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눈동자에 건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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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스르륵하고 다 읽어버렸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이 흡입력이 있다는 것은 그의 전작들에서부터도 알았지만, 이 단편집의 글들은 유독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여태 추리소설을 어설프게 몇 권 읽으면서 제법 영리한 척하며 스토리를 예상해가며 읽는다 생각했는데, 이 단편소설들은 당췌 내 수비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약간의 판타지가 섞여있는 미스테리한 소설부터, 미래라면 있을 법한 일이려나 하는 소설, 생각치도 못한 반전으로 범인을 잡아주는, 읽으면서 소름이 돋는 소설까지. 누군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묻는다면 그의 입문, 아니 입덕을 위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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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 - 서울 하늘 아래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송기정 옮김 / 서울셀렉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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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것은 없었다. 외국인이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이 느껴지는 시선은 없었다. 동양의 신비함, 포장되고 제한된 시선이 아닌, 전라도 어촌에서 펄떡이는 날 생선같은 느낌이 확 풍기는 소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인이 쓴 프랑스 풍의 문학 같은 느낌이었다.
한국에 관심이 많은 소설가여서인지, 아니면 움베르토 에코처럼 사실성을 위해 대단한 사전조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작은 디테일, 손가락하트라던가 가수 거미라던가, 동네 미용실의 까만 소파같은 사소하지만 한국을 한국답다 하는 느낌이 들게끔 하는 것들이 소설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문체도 번역 투가 아닌 한국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따듯하고 친근한 느낌이었다. 단지 프랑스 문학 특유의 몽상과 성찰이 녹아있는, 그런 한국소설 느낌이었다.
빛나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수많은 책을 흡수하듯 빨아들여 자기 머릿속에서 새로운 인물을 지속적으로 창조하고 그들의 삶을 탐미한다. 사회에서 미묘하게 단절되고 이용당하지만, 점차 그 사회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히고, 이용당하되 이용할 줄 알게되어 결국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미묘한 감정이 들게 하는 책이다. 사람이 성장하고, 상상하고, 서로를 교묘히 이용하고 배척하지만 또 동시에 이해하고 아끼는, 여러 겹의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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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폴 서루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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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단편들이 모두 장편으로 풀어질 수 있을 정도로 깊이감과 겹겹이 쌓인 감정들이 특히 인상적인 책이었다. 여행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책의 설명을 보고는, 각 지역의 색감이 잘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단순하게 집어든 책에서 의외의 감정 소모와 깊이감 있는 독서를 하게 되어 사실 상당히 놀랐다. 낯선 땅에 도망치듯 닿은 사람들, 그 안에서 느끼는 이질감, 공포, 그리고 철저한 외로움. 정말 세상의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한 공포와 공포 사이로 한 번씩, 그러니까 단편과 단편사이의 또다른 단편에서 느껴지는 냉소섞인 시니컬함도 사실 정말 즐거웠다. 강약 조절이 잘 된, 속에서부터 서서히 잠식되는 듯한 공포를 느낄 때 쯤이면 한 번씩 피식, 하고 사람들의 허영과 기만에 웃을 수 있는, 그런 배치와 구성과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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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행방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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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나는 단편집에 꽂힌 듯 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온천스키장이라는 한 장소를 구심점에 두고 벌어지는 여러 이야기를 엮고, 그 주인공들 사이에 미묘하게 홍실을 엮어 정교하게 꼬아놓은 채 단편들 사이 사이에서 타래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장편소설 같은 흐름의 단편집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마지막 글인 ‘곤돌라 리플레이’에서는 ‘에이 참, 너무 뻔하다 싶게 결말을 짓네’, 라고 생각하던 찰나 통쾌한 웃음을 터지게 만들어 놓았다. 산뜻하고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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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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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치도 못한 방향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보다는 산문집과 에세이를 위주로 읽어왔어서 그의 평소 스타일을 잘 아는 편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세세히 묘사하고 그리는 작은 디테일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음악이나 그림을 묘사할 때 그는 상당히 많은 팩트와 디테일을 들여 표현한다) 이 소설 앞 부분을 읽을 때엔 주로 그런 부분들을 음미하며 읽었다. 특히 초상화를 업으로 삼는 관찰력이 뛰어난 화가를 주인공으로 기용함으로써 그 디테일들이 이질감없이 잘 표현된 듯 했다. 그런데 점점, 생각치도 못한, 유와 무의 경계 사이로 나를 끌어들여 상당히 관념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져서,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라는 말을 소설속에 담는 이들은 많지만, 이 책은 그 이야기를 독특하게 잘 전달하고 있는 듯 하다.
“이튿날 다섯시 반에 절로 눈이 떠졌다. 일요일 아침이다. 주위는 아직 캄캄했다. 부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옷을 갈아입고 작업실로 갔다. 동쪽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와 불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어 차갑고 신선한 아침공기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새 캔버스를 꺼내 이젤에 얹었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밤사이 내린 비로 주위 수목은 흠뻑 젖어 있었다. 비는 조금 전에 그쳤고, 여기저기 구름 사이로 빝나는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스툴에 앉아 머그잔에 담긴 뜨거운 블랙커피를 마시면서,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눈앞의 캔버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새하얀 캔버스를 바라보는 것이 예전부터 좋았다. 나는 그것에 개인적으로 ‘캔버스 참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지만 결코 공백이 아니다. 그 새하얀 화면에는 와야할 것이 가만히 모습을 감추고 있다. 유심히 들어다보면 몇가지 가능성이 존재하고, 이윽고 하나의 유효한 실마리를 향해 집약된다. 나는 그런 순간이 좋았다. 존재와 비존재가 조금씩 섞여드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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