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번역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두말할 필요 없이 어학 실력이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특히 픽션의 경우, 나름의 편파적인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것만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내가 내 작품이 번역될 때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입니다. 편파적인 사랑이야말로 내가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가장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259쪽
나는 기본적으로 고전이 될 만큼 뛰어난 명작은 몇 가지 다른 번역이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창작이 아니라 기술적인 대응의 한 형태에 불과하므로 다양한 다른 형태의 접근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유일무이한 완벽한 번역이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는 작품에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싶다… 양질의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해 다양한 측면에서 집적하여 오리지널 텍스트의 본디 모습이 떠오르게 하는 것이 번역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264쪽
평소 나는 번역이라는 작업을 가옥에 비유해, 25년이면 슬슬 보수를 시작하고 50년에는 크게 개축 혹은 신축하는 게 대체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해왔다.-274쪽
잘 아시겠지만, 바흐의 인벤션은 왼손과 오른손을 완전히 균등하게 움직이도록 설정되어 있다. … 따라서 글을 쓰기 전까지 나는 이 악곡집이 본질적으로 피아노 기교를 습득하는 예술적인 고급 매뉴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것이 인간의 신체 그리고 그 신체와 연결된 정신의 불균형을 치유하기 위해 바흐라는 희유의 천재가 만들어낸 장절한 소우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원고를 쓰다가 지치면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더듬어 연습하며, 숨이 멎을 듯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우주에 기분 좋게 몸을 내맡긴다.-295쪽
그러나 물론 바흐 인벤션이 구조적 개념만으로 성립되어 있지 않듯이 오스터의 소설 또한 구조적 개념만으로 성립된 것은 아니다. 바흐와 오스터가 창작자로서 실로 걸출한 점은 그 ‘그릇’과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이 표리일체하다 해도 좋을 만큼 강력하고도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 안에 강박적으로 반복해서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둘러싼 네임게임, 정체성의 등가호환성, 씨실 모티브의 혈연, 날실 모티브의 끊임없는 공간 이동, 그들 모티브의 연결 가능성을 끝없이 확대하는 우연성, 제시된 하나의 원칙을 추구하는 압도적으로 광신적인 열의,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순수 사고에 대한 동경. 이런 요인은 오스터가 자아내는 이야기의 주요한 소재인 동시에 그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수용하는 구조를 구축하는 성질에 관한 언급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가 내보이는 매혹적인 이야기(선율)를 따라가면서 저도 모르는 새에 저절로 소설 자체의 대위법적 태내순례를 할 수 있는 것이다.-296-297쪽
지금까지 계속 번역을 해오면서 소설가로서 좋다고 느꼈던 점이 몇 가지가 있다… 소설이 쓰고 싶지 않을 때는 번역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에세이 소재는 언젠가 바닥을 드러내지만 번역거리는 바닥날 일이 없다. 그리고 소설 쓰는 일과 번역하는 일은 쓰는 머리의 부위가 달라서 번갈아하다보면 뇌의 균형이 좋아진다는 장점도 있다. 또 하나는 번역 작업을 통해 문장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운다는 점이다. 외국어로 쓰인 어떤 작품을 읽고 ‘굉장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작품을 번역해본다. 그러면 그 글의 어디가 그렇게 훌륭했는가 하는 구조 같은 게 보다 명확하게 보이게 된다. 실제로 손을 사용해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바꿔나가는 작업을 하다보면, 그 글을 단지 눈으로 읽을 때보다 보이는 것이 훨씬 많아지고 또한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하다보면 ‘좋은 글은 왜 좋은가’라는 원리 같은 것을 자연스레 알아차리게 된다. -340-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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