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다섯 시 반이다.
양치만 하고 모자를 챙겨 나오다
건넌 방에 기별을 넣어본다.
아무개야
피곤하면 혼자 간다.
득달 같이 일어나 나온 친구와
사과 반 개를 깨물며
인근의 가장 큰 오름으로 향한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 올랐던 기억이 가물한데
쉽지 않았단 각오를 하며 초입에 들어섰다.
이미 일출맞이를 하고 내려오는 무리의 사람들과
맞닥뜨리며 한 계단 한 계단 숨을 고르며 오른다.
익숙해서 큰 호기심이 없던 곳
관광객들에 몸살을 앓는 다는 곳
일출 무렵 6시경의 그 곳은 조용하고 그윽하다.
아 여기가 이런 이런 곳이었구나
바다 쪽으로도 육지 쪽으로도 한참을 바라기하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데
아침 무렵 집 주변에서 우는 작은 새를 만났다.
소리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지는 못했는데
어찌나 몸집이 작은지 나뭇가지도 아니고
넝쿨 끝에 앉아 있을 수 있을 정도다.
조금만 가까이 보면 이름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쉬운 마음에 또 한참
새 소리는 언어화가 안되는구나
음향을 문자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구나 생각을 하며
저 소리를 사람의 목소리로 전달하려면
어떻게 하지? 방법이 없을까?
포기하고 내려오는데 이제 끝물이어 향기가 가신
마삭줄과 맞닥뜨렸다. 주변엔 인동 천지다.
아. 일주일쯤 전에 여기 온 사람들은 향기까지 끝내줬겠구나. 일주일전 향내를 되집어보다보니
금방 출발점이다.
해는 좀 더 솟았지만 여전히 옅은 구름 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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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모두가 말리던 연애를 끝내고 수척해진 얼굴을 한 친구가 내 앞에서 한숨을 쉰다. 그 외로운 얼굴 안에는 끝까지 가봐야만 알 수 있는 것, 세차게 깍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상처 가득한 친구의 얼굴을 흘끔거리며 생각했다. 이 얼굴이 그리워지는 날이 오겠지. 이러다 어느 날 불쑥 또다시 사랑에 빠질 때가 오겠지. 그러면 나는 또 한 번 말없이 기다려야겠지.
어쩌면 내가 먼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이 친구가 나를 기다려줄 것이다. 그러라고 친구가 있는거다. 친구는 ‘기다려주는 사람‘의 또 다른 말이니까.
p.212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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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숲, 시퍼런 바다, 강렬한 태양이 전부인 세상에서 사는 것은 차라리 시간을 잊는 일이다. 어떤 추억도, 어떤 바람도, 이곳에서는 감정의 얼개들이 맥없이 삭아내려 풍화되고, 들끓던 사념들이 퇴색해 욕망의 본질만이 남는다. 그렇게 시간이 맞춰지고 사념이 단순화되니 사람 일에 필히 동반되는 먹고사는 문제들이 나를 어쩌지 못한다. 먹고사는 건 그냥 되는 일이었다. 사람 속에서 사람과 살면 여유 있을 때는 나누어주고 어려울 때는 받으면 되니, 사람한테 있어 먹고사는 일이 꼭 전부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곳에 살면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용서하고 내가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내 존재만큼의 기쁨만 느끼고 내가 닿지 못하는 것들은 그냥 그곳에 두고 무심해지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도 해버렸다.
p.164<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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