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회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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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히 둘러쌓인 견고한 벽. 읽으면서 끊임없이 연상되던 답답함이 자꾸 머릿속에서 철제 벽으로 그려졌다. 현실과 책임에 대한 두려움과 지켜내기 어려운 정직함 사이에서, 개인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텐데, 하물며 회사라는 상하구조가 확실하고 수십명, 수백명의 밥줄이 걸린 곳에서 그런 결정은 어떨까. 대부분은 두려움에 손을 들고 현실과 타협하려 들 것이다. 그만큼 먹고사는 문제는, 위태로운 명예와 더불어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문제가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를 벗어나 타인들에게 실질적인 피해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면, 정의로운 누군가는 총대를 매기 마련이다. 그 총대를 매는 사람마다 족족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윗 선들의 판단으로 변두리 한직으로 밀려나지만. 이케이도 준은 사내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사고와 은폐를 연관된 사람들을 하나씩 엮어가며, 정의로운, 혹은 가끔 사사로운 복수심에 불타서 정의로 위장한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회의”들과 그들 개개인의 이야기로 레이어를 천천히 추가해 나간다. 끊임없이 밀려나고 권위와 권력의 벽에 부딪히지만, 그들이 그런 답답함의 연속에서도 결국은 끝까지 싸워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내부고발자로 손가락질 당하더라도 끝끝내는 “가치”를 지켜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그래도 약간의 희망을 갖게 해준다. 론, 픽션이니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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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야간열차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8
다와다 요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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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단어로 축약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시도해본다면 현대미술적인 소설집이라고 하겠다. 언어 사이의 괴리, 표현의 차이와 그로 인해 발생되는 전혀 다른 관점들, 그 안에서 비틀어내는라는 정체성. 관점 자체에 대한 의문을 품고 기존에 당연시되던 것들을 뒤집고 질문하고 비틀어보는 느낌이다. 내가 그걸 온전히 이해했다고 인정하지는 못하겠다, 독일어나 일본어로 된 원문을 내가 읽고 이해했다면 조금 더 나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언어유희와 유럽어-아시아언어 사이에서의 -당신이라는 관계 등 이 책 저변에 흐르는 변주곡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분리되어 붕 뜬 그 느낌마저도 좋았다. 기차라는 현대적 시점에서 보면 비효율적인, 하지만 조금 더 인간적인 매체를 통해 제공되는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과 발 밑으로 흐르고 있는 고정되지 않는 공간. 그런 질문을 던지기에 적절한 테마이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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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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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By 히가시노 게이고

짙은 나무향과 사찰에서 날 법한 향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말보다 조금 더 깊고, 넓고, 사적이고, 추상적인, 그야말로 책에서 표현하듯 문답무용의 그 염원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더 와 닿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많은 전작 중 하나이자 현재 국내에서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어느 정도 궤를 함께 하는 테마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 책이 이 작가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시간을 초월해 전달되는 편지라는 매개체가 이번에는 조금 더 깊은 이라는 조금 더 개념적인 미디엄으로 작용한 것 같다. 항상 말이나 글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 부족함에는 주로 내 능력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보다 이 2,3 차원의 표현 방식 내에는 높은 차원의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 정도로 밖에 표현이 안된다. 이 책이 나로 하여금 그 표현불가한 무엇인가에 그나마 조금은 생각을 닿게 해준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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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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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by Amor Towles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면 환경에 지배당할 수 밖에 없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이 메세지는 모스크바에 남아있는 어쩌면 유일한 구시대의 인물인 로스토프 백작의 삶을 가장 잘 요약하는 구절이 아닌가 싶다. 그는 크다면 크고 좁다면 좁은 메트로폴 호텔에 가택연금을 당하고 살아가게 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체재가 그에게 내던지는 변화들을 최대한 적응하고 살아간다. 일단 확실한 것은 이 백작이 누구에게든 친절하고 박식하며 매너가 좋은 ‘진정한 신사’라는 점이 독자로하여금 그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그의 삶을 따라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정말 재미있다.

