까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은 있을까. 주부란 타이틀을 내걸고 노는걸 한번도 상상해본적이 없다. 남아도는 인력이 돼서 이곳저곳 불려다니고 언제든 불러다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돈벌이는 돈벌이 자체보다 지금 상황을 벗어나는 수단이었다. 돈을 벌어서 흔한 여행 한번 가고 싶다는 꿈도 꾸지 않았는걸.

 

  단순하고 의미없는 작업이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나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어쩌면 내가 했던 일은 잠시 머물렀던 기관의 자료 목록화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큰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의미가 없었다. 여전히 근사한 것, 대단한 것, 멋진 것을 막연하게 희망하면서 나에게 의미있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욕심이 너무 많아 선택을 못하면서 선택 못한 것들에서 흠을 찾아낸다. 고등학교 때 일기장에 썼던 그 마음에서 어떻게 한뼘도 자라지 않은걸까.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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