“안에 든 와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웃한 다른 와인과는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같기는 커녕 백작의 손이 들린 병 속의 내용물은 한 국가나 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다. 와인의 색깔, 향, 맛은 분명 그 와인이 태어난 지역의 특유한 지형과 고유한 기후를 나타낼 것이다. 그뿐 아니라 와인은 생산된 해, 생산된 지역의 모든 자연현상을 드러낼 것이다… 그랬다. 한 병의 와인은 시간과 공간의 최종 추출물이고, 개성 그 자체의 시적 표현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와인은 익명의 바다로, 평균과 무지의 영역으로 던져졌다. 갑자기 백작에게 상황이 명료하게 이해되는 순간이 찾아들었다. 미시카가 현재는 과거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현재가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 것인지 더없이 명료하게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백작도 지금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이해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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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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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by Umberto Eco

헛소리마저 천재적으로 통찰력 있게 쓰는 사람. 역시 움베르토 에코 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사람이 이 정도로 위트있는 사람이었나…? 하고 생각하게끔 하는 책이다. 나는 버트란드 러셀의 런던통신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이나 무라카미 라디오처럼 짧은,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가볍게 쓴 글들을 정말 좋아진다. 이 사람들도 일상을 겪으며 사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게끔 하는 동시에, 일상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생각과 그 안의 철학에 늘 감탄하게 된다. 이걸 한 단계 더 격상시킨 것이 움베르토 에코의 이 책이 아닌가 싶다. 엄청나게 디테일한 묘사와 역사적인 고증으로 점철된 그의 소설과는 달리, 때로는 상당히 신랄하게 현재나 특정 사람들을 비꼬는 글과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정말 공을 들여 정교하게 써낸 그의 이 ‘패러디’집, 혹은 ‘파스티슈’들은 그야말로 움베르토 에코를 신이 아닌 동네에 말 잘하는 친근한 할아버지로 만들면서도 날 더더욱 그의 팬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남자,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예를 들어 택시기사에 대한 신랄한 공감대를 끌어내는 “택시 운전사를 이용하는 방법” 이나 특정 문화의 편협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서부 영화의 인디언 역을 연기하는 방법”은 비틀어서 말하는 스탠드업 코미디 같다면,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에서는 고전문학에 통달한 기호학자답게도 어마무시한 지식의 방대함을 독자들에게 요구한다. 또 “제국의 현척 지도를 만드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하여”에서는 정말 헛소리를 시스테매틱하게 풀어놓으며 그 안에서 논증까지 해가며 현척지도의 불가능성을 증명해낸다. 가끔 이런 책이 정교하게 짜여진 소설보다 더 즐겁다, 뭔가 악마와 간통하는 것 같지만. 분명 에코도 독자들이 이런 짜릿함을 느끼길 바랬을 것 같다.

“아메리칸 커피 중에는 위에서 말한 것 말고도 구정물 커피가 있다. 대게 썩은 보리와 시체의 뼈, 매독 환자를 위한 병원의 쓰레기장에서 찾아낸 커피콩 몇 알을 섞어 만든 듯한 이 커피는 개숫물에 담갔다 꺼낸 발 냄새 같은 그 특유의 향으로 금방 식별할 수 있다.” - ‘호텔이나 침대차의 그 고약한 커피포트를 사용하는 방법’ 중에서

“세계 어느 곳을 가든 택시 운전사를 알아보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다. 잔돈을 일절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그가 바로 택시 운전사이다.” - ‘택시 운전사를 이용하는 방법’ 중에서

“광고와 애니메이션과 만화에는 마음씨 곱고 법을 잘 지키고 상냥하고 남을 잘 돌봐주는 곰들이 자주 나온다. 곰은 크고 뚱뚱하고 둔하고 어수룩하기 때문에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면 곰 자신이 모욕감을 느낄 지경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나는 센트럴 파크의 어린이들이 교육을 덜 받아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받아서 죽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 아이들은 우리의 떳떳하지 못한 마음에서 비롯된 그릇된 교육때문에 희생된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못된 존재인지를 잊게 하기 위해서 곰이 착한 동물이라고 가르친 결과이다.” - ‘동물에 관해 말하는 방법’ 중에서

“부정직한 밀매꾼에게서 산 성능이 나쁜 총을 사용하라. 그대는 총을 다루는 법을 모른다. 총알을 새로 장전할 때는 되도록 오래오래 뜸을 들여야 한다...공격을 당한 백인들이 요새를 빠져나갈 경우에는 사살된 적의 무기를 수거하지 말고 오로지 손목시계만 빼앗아 그 째깍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늑장을 부려라. 또 다른 적이 나타날 때까지.” -’서부 영화의 인디언 역을 연기하는 방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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